(요한복음21:18) ‘ALL IN onE’
(요21:18)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요한복음을 마치며 쏟아낸 설교들을 돌아보니 미처 소화되지 못한 음식찌기를 보는 느낌이다. 성실치 못한 아쉬움을 양심이 매질해 온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이 요리상만큼은 햇볕이 잘 드는 장독대에 올려 두고 장인의 맛을 찾는 사람들에게 친근한 벗이 되게 하고 싶다.
匠人의 요리상에 올려 진 요한복음을 볼 때, 1장부터 3장까지를 에피타이저라고 한다면, 4장부터 8장까지는 잘 구워낸 빵이며, 9장부터 11장까지는 맛깔스런 소스를 곁들인 셀러드이다. 다른 코스가 아무리 뛰어나도 메인디쉬가 부실하면 파티는 망친다. 이를 위해 장인의 비장한 솜씨는 요한복음12장부터 17장 사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이때 18장은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준비된 일품 디저트로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다.
장인의 식탁에 초대받은 식객들은 이내 장인의 신들린 맛에 식귀(食鬼)가 되고만다. 장인의 신들린 손맛은 그를 찾는 지인들의 입맛을 돋우어 오장육부에 신들린 맛을 각인한다. 장인은 다만 그의 식객들이 참 맛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식사가 끝나면 식객들은 모두 돌아간다. 아무리 천하 명장의 요리상이라도 배부른 자 앞에는 무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의 요리는 시장이 반이라고 말한다.
신들린 식객들 중 더러는 장인의 맛을 재연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 어떤 화려한 식탁도 그 어떤 조미료로도 맛들인 식객의 입맛을 사로잡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는 장인의 손맛의 매력을 기억하고 있는 동안 그 언젠가 그 알고 있는 맛을 재연할 것이다. 신들린 맛이 스스로 그 맛을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이 아이를 위해 장인은 스스로 자기의 수명을 아는지라 자기의 맛을 이어 갈 '맛본(本)' 을 만들어 놓는다.
주님은 제자들의 긴 여행길을 위해 도시락을 준비하셨다. 이 도시락은 요리장의 특선메뉴로서, 영원히 기억해 두고 싶은 名匠의 맛깔이 모두 담겨 있다. 이는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식탁을 차려낼 제자들을 위한 '맛 본'(本)이다. 이것이 있다면 그의 제자들은 名匠의 신들린 맛을 재연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맛 본' (本)이 바로 요한복음 19장, 20장, 21장에 해당된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요한은 21장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절부터 14절까지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기록되었고, 15절부터 25절까지는 베드로와의 단독 인터뷰 장면이다. 여기서 우리의 과제는 이 두 단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살펴 보는 일일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5)
A. 부활하심을 증명하기 위해(1)
1절에는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기록되었다. 디베랴 바다는 통상 갈릴리 바다(요6:1)를 지칭하며 ‘디베랴 바다’라는 말은 헤롯 안디바가 이 지역을 건설하여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헌상하며 붙여진 이름이다.
흥미롭게도 14절에는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기록되었다. 이로서 이 단락에서 발견해야 할 주제의 초점은 왜 예수께서 세 번씩이나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야 했는가에 대한 원인 분석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서 두 번에 걸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던 일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신하여 제자들에게 내가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날 저녁,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 부활하셨음을 친히 보이셨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첫번째 나타나심이다.
그 후 8일째 되던 날 부활하셨다는 동료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도마와 함께 열한 제자들이 모여 식사 할 때 주께서 나타나 주의 살아나심을 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완고함을 책망하셨다.(요20:27, 막16:14) 이것이 두번째의 일이다. 그러면 오늘 세번째 나타나신 날은 언제인가?
