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1-2장) 하나님의 사람 모세
(출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모세의 일생을 생각해 보건데,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 이룬 120년의 애증의 생애를 간단한 몇 마디로 글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겠지만, 성경에서 모세만큼 칭송을 받는 사람 또한 없다. 바울은 모세의 택하심을 말하여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증거하였다.
또한 히브리기자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증거하였다.
(출애굽기 1장) “애굽의 노예 된 이스라엘 ”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인이었더라”(출1:5)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처한 장소를 따라 셋으로 구분되고 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애굽의 종살이로서의 신민, 13장부터 18장까지는 시내 광야에 이르기까지의 여행 생활 그리고 19장부터 40장까지는 시내광야에서의 장막생활로 전개된다. 그러나 출애굽기에서 가장 우리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내용은 출애굽을 위한 유월절 제정이다. 이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따라서 출애굽기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탈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1장은 “Now”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이는 “그리고”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사실 출애굽기는 창세기의 다음에 이어진 책으로 모세가 정리하여 기록한 처음 성경 다섯권 중의 두번째이다. 흥미롭게도 모세는 출애굽을 시작하면서 창세기 마지막 부분을 다시 언급하여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혈족 70인을 소개하였다.
수리적으로 볼 때 야곱의 자손들이 70인이냐 75인이냐 의견이 분분하지만 모세가 이처럼 70이라는 숫자를 개념화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부각한 것이라 하겠다. 그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에 있어 7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거룩한 백성의 개념이 되었다.
이 때는 요셉이 죽은지 300년이 지난 때로서 요셉의 위대한 통치를 알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애굽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통치하였다. 요셉이 통치하던 때의 힉소스 왕조는 내분으로 인해 북왕국과 북왕국으로 붕괴 되었고 그후 애굽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조가 일어났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노예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애굽의 노예된 이스라엘 민족의 생육과 번성에 있었다.
이처럼 애굽왕의 포악한 이스라엘 말살정책에도 이스라엘 민족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그의 택하신 백성에게 있기 때문이다. 70명의 적은 수로 애굽에 들어 간 이스라엘 민족은 4대만에 20세 이상의 남자만 60만의 거대한 민족이 되어 출애굽하게 된다. 이는 출산율 5%만 잡더라도 400만이 되는 숫자이다.
야곱이 브엘세바에 이르러 애굽에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애굽에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 하시며 너희로 큰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야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도 하신 약속으로서 이제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새 왕조가 일어나 국고성인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케 하며 학대를 하였으나 학대를 할수록 이스라엘 민족은 더욱 번성하여 국가적 고민이 되었다. 결국 두려워진 애굽왕은 극처방을 써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히브리 여인을 조산할 때에 남자 아이는 죽이고 여자 아이는 살리라 명하였으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남자 아이들을 살리고, 바로에게는 히브리 여인들은 애굽의 여인들과 달라 자신들이 조산을 하러 가지 전에 이미 출산을 하므로 손을 쓸 수 없다고 변명하였다.
성경은 이 또한 하나님께서 산파들에게 은혜를 내리신 것이라 증거하였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로 생육하고 번성하자 이에 분노한 애굽 왕은 애굽 백성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여인이 남자 아이들을 날거든 하수에 버리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신 계획은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서서히 이루어 지고 있었다.
(출애굽2장) “모세의 출생과 성장”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 2:24,25)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그를 지으신 창조자의 뜻대로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말 축복 중의 축복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며, 그리스도의 시대에 있어서는 이러한 축복을 받지 못할 사람이 정해진 것 또한 아니다. 오직 주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 있을 때 그 사람의 인생은 그의 손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히브리 기자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히3:8) 권고하였다.
I. 애굽의 왕자 40년(1-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출 2:10)
모세란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모세는 갈대상자에 넣어 하수에 던져졌고 나일강에서 목욕을 하던 바로 왕의 무남독녀에게 발견되어 애굽의 공주의 양자가 되어 “모세” 라는 이름으로 자라게 되었다.
모세의 부모는 모두 레위족으로 그 어머니는 요게벳이다. 모세가 잉태되어 출산하니 그 부모가 아들의 준수함을 보고 석달을 숨겨 키웠으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갈대상자에 역청과 찰흙을 발라 아이를 넣어 창포 숲 사이의 강으로 떠내 보냈다. 그의 부모들은 그 생명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이를 담은 갈대상자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기 위해 그 누이 미리암이 뒤를 따라 갔더니 상자가 바로의 딸이 시녀들과 목욕하는 곳에 이르자 그녀가 상자를 발견하고 시녀에게 가져 오게 하고 상자를 열자 아이가 우는지라 ‘이 아이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중에 하나로다’하고 말할 때에 누이 미리암이 그녀에게 가서 내가 아이에게 젖먹일 히브리 유모를 당신에게 불러 오리이까 말하니 그녀가 허락하여 그의 어미를 데려와 젖을 먹이게 하였다. 참으로 우연치고는 필적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인가 처음부터 각본에 짜여진 것과 같은 느낌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가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하게 일하신다.
