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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9:41) 왕의 눈물

이요나 2009. 11. 26. 17:31

(누가복음19:41) 왕의 눈물

 

(19:41-42)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우리는 앞에서 소경 바디메오의 이야기를 살펴 보았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걸인이었음에도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주께서 그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을 그는 보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부자도 되고 싶고 출세도 하고 싶겠습니다만 그는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사람마다 모두 삶의 소망과 목적을 갖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 간다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목적에 어떤 대상이냐는 매우 중요하다.

 

 가룟 유다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부귀 영화를 성취할 출세의 발판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또한 야고보나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왕국에서의 누릴 자신의 입지에 대해 커다란 욕망을 갖고 있었다(10:36-41).

 

오늘 우리가 살펴 누가복음19장은 저자 누가가 여기다가 자신이 발견한 신비의 계시들을 모두 묻어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실로 놀라운 내용들로 가득 있다. 앞에서 전개되는 일들이며, 하물며 지명과 거론된 낱말 하나하나에까지 주옥같은 의미를 더하고 있다. 말씀들을 살필수록 진기한 보물들이 쏟아지는 같아, 마치 영혼에 심비한 현미경을 달아 놓은 같은 신비에 빠지게 된다. 말씀의 문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수천년의 역사 속에 감추어진 계시의 퍼즐을 맞춰지는 기쁨에 빠진다. 고통하는 심령 속으로 깊은 우물에서 올린 생수가 폭포수처럼 넘쳐 들어 오는 느낌이다.

 

I. 잃어버린 자의 기회(1-10)

인자의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

 

A.      여리고

내용은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 지나가실 때에 있었던 일이다. 여리고로 들어 오는 길목에서 소경 바디메오가 구원을 얻었고,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 서자 세리장인 삭개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여리고라는 이름은 축복받은 이름인가 보다. 여리고는 이미 구약에서 익숙한 지명이다. 같은 지명일는지는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리고는 약속의 가나안으로 들어 가기 위해 지나야 관문이었다. 흥미롭게도 열왕기하 2장에서 엘리사는 하나님의 벧엘에 들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여리고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야만 넘을 있는 영적전투의 현장임을 시사하고 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북쪽28km, 요단강 11km지점에 있는 마을로 종려의 성읍’, ‘향기나는 장소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의 가장 낮은 지역으로 지중해보다 250m 낮다. 예루살렘이 해발 760m 고원지대라 무려 1000km 정도의 고차가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여행이 여정은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오르신 변화산상을 기점으로 , 땅에서 가장 높은 도성 예루살렘 그리고 상대적으로 가장 낮은 여리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마치 하늘의 본향을 향해 전진하는 우리 앞에 펼쳐진 거대한 여리고 성과의 일전과도 같다.

 

B.      세리장 삭개오의 예지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실 군중 속의 삭개오는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보고자 하였으나 없었다. 그는 키가 작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없어 그는 예수께서 지나가는 길을 예측하고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갔다. 참으로 생각이 지혜롭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약삭빠른 사람 같으면 어찌 되었던 군중을 뚫고 들어가 예수를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세리장인지라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처지라서 군중 가운데로 들어 서지 못하였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키도 작았지만 억척스럽지도 못했던 같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것은 뽕나무라는 단어이다. 여기에 기록된 뽕나무는 사실 17장에 기록된 뽕나무와는 다르다. 단어는 쉬콘’(무화과) 모른’(뽕나무) 합성어로서 생김새는 뽕나무를 닮았는데 무화과를 닮은 열매를 맺으며 열매는 약으로 사용된다.

 

17장에서 언급된 뽕나무는 깊이 그리고 넓게 뿌리를 뻗기 때문에 좀처럼 뽑기 어려운 나무다. 예수님은 뽕나무를 비유로서 너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17:6) 하셨다. 비유는 어떤 일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려는 사람의 완고한 마음을 빗대어 하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언급된 뽕나무는 생김새는 뽕나무인데도 무화과 열매와 같은 열매를 맺는 뽕나무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보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완고한 사람같이 보이는데 온유한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선한 같은데 실상은 악하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삭개오에 대한 인식은 악하며 민족 반역자이며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 앞에 삭개오는 선한 뜻을 몸소 실천하였다.   

 

C.      예수님과의 대면

예수께서 앞에 이르자 우러러 그를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집에 유하여야겠다하시니 그가 급히 내려와 기쁨으로 영접하였다. 이에 뭇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비아냥거렸다.

