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에대하여

[스크랩] 관상기도는 진리의 사각지대

이요나 2007. 5. 8. 19:33
관상기도는 진리의 사각지대
김삼  2007/04/11, 조회 : 3,088, 추천 : 0


사진: 칼 융이 서문을 써준 스즈키의 '선불교' 표지. 오른쪽 사진 출처: novembersong.blogspot.com

-관상영성엔 '경계선'이란 게 없다..이동원의 관상관을 중심으로


관상기도의 '정의'나 신학적 개념을 여기서 구구히 내리긴 싫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관습이라서 독자도 알아볼 만큼 알아 봤을 테니.

어린아이들은 경고할 수록 나쁜 것에 호기심을 갖는 법이다. 성인들도 마찬가지, 율법이 금할수록 죄를 더 짓지 않나. 그러니 관상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할 사람은 뒷구멍으로 다 할 것이다.
"딱 부러진 반론이 없는 이상 나도 조금씩 해 보고 싶다"는 호기심 넘치는 호사가들에게 필자가 아무리 침 튀겨 가며 경고해 본들 무슨 소용이겠나? 그래서 "하지 마라", "하지 마라" 보다도 구체적인 사례로 그 위험을 반증하련다.  

관상 담론에서 유의할 것 한 가지는 관상영성은 신교 관상가들의 입바른 주장과는 달리 성경 진리 즉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 복음을 초월하여 하는 묵상 형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기독교로부터 카톨릭/정교회/불교(티벹불교/일본불교/선불교 포함)/도교/힌두교 등 종파/종교 간 대화 및 에큐메니컬리즘의 촉매가 되고 있다.

관상기도의 텃밭에서는 모든 종파, 더 나아가 모든 종교가 허물 없이 어울리는 게 상식화 돼 있다. 따라서 성경 진리와 영적 분별을 염두에 두면서 관상에 호기심을 갖거나 탐닉하는 성도의 복음 정신은 관상 추구에 방해가 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예컨대 20세기 관상의 선구자 토머스 머튼이 은둔해 있던 겥세마니 수도원에 티벹 불교의 수장, 달라이 라마까지 와서 머튼의 무덤에 참배를 하고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등 아무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관상은 복음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유형이라는 점에서 현재 신교계의 관상기도는 복음에다 억지로 끼어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금치 못한다. 신교계 관상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관상은 복음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따라서 신교계 관상가들이 교회와 복음을 이용하고 있다는 논리도 피해 가지 못한다.

관상을 강조하고 즐긴다는 점에서 토머스 머튼, 존 메인, 리처드 포스터 등 종교다원주의자들이나 한국의 이동원 목사, 미주의 강준민 목사나 아무 차이가 없다. 더욱이 비슷한 형태의 기도를 해온 힌두교도/불교도/도교인/유교인들도 별 부담없이 한데 어울린다는 것이다.

     이동원 부부의 영성을 '지도'한 샬렘 인스티튜트

아마 이동원/강준민 같은 사람들은 이런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부정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단적인 사례로 입증해 볼 수 있다.  

이동원 목사는 '관상과 행동의 미학'(2002년 8월3일)이란 칼럼에서 그 해 7월 유학생 수련회 '코스타'와 워싱턴 지구촌교회(김만풍 목사)와의 교차사역 후, 1주동안 볼티모어 근교의 '성삼위일체 수도원'에서 '샬렘 인스티튜트'의 영성지도를 따라 부부가 함께 관상기도로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다.

이동원 부부를 "영적으로 지도한" 문제의 샬렘 인스티튜트(www.shalem.org)는 종파를 막론하고 '성직자'들과 신도들의 관상영성을 보급해온 단체다. 표면상 그럴듯한 기독교단체 같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종파'만이 아닌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초월한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샬렘 인스티튜트가 실시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필자의 눈을 의심케 한다.

지난해(2006년) 11월4일 메릴랜드 세인트마크장로교회에서 실시한 프로그램의 제목은 '관상 실천으로서의 선(禪, zen)-정의의 길'. 프로그램 소개문엔 일본 불승 바수이 토쿠쇼의 말까지 곁들였다. "그대의 참 본성을 깨우칠 때..그대의 많은 고유의 덕목들을 나타내고 남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삶에 혜택을 주게 된다."

