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자유’
며칠전 또 트랜스젠더 하나가 자살을 하였다. 나는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영안실을 방문하였다. 고인의 어머니의 울음이 끊이지 않는 텅 빈 빈소에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동료 트랜스들이 서로의 슬픔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들의 실상을 익히 알고 있는 터였지만 이들의 세계를 보는 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벽안의 세계가 이들과 나 사이를 높은 벽으로 가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때 나 역시도 이들과 동일한 사고를 갖고 살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지옥이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나를 그곳으로 불러낸 지인은 목사가 된 나에게 저승으로 떠난 영혼을 위로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 영혼이 이미 저승의 문을 열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산 사람의 얼굴을 보아 줄 뿐이다.
돌연한 나의 등장으로 무거운 침묵이 빈소를 덮고 지나갔다. 평소 수다가 넘치는 그들이었지만 목사의 등장은 마치 굿판에 나타난 십자가 같은가 보다. 갑자기 입들을 봉한 채, 나를 기억할만한 얼굴들조차 나와 눈이 마주칠까보아 아예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려 버렸다.
이럴 때 침묵은 정말 싫다. 그렇다고 세상 농담으로 돌아 갈 수도 없고 또 목사라고 해서 설교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럴 때 목사는 정말 고역스러운 존재가 되고만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그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벽안의 세계를 사는 그들을 설복시킬만한 능력이 내게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궁 못난 목사같으니라고··)
한참동안 말미를 잡고자 애를 쓰는 나의 고역을 눈치라도 챘는지 한 아이가 미소를 지으며 ‘목사님 나도 교회를 다녀요. 우리 어머니가 목사님이시거든요’ 하고 화두를 꺼냈다. 침묵의 책임이 내게 있던 터라, 납덩이처럼 무거운 공간을 가르며 말길을 터 준 그에게 뭐라고 답을 해 주어야 할 것인데 어머니가 목사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 아이에게 난 무어라고 답을 해 주어야할 지 머리 속이 실타래처럼 엉키고 있었다.
내 답답함을 눈치라도 챘던지 그 아이는 ‘목사님 그래서 나는 영혼의 자유함을 누려요’ 하고 말을 이었다. 순간 내 머리 속에서 십여년 전 내 영혼을 자유케 하시던 날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하신 말씀이 춤을 추고 지나갔다.
자유함 바로 그것이다. 죽은 아이는 영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스스로 길을 떠났고, 이 말을 한 아이의 어미도 영혼의 자유를 위하여 목사가 되었고, 트랜스의 길을 택한 이 아이들도 육신의 굴레에서 자유코자 했음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말씀하셨다.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자유라면 그 영혼은 결코 자유치 못한 것을.. 오늘 나를 보는 이들 중에 그리스도 안에 숨쉬는 영혼의 자유를 느낄 수 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