 

이때 삭개오가 서서 주께 주여 보십시오 내가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8) 라고 말씀드렸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예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먼저 주신 것도 없는데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재산을 놓겠다고 공언하였으니 말이다.

 

삭개오가 여기서 사용한 토색이란 단어는 매우 흥미롭다. 누가는 쉬코판테라는 헬라어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단어는 무화과라는 말과 알리다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옛날 아테네에서 흉년이 들어 무화과 열매의 수출을 금지한 법이 있었는데, 풍년이 해에도 법이 취소되지 않자 업자들이 몰래 무화과를 수출해 왔는데 이를 뒤에서 고발하여 돈을 뜯어낸 자들이 있었다.

 

삭개오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세리장의 직무를 행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제사장들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여 축재한 것을 위협하여 탈취한 부분을 시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뒤가 구린 고관대작의 집을 털어 탈취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사배로 갚겠다는 말이다.

 

말을 들은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집에 이르렀으니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태어남으로부터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오직 믿음의 사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어 거룩한 백성의 삶의 실천을 전재로 한다. 또한 주님은 인자의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말씀하셨다.

 

그러면 여기서 잃어버린 자란 누구인가?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과 의롭다 하심과 거룩한 생활에서 벗어난 백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비유하신바 있는 일백마리는 처음부터 주인의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집을 나가 방탕한 아들도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구룹이 존재한다. 열심히 주의 말씀을 익히며 온전한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사건건 시비하며 형제들을 참소하는 지체 높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에게 분리되어 가운데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주님은 누구를 위하여 오신 것이라 말씀하셨는가?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II. 동상이몽(11-27)

저희가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11)

 

A. 배경

때에 예수님은 비유를 더하여 은화 므나의 비유를 하셨다.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다는 말에 숨긴 뜻은 주님은 이제 그곳에서 십자가의 형벌에 처해질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화 므나의 비유는 다음 세대 그의 재자들의 시대를 향한 예수님의 계시의 말씀이기도 하다.

 

우리 말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예루살렘에 올라 그 정하신 예정을 따라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게 되는데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르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 자리에 누어 있으면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만약 부부가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될까? 매우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아내와 남편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한다면 그 가정은 정말 아름다운 장래를 보게 될 것이다.

 

나는 가끔 한국에서 갈보리채플 사역이 장차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척 스미스 목사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여 다른 교단들처럼 갈기갈기 찢어질 것은 아닌지, 내 제자 중에서 빈야드와 같은 교회를 세우지는 않을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모두 내가 부족하고 그들이 실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으로서 그들의 발을 씻기지 못하였고 성실한 종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B. 흥미로운 비유의 배경

예수님은 비유하여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나라로 열을 불러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사람이 우리의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하셨다. 비유는 당시 사람들이면 이스라엘 중에서 있었던 어떤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다.

 

유대왕 헤롯이 죽을 아들들에게 자신이 통치하던 땅을 넷으로 분배하여 분봉왕으로 삼았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으로 동생 헤롯 필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삼았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변화산에 오르실 지나신 가이사랴 빌립보는 그가 건설한 곳이다. 또한 루사니아는 아벨레네의 분봉왕이 되었는데 사람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리고 오늘 주께서 하신 비유 속에 은유된 자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분봉왕 아겔레오의 일이다.  그는 포악하고 극악무도하여서 그가 로마황제로부터 분봉왕의 인준을 받으러 때에 유대의 지도자들이 오십여 명의 사절단을 뒤로 보내어 아겔레오의 됨을 저지하는 청원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유대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 고로 아우구스투스 아겔레오의 왕의 인준을 하지 않고 상속권만을 인정해 주고 유대에 로마의 행정장관인 총독을 파송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대가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계기가 되었다. 사실상 떼려다가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예수께서 시대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을 인용하여 비유를 하신 것은 일과 관련하여 장래를 미루어 생각할 여지를 주시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주께서 언급하신 비유의 말씀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C.  주의 므나

므나는 헬라시대 노동자 하루 품삯 1드라크마의 100배에 해당하는 헬라 은화로서 1달란트(34kg) 60분의 1 해당한다. 실로 돈은 아니지만 결코 장사하기에 부족하지도 않다. 비유 속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의 종들에 주인의 신임이다. 주인은 열명의 종들에게 공평하게 므나씩을 나누어 주며 내가 오기까지 장사를 하라고 하였다. 주인은 종들에게 감시 체제를 두지도 않았고 어떤 규제도 하지 않았으며 사람의 재량과 능력에 따라 있도록 하셨다.