명색이 '장로교회'인 이 장소에서의 웤샵은 선불교(zen buddhism)의 관상을 소개하고 참여자들 전원이 가부좌 자세로 좌선 실습, 걷기 명상을 한 뒤, "선(禪)이 우리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온정적 행위를 구현할 수 있는 한 삶의 길을 보충해 줄 수" 있음을 배운 과정이었다. '선(禪)과 하나님'이라..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불교의 자연신과 별 다름 없음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소개문은 또 카톨릭 사제인 라벗 케네디의 책, '선 정신, 기독교 정신: 기독교 삶에서의 선(禪)의 위치'에서 다음 글을 인용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승 아래서의 선(禪) 실천이 기독교 삶에 결합될 수 있음을 체험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도 체험을 심화시키고 우리의 신심을 우리의 머리만이 아닌 우리의 전인에 뿌리박게 해 줄 수 있다."

이 홍보문은 "우리 다함께, 이 선의 요소를 통해 그런 결속을 기르도록 힘써 봅시다."로 매듭짓고 있다. 독자는 무심코 읽을지 모르지만 필자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불교식 좌선을 하면, 불도의 영이 속에 찾아들기 때문이다. 그 영이 성령이 보내시는 선한 영인가? 아니면 뭐겠는가?  

그런데도 이동원 목사 부부는 바로 이런 단체의 '영성 지도'를 따라 '경건한' 휴가를 보낸 것이다. 이 목사는 이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보낸 시간의 정적이 태고의 고요 속에 영혼의 평안을 회복시켜 줬고, 주변의 모든 낯선 얼굴들이 넉넉한 우정의 샘물이 됐다고 미사여구를 동원해가며 한껏 관상 홍보(?)를 했다.
그후 카작스탄의 발빠른 일정에도 불구하고 전에 없던 변화의 하나로 전혀 피곤을 느끼지 않았는데 그것이 마음의 여유와 평온을 찾은 '관상의 은총'임을 깨달았단다. 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 '관상의 은총'이라.. 다원종교적/진리방임적 관상영성은 이런 '치유'도 갖다 준단다.
야웨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그 분의 말씀을 기뻐함이 우리의 힘이요 독수리 같은 스태미너의 회복의 길이라는 성경 교훈과는 대조적이다(시103:5, 네헤미야8:10).

그는 이어서 "꼴불견의 미성숙한 행동들이 관상을 상실한 현대의 모습"이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관상을 하지 않는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을 포함한 모든 현대인들이 꼴불견의 미성숙한 행동의 미학 아닌 '추학'에 빠져있다고 봐도 되겠는가?
관상가들은 죄다 지고지순의 고상한 성숙한 행동의 미학 속에 사는 사람들이고. 그 '성숙'이 이교를 적극 경계한 성경 진리엔 '깜깜절벽'임을 모른다는 얘기가 아니려나. 입술에 침도 바를 새 없이 '영성'을 부추기는 사람들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다고 보는 게 더 옳지 않을까?

그런 단체의 영적 '지도'를 받는 이목사 부부에게 모종의 영적 분별이 있었다고 보는가? 샬렘 인스티튜트의 프로그램에 따르면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미 그들의 종교다원적 영성에 동화됐다고밖엔.. 이동원은 '샬렘 인스티튜트'의 이런 마구잡이 식 잡교영성을 참 기독교영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니라면 "뭐, 그럴 수도 있지" 식 진리방임주의자가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국교회 '최고'의 설교가라니 한국교계의 분별력 또한 알 만하다. 미처 몰랐다고? 오히려..알아보는 데 게으르거나 별로 그러잖고파서 일 것이다. 그러니 이 목사 부부의 이런 막무가내식 '기독교영성'은 지구촌교회 교인들을 비롯한 주변 추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되고 있을 터이다.

샬렘 인스티튜트의 2006년 11월 14일 '래트너 뮤지엄에서의 다종교 침묵의 날' 프로그램 소개문을 한 번 살펴 보자. 우선 '히네이니..마카리쉬 라다하트'(나, 여기 있다. 고요히 반추하며..)라는 힌두교 발문을 서두에 달았다. 뮤지엄 세팅에서의 관상 실험인 이 프로그램에서 이들은 다양한 미술작품이 걸린 회랑을 거닐며 다함께 평화/샬롬과 온전함(wholeness)을 추구하면서 '거룩한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여로에 참여했단다.
그들이 생각하는 '거룩한 분'은 종교를 초월하는 상상의 신에 불과하다.

       이동원의 등식 [카톨릭 영성=기독교 영성]

이동원이 카톨릭에 별 거부감이 없다는 사실은 신교 목사로서 수도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그 자신이 밝혀 준다. 이동원 등 신교 관상가들이 상투적으로 내세우는 말은 관상영성이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라는 것. 그러나 이들이 뒤로 호박씨 까듯 은근히 숨기려는 것 한 가지는 관상이 좀 더 정확하게..카톨릭에서 유래한 전통이란 점이다.
성경에서 비롯되지 않았어도 카톨릭에서 온 것은 모두 기독교 전통인가? 이 말은 이동원 등이 카톨릭을 신교와 다름 없는 기독교로 본다는 관점을 드러낸다.

