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한음성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이요나 2024. 1. 6. 18:26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24년 갑진년 새해 벽두를 맞는 사람들의 소망과 화두는 평안이다. 그러나 우리가 맞은 새해 첫날 펼쳐진 소식은 이웃 일본 이시카와현 노토반도의 7.6의 강진이다. 어제 아침에는 정말 지구 망하나라는 제목과 함께 스웨덴 영하 43, 영국 300곳 홍수로 국가 마비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3년이라는 긴 나날, 코로나바이러스를 피해 겨우 숨을 쉬는 사람들에게 우크라이나 전쟁과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은 강 건너 불처럼 비켜 세웠지만,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터지는 폭우의 재앙은 인류가 쌓아놓은 죄의 벌이 오늘에 충돌하는 느낌이다. 이런 날들 속에서는 우리는 어디서 평안을 구할 것인가? 세상은 아무런 답을 내어놓지 못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숨어 지내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첫 대면에서 하신 말씀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나 그리스도의 왕국을 향하여 힘차게 달리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다시 고기잡이를 나섰고, 두 명은 엠마오로 내려갔다. 생명의 말씀과 함께 지낸 3년의 세월이 짧은 것은 아닐진 데 스승의 죽음은 복음의 비전은 고사하고 삶의 소망까지 꺾어 버렸을 때였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예수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여인들이다. 주님은 부활 첫날 먼저 그녀들에게 보이시며 평안하냐?” 물으셨다. 평안할 수 없는 상황에 평안하냐 묻는 것은 어떤 의미를 내포한 반어법이다. 주님은 그녀들에게 속히 제자들에게 달려가 주께서 살아나신 것과 너희를 갈릴리에서 뵐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무엇인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지만 주님은 삶의 소망을 상실한 여인들의 시선을 제자들을 향하게 하셨다.

 

과연 혼란과 두려움 속의 인생들에게 평안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는 오직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성경의 답변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살롬이란 단어는 영혼의 소망이며, 믿음의 중심이며 삶의 위로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한다!)

 

올해로 76살을 맞는 나에게 너는 평안한가?” 자문해 본다. 내가 살아 온 역사이든 현재의 상황적이든 평안할 조건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는 초라한 사람이다. 그런데 살상 나는 평안하다. 마음이 평안하고 삶이 평안다. 노년의 지병으로 쉴새 없이 기침을 뱉으며, 밤이면 홀로 연약한 숨소리를 세이면서도 나는 평안히 잠들고 일어나 평안한 하루하루를 맞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평안의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 당신의 평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묻는다면 나의 평안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옵니다. 주께서 평안하냐 물으셨고 다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한마디로 나의 평안은 그리스도의 말씀과의 관계성에서 온 것이다.

 

나는 열왕기하 4장에서 수넴여인의 평안을 보았다, 그녀의 평안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샤와와 관계성 속에 있었다. 제자 게하시는 포도원을 꿈꾸고 있었지만 수념여인은 엘리샤와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33:6) 증거하였으며, 예레미야는 우리에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29:11) 전하였다.

 

오늘이라는 종말의 날에 당신의 평안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말씀하시며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은 이 말씀 속에서 평안의 숨은 그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요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