 

이것은 오늘날 주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신임이기도 하다. 우리 교회들은 교회의 주인인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제재도 받지 않으며 교회는 부르신 사람에게 주신 재량과 생각에 의해 맡겨져 다스려지고 있다. 교회들이 무엇을 하던지 전혀 간섭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는 우리의 것이 아니며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는 왕으로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이 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저희를 부르니 첫째가 나와 말하여 주여 주의 므나로 므나를 남겼나이다”(15)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주의 므나라는 종의 답변이다. 장사를 위해서라면 주인의 이외에 자신의 돈이나 사채를 내서라도 내서 있을 터인데 그는 오직 주인의 므나 가지고 장사를 하여 므나를 남겼다. 융통성이 없는 사람 같지만 주인은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하였다. 여기서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는 말씀은 명령법으로 계속하여 차지하고 소유하라는 말씀이다.

 

나는 말씀을 읽으며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별 일곱교회의 사자들 중에 필라델피아 교회의 사자를 생각하게 된다. 계시록 기자는 그에게 편지하여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사람이 없는 그이가 말하시되 볼지어다 내가 앞에 열린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자가 없으리라 내가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을 지키며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3:7-8) 기록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나는 말씀은 교회의 많은 행위들 중에 빌라델피아 교회의 사자는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했음을 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여 어떤 교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전도에 힘쓰고 어떤 교회들은 여러 방법을 통한 기도에 힘쓰고 어떤 교회들은 성령운동에 힘쓸지라도 빌라델피아 교회의 사자는 우직하게 주께서 기록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자기 앞에 두신 열린문을 향하여 걸음씩 열고 나갔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주의 날까지 이를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달되어 것이다.

 

또한 둘째가 와서 주의 주의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하니 주인이 그에게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19) 하였다. 여기서 주인은 그를 첫째 종과 비교하지도 않았고 그의 능력에 따라 권세를 나누어 주었다. 여기서 돌아 장사하여 이를 남긴 므나 고을의 권세의 보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종들이 능력이 통치의 권세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는 장차 주의 날에 주어질 보상이라고 천년왕국의 왕노릇은 땅에서 대형교회를 세운 것에 있지 않고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의 말씀에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사람이 와서 주여 보시옵소서 주의 므나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습니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입니다.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기 때문입니다하였다. 그는 주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둔다는 말은 하나님의 신적능력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임으로 행하지도 않으셨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하신 질서를 따라 행하셨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사용한 것과 같다. 그는 능히 무엇이든지 있는 권능자이시나 주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비유로서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변리까지 찾았으리라”(22,23) 하셨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주께서 하신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감히 열어보지도 못하고 적용하지도 못하고 싸둔다면 그것은 알의 씨앗이 그냥 있는 것과 같다. 주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주신 능력에 따라 모든 말씀을 궁리하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계획들을 열어가라는 뜻이다.

 

주인은 다시 곁에 있는 자들에게 므나를 빼앗아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하니 저희가 가뢰되 주여 저에게 이미 므나가 있나이다하였다. 이에 주인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25) 하였다. 사실 말씀은 주께서 이미 앞에서 언급하셨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천국비밀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집의 등불로 세우신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받으리니” ( 4:24) 하셨고 이를 누가는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 8:18) 기록하였다.

 

또한 27절에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 언급되었다. “그리고 나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던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처음에 므나를 사람의 종에게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앞에 나온 사람은 불과 사람 뿐이다. 일곱명의 종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주의 므나로 자기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주인이 왕됨을 원치 않았던 자들이다.

 

오늘날 과연 문선명 교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의 왕으로 오시기를 원하겠는가? 정명석 교주나 신천지의 이만희 교주도 예수의 오심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께서 오시면 자신들이 어떤 형벌에 처해질 것인지를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아켈레오의 왕됨을 싫어하여 로비를 하였던 사람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자신들의 왕국을 위하여 장사한 사람들은 대적 원수가 받는 형벌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 말씀을 대하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까? 주의 말씀을 아는 것이 영생이요 은혜 위에 은혜 충만 위에 충만인 것을 알아야 것이다.

 

III. 성경의 성취(28-40)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38)

 

주님은 예루살렘 길목의 감람원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이르자 제자들에게 특별한 명령을 하셨다. 감람원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도망하던 곳으로 스가랴는 주의 날에 메시야가 이곳에 임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어 유대인들에게 신성시 되고 있는 지역(14, 11:23)으로 주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하신 겟세마네 동산이 이곳에 있다.