모세는 결국 애굽의 왕자로서 자기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어려서부터 긍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친 어미의 각별한 사랑과 또한 애굽의 왕자로서의 국가경영에 필요한 모든 학문과 지식을 터득하였다. 사실상 모세는 애굽의 후계자의 1순위에 있었다.
II. 미디안 목동 40년 (11-25)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출 2:11)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또 친어머니이자 유모인 레워지파의 요게벳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 모세는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왕재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더욱이 유모가 된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유래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하여 충분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모세가 사십이 되어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 그 고역함을 보던 중 애굽 사람이 히브리인 하나를 심하게 채칙질 하는 것을 보고 격분한 나머지 좌우의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 속에 감추었다. 이는 그가 누구라할지라도 생명의 주권에 도전한 범죄다. 그러함에도 모세는 자신의 행위를 누가 볼까 보아 좌우를 살폈지만 정작 자신의 태어남으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모세가 자기 형제를 보러 나갔다는 말씀으로 보아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미리 보내신 자로 알았을 것이다. 이미 그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으며 그 마음 가운데 늘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형제들을 돌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신 자로서 아직 능력을 얻지 못하였고 자신의 삶 속에서 터득한 세상의 지혜와 권세로서 주께서 부르신 역사적 소명을 실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것을 알고 또 그 부르심에 대한 성경적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의 성정은 사람을 죽일 정도로 과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는 자기의 힘만을 믿고 스스로 그 일을 실행하고자 하여 하나님께서 금하신 살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함에도 그는 자신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는 의기양양하여 이튿날 다시 나가 있는 중 히브리 사람 동족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그에게 네가 어찌 동포를 치느냐고 책망하자 그가 말하여 ‘누가 너를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내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 하느냐?’고 소리치므로 모세가 자신의 행위가 탄로난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 사실이 바로에게 보고되자 바로가 모세를 죽이고자 찾게 되니 모세는 바로의 얼굴을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쳤다.
마침 모세가 미디안 땅에 이르자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아버지의 양무리에게 물을 먹이고자 우물에 왔더니 다른 목자들이 훼방하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목자들을 쫓아 내고 그녀들을 도와 양무리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
딸들이 집으로 돌아오니 이른 시각에 돌아 온 딸들을 기이히 여긴 제사장 르으엘이 너희가 어찌 이렇게 일찍 돌아 왔느냐 묻자 딸들은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의 손에서 구하고 우리를 위해 물을 길어 양들에게 물을 먹이므로 일찍 돌아 왔다고 보고 하였다. 이에 그 아비가 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하고 모세를 청하여 집에 들였다.
이드로는 모세가 그들과 함께 동거하기를 기뻐하므로 모세에게 딸 십보라를 아내로 주었다. 이로서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의 데릴 사위가 되어 아들 게르솜을 낳았다. 게르솜은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 는 뜻이다. 이로부터 모세는 이방의 객이 되어 목자로서의 인생 40이 시작된다.
미디안의 제사장의 사위가 된 모세에게 있어 40년간 갈고 닦은 애굽의 왕자로서의 교육과 훈련은 무의미하다. 목동에게 있어 애굽의 왕자로서 누렸던 화려한 생활과 풍습과 그리고 언어와 학문과 애굽의 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무익하다. 그에게는 스스로 거역할 수 없는 표류 된 이방의 객으로서 하루하루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서 그에게 맡겨진 양들을 치는 생활이 있을 뿐이다.
미디안 땅에서의 40년간의 모세의 인생은 먹고 마시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양들과 다를 바 없다. 그에게는 모든 소망이 단절된 상태이며, 돌아 갈 곳도 없고, 믿고 살아야 할 소망도 없는 인생이 되고만 것이다. 인생에 있어 이러한 때는 살아 있는 지옥이다. 모세의 인생은 마치 불에 타버릴 가시덤불과도 같이 된 것이다. 애굽의 종살이 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세에게 왜 이러한 삭막한 생활이 필요했을까 이 또한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때는 다가오고 있었다. 성경기자는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출2:23-25)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 모세를 이렇게 예비하셨던 것이다.(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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