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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장-2) 차세대 크리스천, 그 문제점 분석(2)

이요나 2007. 2. 15. 13:57

(창세기 26장-2) 차세대 크리스천, 그 문제점 분석(2)

 

(26:19-22)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새빨간 거짓말

앞에서 우리는 거짓말로 자기의 생명을 지키려다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망신을 당하는 이삭을 보았다. 아브라함이야 사라가 이복 동생이었으니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이삭의 경우는 아주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처럼 조롱을 당하고도 이삭을 살려두고 선대한 것은 과거 아브라함과 선대 왕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왕실 기록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 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는 아비멜렉의 말을 통해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이처럼 삶의 현장 속에서 체험한 하나님에 의한 징계의 기억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단면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때의 이삭의 나이가 얼마 안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이 사건이 이삭이 60살에 낳은 에서와 야곱이 장자권을 놓고 싸운 것으로 보아 최소한 이삭의 나이는 75-80세는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가뭄이 들자 이삭은 에서와 야곱에게 가축들을 맡기고 리브가를 데리고 기근을 면할 새로운 경작지를 탐방할 생각으로 출발하였을 것이다.

 

과연 축복인가?

다행히 이 사건 후 전화위복이 되어 블레셋에서 합법적인 체류 허가와 생명의 보장을 받고 체류하게 되었다. 여기서 성경은“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므로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지만 그것은 그를 징계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깨우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징계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처음 계획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 그 뜻을 완전히 깨달아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돌아가기까지 하나님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이방 가운데 살아가는 택한 자에 대한 축복도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인생 길을 섭리하시면서 그가 노력하는 삶에 복을 주신다. 이와같이 이삭은 이방 속에서 100배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지만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뜻이 변한 것은 아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돌을?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른 길로 가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축복을 받게 되면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시고 자기의 생각을 인정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으신다. 만약 그가 자신의 뜻을 변경하였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계획으로 대체할 정도로 불안전한 것이 되고 만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준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신다. 본문을 살펴보면 이삭은 거부가 되었으나 바로 문제 속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세상 가운데서는 오히려 문제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자 그는 많은 양과 소떼와 하인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자 원주민인 블레셋 사람들이 질투하고 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현대 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외국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을 때에는 도와주고 불쌍히 여기다가도 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텃세를 부리기 마련이다.

 

이삭이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먼저한 일은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막아버린 것이다. 우물물은 생존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회 문제로 번지게 되자 결국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출국 명령을 내린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낼까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솔직히 말하여 온전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생명권 전쟁

아비멜렉으로부터 철거 명령을 받은 이삭은 다시 그랄 골짜기로 옮겨 장막을 친후 전에 자기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시 파기 시작하였다. 사실 중동 지방에서 우물이란 인간의 생명의 근원과 같은 것이었다. 이 우물은 아브라함이 철거 후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린 것인데 이삭은 그곳을 다시 복원하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부르던 이름대로 불렀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주목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까지 인간은 정립된 인간의 기준 속에서 안착하려는 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그 문제의 해답을 하나님의 지혜로 찾으려 하지 않고 인간이 이루어놓은 기준점을 답습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고 이미 이루어놓은 체계를 구축하여 그 방법을 구체화하고 종국에는 이념화 내지 신격화하여 종교적 체계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삭이 그 우물만으로는 부족하여 그 종들이 골짜기에 또 다른 우물을 파자 그 지역에 살던 그랄 지역의 목자들이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이삭의 목자 사이에 우물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을‘에섹’이라고 하였는데‘싸우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우물 전쟁 속에서 이삭의 종들이 또 다른 우물을 파고 그 이름을‘싯나’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것은‘증오’‘적개감’이란 뜻이다. 이처럼 우물 전쟁은 민족적 자존심이 걸린 싸움으로 파급되면서 민족과 민족 사이에 적대감이 형성되기 시작된 것이다.

 

현대의 중동 지역의 석유 싸움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싸움의 발단은 결국 물질의 풍족과 사람들의 질투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께서는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셨다.

 

과연 이긴것인가?

이처럼 다툼이 치열해지자 이삭은 그 골짜기를 벗어나 넓은 지역에 이르러‘르호봇’이란 우물을 파게 되었는데 그때서야 다툼이 멈추었다. 아마 이삭의 종들의 투지에 그들이 지쳤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 우물의 이름을‘르호봇’이라 불렀는데‘르호봇’이란 뜻은‘넓은 공간’이란 의미로 그들은‘하나님이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라’고 자축하였다. 이제 누가 우리를 막겠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지고 볶고 하며 옮겨다닌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이러한 일을 답습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이 이쯤 되고보니 그랄에서 삶의 뿌리를 내린 이삭에게 임한 물질적 축복은 과연 더 이상 하나님이 주신 평안의 축복이 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은 복도 주시고 환란도 주신다. 그리고 모든 인간을 다루심에 있어서 계속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경험과 사회적 통계 속에서 가장 안전한 것을 선택하려고 한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서 배제된다는 가정 속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경험과 지식으로 터득된 통계 속에서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이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리 속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 인간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하나님의 손을 떠나서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아무 곳도 없다. 다윗은 이를 말하여“내 혼이 음부에 내려갈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다”라고 하였다.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이쯤에서 우리는 26장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물려받은 차세대로서 그는 이론적인 믿음은 터득하였지만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한 합의를 찾지 못했다.

 

히브리서 기자는“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함이라”(히 4:1-2)고 하였다.

 

또한 비록 믿음속에 이미 들어온 우리라 해도 우리를 권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믿음과 화합하지 못하면 믿음의 형체는 있고 삶의 누림이 없게 되어 온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이러한 믿음의 경륜을 이해시키고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삶의 여정 속에서 샛별이 떠오르듯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이삭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살펴볼 차례다. 베드로는 이에 대하여“우리에게 더 확실한 말씀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