이동원 등 관상가들이 이런 식으로 카톨릭 전통을 전체 기독교전통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중세 카톨릭 신비가들인 노르위치의 줄리안,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20세기 관상의 선구자 토머스 머튼 등을 신교인들과 하등 차이없는 기독교인으로 아무런 경계심없이 받아들인다는 말과도 같다.  

더구나 머튼은 강준민/이동원의 멘토랄 수 있는 리처드 포스터(레노바레 대표)가 극찬해온 20세기 '기독교 영성의 대가'임에랴. 현대 신교의 영성을 홀딱 뒤집어 놓았다는 평판을 듣는 포스터는 결코 참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다원주의자임을 알아야 한다.

포스터의 모든 책엔 반드시 머튼 어록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머튼이 어떤 사람이던가? 도교/불교/힌두교 등에서 적극 합일점을 찾으려던, 실상 기독교 복음과 진리에 무지한 사람이었다. [아래 필자의 딴 글 제목들 참조.]

그렇다면 신교 관상가들에겐 항차 '성모님(마리아) 흠숭'도 별 부담없이 '기독교전통'으로 작용할 잠재적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왜 그러냐고? 똑 같은 영성, 똑 같은 영(spirit)이기 때문이다. 같은 영..이것이 문제다. 일단 카톨릭 영성을 받아들이고 나면 카톨릭 종교의 영(the spirit of religion)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동원 등 관상가들에겐 영적 분별이 없거나 극히 제한돼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신교와 구교의 차이를 구분하는 영적 분별이 이미 기본적으로 소멸(?)됐기에 그렇다.

이동원은 설교에서나 신앙생활의 모든 면에서 신/구교 간 차별/구분 의식의 부담을 주는 담론은 적극 피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다"란 의식부터 작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카톨릭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카톨릭 수도원도 자유롭게 출입하는 그에겐 카톨릭의 터전도 '나의 장'이지 '남의 장'이 아닐 것이다.

그 다음..샬렘 인스티튜트는 2006년 10월 25일 '신비가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성스러운 행동주의의 소명 키우기'(Praying with the Mystics: Deepening the Call to Sacred Activism)를 가을철 4주 시리즈로 시작했다. 버지니아 세인트피터성공회에서 실시한 이 프로그램은 위대한 '신비가'들의 삶과 저술에 대한 간단한 음미, 침묵과 기도, 소그룹 등으로 진행됐다.  시리즈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20세기 트래피스트 수사 토머스 머튼과 함께 기도하기'
     13세기 새 수도원 창설자, '아씨시의 프란시스'와 함께 기도하기
     16세기 카르멜수도회 개혁가 '아빌라의 테레사와 함께 기도하기
     14세기 은둔자, 노르위치의 줄리안과 함께 기도하기

독자는 어떻게 생각되는가? 고인과 함께 기도한다..좀 으시시 하지 않나? 필자는 제목을 읽는 기분부터가 썩 안 좋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꼭 부활해야 할 인물 외에는 ] 고인과 아무 상관 말라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회/정교회/카톨릭의 성모/성인 숭상/교제/기도는 성경이 엄금한 금기사항인 '고인과의 친교'와 다름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해둔다.  

이처럼 영적 분별이 결핍된 곳이 관상의 현장이다.  

관상은 하나님의 뜻을 명명백백히 드러낸 성경 말씀에 대한 복종의 형태가 아니라 성경을 카톨릭 영성에 우격다짐 격으로 끌어들인 성경 악용의 형태다.

성령께서는 지금 독자에게 묻고 계시다.

    "너는 언제까지 다원종교적 관상과 성경적인 기도,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이렇게까지 경고해도 관상을 해보고 싶은 독자는 구태여 위험(risk)을 감수하고라도 하려는 모험정신이 투철한지는 모르되, 건느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그럴 리 없다고?.. suit yourself.

관상기도의 실상에 관하여 필자의 다음 비평문들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구글탐색: '김삼 목사의 아멘넷 데스크']

     #111 관상기도를 즐기는 님들에게
     #  62 헨리 나우웬과 뉴에이지 영성
출처 : http://www.usaamen.net/bbs/zboard.php?id=ssq16&no=67
출처 : 크리스챤 상담실
글쓴이 : 요나짱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