마태복음에 의하여 예수님은 부활의 첫번째 증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28:10) 말씀하신 바 있다. 이에 대하여 마가는 무덤 앞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천사가 헌신하여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막16:7)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란 예수께서 제자들과 예수님 생전 마지막 만찬이 될 유월절을 드시고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오리브 산에 오르실 때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기록하신 말씀과 같이 ‘너희가 나를 다 버리리라’ 하시며 ‘그러나 내가 살아 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8) 하신 말씀을 가리킨 것이다. 이 말씀은 주께서 미리하신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지만 주님은 이미 제자들이 주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실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 일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마태는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마28:16,17)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그 당시 제자들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를 세 번이나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는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기록되었고, 후일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그 후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고전15:3-5)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대로’라는 말에 주목하게 된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처럼 나타나신 것은 주께서 성경에 미리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를 힘입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행1:8).
B. 물고기를 잡지 못함(3-5)
2절에는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세베대의 아들들은 저자 요한과 그의 형 야고보를 말한 것이며(마4:21), 또 다른 제자들은 정황상으로 볼 때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와 빌립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머지 4명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이것은 어쩌면 베드로의 리더쉽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주께서 그에게 “시몬아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내가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건히 하라”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문제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하루하루 초조함과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갈 것이다’ 고 제자들을 선동한 것이다. 이에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를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밤을 맞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돌아 오고 말았다.
어느 그룹의 리더라는 위치는 그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그 리더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따라서 그룹 전체에 어떤 흐름 곧 경향을 주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리더가 스포츠에 빠지면 낚시나 게임이나 경마에 빠지면 그 주변 사람들은 같은 영향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아마 그들은 예수께서 먼저 갈릴리에서 가서 너희를 기다리겠다는 말씀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눈에 각인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만큼 충격이 컸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무참하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한계 밖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앞서 두번의 상봉을 통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고 주의 살아나심을 기뻐했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제 말씀의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인데 그들의 생각과 일상은 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허탕을 치고 빈 배를 이끌고 돌아 왔다. 새벽녁에 이르러 갈릴리 해변으로 뱃머리를 돌렸을 때 예수님은 그곳에 서계셨으나 저희는 예수를 알아 보지 못하였다. 이 말씀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알아 보지 못하였다는 말이 아니다. 서계신 사람은 보았으나 그분이 예수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그 시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때 예수께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 물으셨다. 여기서 ‘아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아’(PAIDIA)는 선생들이 제자들에게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들은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주님은 계속하여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6) 말씀하셨다. 이에 그들이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니 구물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가 실렸다. 이 때서야 요한이 ‘주님이시다’ 말하자 베드로가 벗은 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려 주께 나아갔다.
C.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6-10) – ‘물고기를 만드신 분’
아마 요한은 예수님을 만났던 초기 시절에 이와 같은 장면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때에도 주님은 허탕으로 치고 돌아 온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5:4) 말씀하신 바 있다. 이때 베드로는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눅5:5) 하고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어 요한과 야고보의 배에 함께 나누어 실었었다. 이에 베드로는 주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죄인입니다’ 고 고백하였다. 수년이 지난 오늘 동일한 경황을 겪게 된 베드로의 머리 속에도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과거의 실수를 가볍게 흘려 버린다. 그 당시는 도저히 잊혀 버릴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얼마 지나면 새까맣게 잊어 버리곤 한다. 그러나 다시 동일한 경우를 만나게 되면 그때서야 지난 일을 생각해 내고 스스로 가슴을 필 때가 있다. 베드로를 따라 다른 제자들도 뛰어 내려 주 앞에 나아오니 육지에 서신 주께서 이미 숯불을 켜놓고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하시니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끌어 올리니 일백 쉰 세 마리의 큰 고기가 들어 있었으나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다.
주님은 그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12) 하셨다. 참으로 황당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은 그가 주이신 것을 알므로 유구무언이었다. 주님은 생전에 미리 말씀 하신 곳에 오셔서 주를 기다리지 않고 고기를 잡으러 나간 제자들의 조반상을 차려 놓고 계신 것이다. 아마 베드로는 쥐구멍이라도 들어 가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어떻게 오른편에 물고기가 있는 것을 알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분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다. 해와 달과 온 우주와 이 땅의 모든 것이나 바다의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며 또 그는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 시키실 만물 위에 계신 창조자이시다(엡1:22) 이에 바울은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7)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미리 물고기를 그곳에 대기 시키셨을 수도 있고 그물을 던지는 순간에 물고기 153마리를 창조하셨을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알 때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우리는 숙연해 질 수 밖에 없다.