 

-스가랴의 예언의 성취

주님은 제자 둘을 마을로 보내시며 그리로 들어 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하시며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셨다. 이에 제자들이 말씀하신 곳에 가니 말씀하신 대로 나귀새끼가 매여 있어 풀려고 하니 주인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물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주께서 이르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그대로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과 또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당연한 것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내용은 앞 문단의 말씀과 어울려 우리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끌고 와 겉옷 나귀새끼 등에 펼치고 예수님을 태우니 진풍경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자기 겉옷과 나무 가지를 길에 펴며 앞서고 뒤서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시편118편을 찬송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진풍경은 흥미롭게도 스가랴서 99절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주님 오시기 500 여년 전에 살던 스가랴 선지자는 시온의 딸에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언하였다. 지금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현실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의 예언의 성취

더욱 우리를 놀랍게 하는 것은 바로 이날은 A.D.32 46일로서 다니엘 선지자가 말한 바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다니엘 선지자는 9 1절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로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칠십 년에 대하여 깨달았다고 기록하였다. 다시 말하여 성경공부를 하다가 말씀이 깨우쳐 왔다는 것이다. 이 또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이스라엘의 칠십 년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하여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외곽 참호)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에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 됨 같을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9:25-26) 전하였다.

 

여기서 한 이레는 7년을 의미하며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는 합하여 69이레로서 483년이 되고 이것을 바벨론역으로 환산하면 173.880일이 된다. 또한 다니엘에 말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은 느혜미야 2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바사 왕 아닥사스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술관원이었던 느혜미야에게 내려졌는데 이 날은 B.C.445 314일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173.880일 되는 날은 바로 A.D.32 46일로서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부분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마치 일정표를 미리 짜 놓고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일은 동일 민족 국가의 어느 왕이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실현 시키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용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매우 중요하며 이것은 역사이기 전에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섭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다니엘에서 이스라엘을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셨다 한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러한 성경의 예언을 기억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찬송한 것은 아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면 나귀새끼를 데리고 오는 일부터 그 사람의 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 사람들은 그러한 예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때 누구와 의논하지 않으며 누구에게 의뢰하지도 않는다. 하나님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스스로 예정하시고 스스로 성취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때 그의 종들에게 알리지 않고 하시지 않는다 기록하였다.

 

이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그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말하였다. 이에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셨다. 그것은 바로 이 제자들로 하여 이 예언을 성취되지 않았으면 하나님께서는 돌들이 소리를 지르게 해서라도 미리 하신 말씀을 성취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24:44) 하셨다. 또 계시록은 예수의 영은 대언의 영이라 하였다. 이러한 증거들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증거는 성령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 진다는 말씀이다.

 

자 이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앞 문단에서 살펴 본 삭개오의 이야기와 은 열 므나의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인가를 부디 깨달으시기를 바란다. 삭개오는 주의 가는 길을 보고 앞서 나가 기다렸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에 관한 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때까지 봉함하라 하였다. 지금 우리는 주의 오실 길목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의 말씀을 곧 기쁜 소식을 맡은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께서 왕으로 다시 오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

 

어쩌면 당신도 그들의 말에 미혹되어 그리스도께서 맡기고 가신 기쁜 소식을 땅에 묻어두고 희희락락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곧 돌아 오실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당신의 작은 키로 군중의 틈에서 무엇을 보려 애쓰지 말고 성경에 미리 하신 말씀을 따라 나가 뽕나무 위로 올라 가라. 그러면 주께서 당신의 집으로 들어 오실 것이다.

 

IV. 네 눈에 숨기운 것은 무엇인가? (41-48)

( 19: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A. 이스라엘의 딜레마(41-44)

여기서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무리의 찬송을 받으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께서 갑자기 성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483년의 침묵을 깨고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께서 공식적으로 들어 내 놓고 그의 성에 입성하시는 것인데 눈물을 흘리다니 이해가 안된다.

 

어떻게 보면 십자가의 고난 받으실 것을 미리 아시는 고로 그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리신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수천년 동안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들의 열조들과 함께 고대하던 메시야가 이미 그들 속으로 왔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도성을 보고 우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 왕의 왕이심에도 미리하신 말씀을 따라 친히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의 혈통으로 오신 그 영광의 순간을 눈으로 보되 보지 못하는 믿음의 도성이야 말로 얼마나 서러운 일이겠는가?

