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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채플 특징- 제6장 말씀의 우선권

이요나 2006. 7. 15. 15:11

갈보리채플 특징- 제6장 말씀의 우선권           서울 갈보리채플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디모데전서 4:13).

갈보리채플의 특징 중에 일차적으로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모아놓고 이러한 원리를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에베소의 해변 지역인 밀레도 지방의 에게해의 바닷가에 모였을 때에 바울은 모든 사람들의 피에 대해서 아무 거리낌이 없음을 선언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사도행전 20:27).

이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모두 다 전했다고 선언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람이 교인들에게 그렇게 선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경말씀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계시록까지 모두 다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일 만이 가능할 것이다. 당신이 당신의 교인들에게 성경전체를 가르쳤다면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설교만 한다면 성경전체를 가르칠 수 없다. 제목설교를 한다는 것은 좋은 점이 있지만 제목설교는 당신이 좋아하는 특수한 제목을 강조하여 설교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에서 어떤 제목들은 별로 영감적이지 않고 사람들이 크게 감동 받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목들을 반드시 다루고 지나가야 할 부분들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이 이러한 부분들을 지나쳐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제목설교만 한다면 당신은 어려운 제목이나 논쟁의 대상이 되는 제목들을 피하는 경향이 있게된다. 이러할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균형 있는 견해를 갖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계속하여 가르치는 이점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당신은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다 전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갈보리채플 코스타메사에 있는 성도들에게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다 전하였다” 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일곱 번을 반복하여 성경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성경을 여덟 번째 공부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다 공부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갈보리 채플교회는 특히 성공하고 있는 교회들을 보면 성경전체들을 계통적으로 구구절절 빼지 않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갈보리 채플의 가르치는 형태가 강해설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목설교나 어떤 특수한 제목의 메시지를 가끔 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제목설교가 잘못 됐거나 악한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제목설교의 좋은 점도 있다. 우리는 모든 설교를 놓고 이것이 설교학적으로나 강해설교 적으로 바르게 하였는지 분석하는 극도의 율법주의에 빠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가르침에 있어서 대부분 이사야의 가르침의 표본을 따라가고자 추구하는 바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이사야 28:13). 이 구절은 이사야가 가르치는 형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술한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가르침의 방법을 비웃었으나 이것은 효과 있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이사야에 대해서 불평하여 조롱하는 말로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사”이라고 비웃는 말을 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빼지 않고 경계에 경계를 교훈에 교훈을 모두다 가르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이렇게 가르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모두 그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계통적으로 가르치는 또 다른 이점은 교회 내에서나 개인의 생활에 대해서 어떤 어려운 문제를 다룰 때에 그 문제를 단도 직입적으로 다룰 수가 있다. 사람들이 “오늘 설교는 나에게 향하여 한 말이다”라고 생각할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생각하기를 오늘의 말씀은 단지 성경의 순서를 따라 계속해서 상고했을 따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오늘은 이 제목 내일은 저 제목으로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성경을 계통적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계속해서 가르칠 따름인 것이다.

느헤미야 8장 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자유함을 얻고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을 다시 재건하고 있을 때에 지도자들이 모든 백성을 이른 아침에 한자리에 모아 놓고 단상에 서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느헤미야 8:8).

이것이 강해설교의 잘 표현된 정의라고 믿는다 -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의 느낌을 갖도록 한 후 사람들로 하여금 그 뜻을 깨닫도록 설명해 주는 것이다. 나는 많은 경우에 특수한 구절을 오십 번 내지 육십 번 읽을 때에 그 뜻을 포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갑자기 내 마음속에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구절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 좋은 주석을 사용하는 것도 가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신 깨달음도 감정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신 깨달음을 음미 해보고 다른 사람이 쓴 주석을 여러 페이지를 읽어도 나에게는 많은 경우에 아무 사용 가치가 없음을 고백한다. 어떤 특수한 난해 구절을 놓고 일곱 주석을 펴고 읽고 연구 해보면 읽기 전보다 모두 읽은 후에 더욱 큰 혼돈을 가져오는 때가 많다. 왜냐하면 이 특수한 구절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개념과 생각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의 가장 좋은 주석은 성경 자체라고 믿는다.

갈보리채플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일반적으로 하루 밤사이에 즉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미를 알게 될 때까지는 연마하는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그들이 자라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지역에 갈보리채플 교회의 기초를 닦는데 약 이년의 기간이 소요된다. 준비한 굳은 땅을 파고 흙을 부드럽게 하며 옥토에 씨를 뿌리고 그 다음은 기다리는 것이다. 뿌린 씨가 밤사이에 당장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그 씨가 자라고 발전하여 결국은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목회의 이년 마지막에 그만두는 경향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목회자들이 위기에 봉착하게되고 대게 용기가 저하되어 자기가 사역하는 곳에서는 갈보리채플의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사역하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믿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다고 믿는다.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개척교회를 시작하고 그만두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은 대개 이년 후에 나에게 전화하여 여기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목회를 떠난다고 말한다. 그럴 때에 나는 그들에게 “6개월만 더 기다려 보라”라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 “보라 당신이 어려운 고비는 넘긴 셈이다, 땅도 파고 흙을 배양하고 씨도 심었는데 이제 열매가 나오는지 어디 기다리고 관찰해 보라”라고 격려한다.

일반적인 규칙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린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3년째에 열매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태복음 13:8). 그러나 이러한 열매가 갑자기 하루밤 사이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갈보리 채플 운동은 불이나 섬광 적인 것으로 사람들을 즉시 몰려들게 하여 많은 군중을 기대하고 온 자들에게는 아주 용기를 저하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기적을 보고 불꽃놀이로 흥분적인 일은 없고 하나님 말씀만 읽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형태인 것이다.

 

이러한 흥분적인 일을 하는 자들이 즉시로 일시적인 성공을 한 것 같이 보이나 거기에는 발전이나 성장 같은 것을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다니엘 12:3).

7월 4일 독립 기념일에 하늘에 로켓을 쏘아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섬광을 일으키는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우”, “와” 소리를 지르며 감탄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동안만 지속한다. 이것은 즉시로 재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순간적인 하나의 섬광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모두이다.

 

이것이 많은 목회가 하고 있는 길이다. 단지 하나의 큰 섬광, 그것이 모두이다. 이것은 하늘에 무슨 빛을 발하기를 원하는가는 당신이 결정할 일인데 별과 같이 영원무궁토록 발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하늘에 쏜 로켓과 같이 갑자기 나타난 빛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 즉시 사라지는 섬광을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