이에 바울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엡3:20)라고 주를 송축하였으며,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약4:8)말하였고 다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를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55:6) 증거하였다.
D 그리스도의 식탁으로의 초대(11-14)
흠미롭게도 13절에는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기록되었다. 이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한 예수님이신가?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주께서 차리신 조반상을 받게 된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묵묵히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나와 당신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조반상을 차리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연일 아무 것도 모른 체 꾸역꾸역 밥상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제자들보다 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가? .
여기서 우리는 일상에서 말씀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신을 생각해 보자. 주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또 이미 우리가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미리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 좋아하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주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우리가 좋아하는 일들은 주 앞에 내려 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일들은 모두 허망한 시간 속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다.
기억될 것도 기억할 필요도 없는 허망한 일들이다. 그런 상황 속에도 주님은 주 앞에 내려 놓을 물고기를 손수 준비하시고 우리의 밥상을 손수 차리신다. 이는 엎드려 절 받기다. 이는 우리로 성경 말씀 속으로 다시 돌아 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말씀만이 실패가 없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Ⅱ. 사역의 기준(15-25) ‘나를 따르라’
“저희가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A. 베드로에게 물으심(15-17)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이신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 물으셨다. 베드로에게는 정신이 바짝드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눈 앞에는 153마리의 물고기가 놓여 있고 또 숯불이 타고 있었다. 이때 주께서 주변 상황을 둘러 보시며 ‘이들 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이다. 여기서 이들은 동료들일 수도 있고 어쩌면 물고기와 배들일 수도 있다. 더욱이 주님은 여기서 주께서 친히 지어주신 이름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았다. 그의 옛 이름 곧 육친의 아버지가 지은 이름을 사용하셨다. 이는 네가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한 것이냐는 말과도 같다.
더 흥미로운 것은 주님은 여기서 ‘사랑’ 곧 ‘아가페’(AGAPAO) 라는 단어를 거듭 사용하셨다. 이는 이미 생전에 누누이 가르치시던 하나님께 속한 사랑의 용어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 번 연속 ‘필레오’(PHILEO) 곧 친구 사이에 행하는 단어로 답하였다. 우리는 가끔 주님의 최고의 수준을 인간의 수준을 끌어 내리려 한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수준 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심의 수준을 요구하시는데, 우리는 계속 우리의 수준에서 대답하려고 한다. 그래도 주님은 상냥하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 하셨다.
여기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에 해당하는 헬라어 ‘보스케’ (BOSKE)는 영어 ‘Feed’ 곧 사료에 해당한다. 따라서 주님은 어린양에게 먹일 사료에 초점을 두고 계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 양이 우리의 양이 아니고 ‘My Lambs’ (ARNIA-어린양) 곧 주님의 어린양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네가 마음대로 할 양이 아니라는 뜻이다. 너는 그들을 먹이를 네 맘대로 이것저것 먹여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자기 마음대로 사료를 선택하고 있는가? 주께서 자기 양에 대한 사료를 이미 처방하여 주셨는데 목자들은 자기 임의로 자기 목적에 맞는 사료를 공급하고 있다. 그로서 양들에게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최근 슈너이더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어느 형제가 버려진 개를 데리고 온 것인데 이제는 내 가족이 되어 아침저녁 나와 함께 먹고 자고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강아지가 먼저 주인이 무엇을 먹였는지 알지 못하여 일반적으로 먹이는 사료를 사서 먹였는데 알러지를 일으키고 있다.