 

주님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루살렘 성전은 수천년 동안 그의 오심을 기리며 예배를 드리던 그 거룩하고 신성한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역사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과 같으며 그들의 소망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조상으로부터 하나님의 평화 곧 평안을 기원해 왔다. 하나님의 평안은 곧 그들의 신앙이며 그들의 삶이었다. 거룩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민족에게 베푸신 평안의 복음 마음과 삶과 영혼의 평안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 극한 환난 속에서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평화 곧 그의 평안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평안은 곧 이 땅에서 천년왕국을 이루실 메시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성을 바라 보시며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셨다.

 

이 말씀은 앞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평안과 또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만약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영원한 평안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더면 그들은 비록 앞으로 어떤 고난의 날이 와도 슬퍼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메시야를 보는 순간 그들의 감추어진 모든 비밀을 깨닫고 영원한 평안에 들어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들이 십자가에 단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이심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그들의 구속 시간의 화살은 시위를 떠나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더욱 완악해져서 마지막 그들을 위해 남겨두신 일곱 이레가 이르는 날이 되어야 구속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딜레마인 것이다.

 

지금 그들은 헤롯이 46년 동안 지은 웅장한 성전을 바라보며 메시야의 오심을 기리며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성경에 기록하신 바와 같이 이미 입성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 이제 곧 날이 임하면 그들은 수천년 동안 고대하던 메시야를 맞지 못한 체 수천년 동안 율법과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지내온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한다.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안을 선물로 받고 성전이 무너지는 고난을 피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주 후 70년 로마의 디토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권고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피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나 메시아의 오심을 기리며 성전에서 안식일을 지키던 유대인들은 모두 그 성전의 돌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A. 종교활동에 빠진 사람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장면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는 자기에 대한 모든 성경적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가운데 이제 얼마 후면 수천년 동안 믿음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인데 그 성전 안에서는 돈벌이를 일삼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노하여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시고 저희에게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셨다. 사실 그들은 그곳에서 성전에 헌금할 화폐를 바꾸며 환전상 노릇을 하였으며 또 제물로 드릴 양과 염소와 비둘기들을 비싼 값에 팔고 있었다.

 

더구나 그곳은 이방인들을 위한 뜰로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예배를 받으시던 곳이다. 그러한 곳을 장사의 소굴로 만들어 예배 드리러 오는 성도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이 일이 한번 있었던 일이 아니다. 주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첫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가셨다. 그때도 예수께서는 그들의 상을 뒤엎으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2:16) 하셨다. 그런데 여전히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B. 성경을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 교회들 속에서 행하여 지고 있는 일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교회에서 선교와 전도를 빙자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돈을 착취하고 있다. 그들은 늘 하나님의 일이라 말하며 돈을 모으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교세와 영광을 위한 것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하여 무엇을 요구하시도 받으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린 것만을 받으신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 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고 있었다면 결코 그런 잘못된 행위들은 하지도 않을 것이며 사람들도 그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바라보는 그 순간에도 날마다 성전에 들어가 성도들을 가르치셨다. 여기서 주께서 가르치신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예정에 대한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들의 두목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꾀를 내기 시작하였지만 백성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고대하며 기원하던 메시야가 눈 앞에 와 계시거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를 죽이려 결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평안에 관한 일들이 숨기워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주께서 오실 권고의 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천년 동안의 믿음 가운데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종교활동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제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기 위해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다. 그런데 날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들은 늘 맷돌을 돌리며 많은 생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노력과 활동 속에서 그들의 눈에 평화에 관한 일들이 숨기였다면 그들의 믿음의 결국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경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 기록하였다. 여기서 영혼의 구원은 영과 몸이 흠없이 그리스도의 날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오늘날 성도들이 장차 올 대환난의 고통을 알고 있다면 그가 싸놓은 열정과 그 믿음들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그에 속한 가족들이 함께 멸망받을 것을 알 수 있었다면 그들에게 좋았을 것이다. 이러한 성도들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계실 것이다. 왕의 남자에 취하지 말고 왕의 눈물을 기억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한다.

 

사랑하는 주님! 오서 오십시오! 그러나 나는 주께서 오는 날까지 주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 속에서 살겠습니다. 아직 내가 삶에서 이루지 못한 주님의 말씀을 이루어 주의 뜻이 종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종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내가 성실한 말씀으로 살고자 합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