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한음성

생명의 말씀과의 사귐

이요나 2023. 5. 19. 19:07

생명의 말씀과의 사귐

 

(요일1:3) 우리가 보고 들음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쓴 목적을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1:4) 증거하였고,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이것을 씀은 너희로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2:1) 하였으며, 세 번째 이유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5:13) 증거하였다.

 

요한은 서두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1) 기록하였다. 여기서 태초란 시간과 공간의 출발지인 천지창조의 이전을 뜻한다. 따라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창세기와 또 요한복음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기원이 되심을 증거한 것이다.

 

요한은 먼저 생명의 말씀과의 관계가 '들음'에서 시작되었다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바울도 믿음은 들음에서 비롯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증거한 것이다. 계속하여 요한은 '눈으로 본 바'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눈으로 보다'(horan)라는 단어는 마음의 상태가 아닌 시각적인 관점을 뜻한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의 관점과 같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주목하고'(데아스타이)라는 단어는 물체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본다는 뜻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7:24) 물으신 일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가 광야에서 본 세례 요한의 실체가 무엇이냐를 물으신 것이다.

 

요한은 계속하여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하였다. 이것은 말씀과의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교류를 뜻한다. 사도들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요한은 지금 우리가 말씀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의도한 것이다.

 

요한은 2절에서 "이 생명이 나타나신 바 된 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생명의 나타남이란 실존적인 존재를 언급한 것으로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것이다.

 

이제 요한은 "우리가 보고 들음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3) 증거하였다. 여기서 사귐은 단어 헬라어 코이노니아인데 이 단어는 완전히 동등한 영어 단어가 없다. 그래서 연합으로 번역되기도 하며 하나로도 번역되었는데, 이 글을 쓴 요한의 의도는 생명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지체 곧 교회와의 온전한 사귐을 되어야 함을 전재한 것이다.

 

4절에서 요한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로라"증거하였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이 일을 자기 개인의 이야기로 하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를 칭하였다. 그러므로 이 글을 보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다.

 

이제 요한은 우리와 교제한 복음의 실체에 대하여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은 우리의 말씀과의 사귐은 빛과의 교제로서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증거한 것이다(6). (이요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