주사를 마치고 약으로 처방 된 삼푸를 사용해도 좀처럼 낫지 않는다. 수의사는 나에게 사료를 바꾸어 체질 개선을 해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의사의 처방을 따라 무기농 사료를 사다 먹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차츰 나아지는 것 같더니 다시 가랭이를 긁기 시작했다. 아무리 병원 약을 써도 그때뿐이고 제 몸이 괴로우니까 사료도 잘 먹지 않는다.
어느날 아침 산책을 하면서 살펴 보았더니 산책 길에서 냄새를 맡으며 바닥에 떨어진 더러운 것을 주어 먹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밖을 데리고 나갈 때는 개 마스크를 씌웠다. 애처럽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랬더니 이내 가려움증이 멎었다. 결국 사료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처럼 양들도 무엇을 먹이느냐에 따라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은 두번째 다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물으셨다. 이 때도 베드로는 친구간에 나눌 수 있는 필레오로 답하여 ‘주여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16) 답하였다. 이에 주님은 그에게 “내 양을 치라”하셨다.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신 ‘내 양을 치라’는 양을 다스리고 돌보라는 뜻이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포이마이네’ (POIMAINE) 영어 ‘Tend’에 해당된다. 다시 말하여 목자의 경향 곧 살을 살피고 돌보는 목자의 철학이나 이념이나 지배구조와 같은 것을 뜻한다. 김정일 체제에 있는 사람들이 주체사상에서 벗어 나지 못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양은 그리스도의 가치 기준 안에서 돌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번 다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물으셨다. 여기서 주님은 앞에서 사용하신던 ‘아가페’를 사용치 않으시고 베드로가 답변했던 ‘필레오’로 물으셨다. 주께서 두번이나 하나님의 가치 기준을 요구하셨는데 베드로가 계속 동료애로 답변하자 주님이 그의 눈 높이로 내려오신 것이다. 참으로 황망하기 그지 없다. 그러자 베드로는 더욱 입장이 난처해지고 근심스러워졌다. 어쩌면 그는 그 순간 자신이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 장담하면서도 세번이나 주를 부인하였던 순간이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주님은 포도나무와 가지를 말씀하시며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람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14) 말씀하셨다.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를 부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 순간 자기 동생 안드레가 잡혀가서 병사들에게 조롱을 받고 매질을 당하고 있다면 어떠하였을까? 그때에도 과연 그가 나는 그와 형제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었을까? 아마 동생을 사랑하는 베드로는 형답게 나서서 동생대신 자신이 벌을 받겠다고 나섰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구의 사랑에서 사용하는 ‘필레오’를 사용하여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더욱 마음이 찔렸을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근심하여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17) 대답하니 주께서 그때도 상냥하게 “내 양을 먹이라” 하셨다. 이 때도 주님은 자기 양의 사료에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러므로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올바른 영적교육 곧 우상숭배와 다른 종교로부터 온전한 개종을 위한 옳은 사료로 먹이라 하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3:2)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도들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으로 영적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양을 치라’는 말씀은 영적생활에 대한 경계를 뜻한다. 다시 말하여 영들이 자라 커지면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고집이 생기게 된다. 양순하던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성격이 거칠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지도자의 올바른 지배구조와 온전한 영적질서 속에서 생활의 균형을 잡아 줄 필요가 있다.
세번째로 ‘내 양을 먹이라’를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삶의 균형을 갖춘 성도들에게 지도자균형의 갖추어 주라는 말씀이다. 이는 목숨을 바쳐 친구의 입장에서 사랑의 책임을 다하라는 뜻이다(요15:13-15). 이 말씀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언급된 ‘서로 발을 씻으라’하신 세족식과 또 사랑의 완성을 위한 새계명과 관계가 깊다.
히브리서 기자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5:12) 증거하였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택한 백성 히브리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히브리 기자는 여기서 그들의 믿음이 온전치 못함은 결국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라고 경계한 것이다. 주의 형제 야고보도 흩어진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편지하여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되지 말라”(약3:1) 경계하였다. 이는 한마디로 너희가 교회 앞에 나서지 말라는 말과도 같다.
최근 나는 대전지역에서 성경공부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많은 근심이 생기고 있다. 그 양들이 원래 나와는 다른 사료로 양육되어서 상당히 거칠어져 있고 새로운 사료에 대한 거부반응까지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인내로 참으면 그들도 우리와 함께 같은 우리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나는 오늘 주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곧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하신 명심보감이라고 생각한다.
B. 어떻게 주를 따를 것인가? (18-24)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18) 말씀하셨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이 말씀은 후일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 주석하였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후일 십자가에 팔을 벌리고 꺼꾸로 죽어 우리에게 ‘쿼바디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하셨다. 이 말씀은 어쩌면 부자청년에게 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베드로도 경우가 다를 뿐이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을 것이다. 이미 주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눅9:23) 하셨고 또 바울도 우리를 향하여 “그런즉 너희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권고하였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지금 당신이 주를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라.
20절에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가 뒤를 돌아 보니 주의 사랑하는 제자 곧 만찬석에서 주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입니까?” 묻던 제자 (요한)가 따르므로 베드로가 주께 말하여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 물었다. 이 글을 쓴 저자가 요한일진데 정말 그 때의 일을 리얼하게 기록하였다. 아마 베드로는 요한의 영적 상태를 물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3) 답하셨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이 내용을 기록하여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을 것이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다시 말하여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던 너는 나를 따르면 된다 하신 것이다. 이는 각 사람의 사명이 각각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하여 함께 잘못 된 일을 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하다.
최근 우리나라는 그것이 옳든 나쁘던 다른 교회가 하는 일이면 다 하려고 한다. 할머니 한명 밖에 나오지 않는 교회도 다른 교회가 하니까 새벽예배와 금요철야 예배를 하고 성도가 열명이 않되는 교회도 성가대를 세우고 대표기도를 세우고 헌금바구니를 돌린다.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 되고 만다. 내가 갈보리채플로 전향한 후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갈보리채플이 모두 같은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같은 것이 있다면 성경 전체를 심도 깊게 가르치고 성령에 의해서 사역을 한다는 것이다. 옆집에서 부흥회를 연다고 덩달아 같이 가지도 않고 척 스미스 목사님이 이렇게 한다고 모두 따라 하지도 않는다. 아마 나는 내 제자들도 모두 주를 따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만약 그들이 나를 따라 한다면 다리가 찢어지고 실족하여 죽도 밥도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라는 말씀이다. 사실 위의 말씀은 베드로와 예수님 단 둘이서 나눈 말이다. 그리고 후일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에게 들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한 사람 베드로를 거쳤을 뿐인데 후일 이 말이 변하여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셨다’고 와전되었다. 정말 말이란 한치만 건너가도 달라진다. 남편에게 한말이 시어머니 입에서는 커다란 분노로 되돌아 오기 일수다.
그러나 오늘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왜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는가 음미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들이 기록으로 전달되지 않고 구전으로 전달되었다면 어쩌면 이 말은 ‘지금 주의 사랑하시던 제자 사도 요한이 서울 갈보리채플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고 와전 되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기록들은 우리에게 너희가 무엇을 따라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C.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러므로 요한은 22절에서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기록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사람을 따라 믿으면 않된다. 오직 성경에 기록하신 진리의 말씀을 따라 믿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된다. 그러나 누가 사람이 만든 교리를 중심으로 주를 믿고자 한다면 그는 베드로의 말이 와전된 것처럼 아주 근거없는 잘못된 믿음으로 빠져 버릴 것이다.
요한은 마지막 절에서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기록하였다. 이 말들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있지도 않을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요한의 의도는 무수히 많은 일을 행하셨지만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는 말씀을 통하여 그가 기록한 맨 마지막 성경 계시록도 참인 줄 알고 믿어야 할 것이다. 주여 네게 주의 말씀이 있사오니 주여 내가 오직 주만을 따르오리다. 아멘 아멘! 2008 9.14. 요한복음 강해를 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