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3-4장) 모세의 소명
(출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오늘날 자기발견이라는 말들이 이슈가 되고 있다. 자기 발견이란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자기의 능력을 극대화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존재 가치를 과시하기 위한 심리학적 용어이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인간의 이러한 노력은 끊임없이 확대되고 재발견해 왔지만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가치는 함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이 땅이 있음으로부터 무한경쟁에 도전한 무수한 영웅호걸의 무덤에서 발견되다.
그러므로 인생 중에 누가 자기를 발견하려 한다면 자신의 능력과 지혜 가운데서 자기 존재 가치를 구할 것이 아니라 힘없이 무너진 자기 인생의 잿더미 속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발견하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의 부르심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의 허락하신 능력 안에서 자기 가치를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실패 없는 인생을 사는 비결이며 자기에게 순종한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상급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 오늘 우리는 모세의 부르심 속에서 우리의 소명을 다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출애굽 3장) “불에 타지 않는 가시덤불”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3:2)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의 나이 80살이 되었을 때이다. 레위지파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모세는 애굽의 히브리인 정책에 의해 내어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의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되어 애굽의 왕자로 성장했다. 그는 애굽의 통치자가 되기 위해 최고의 학문과 정치 군사 외교 경제 분야에 걸친 광범위한 왕재(王才)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바로의 무남독녀의 양자로서 후계 제1 순위 구도에 서 있었다.
그러나 모세가 40이 되었을 때에 자기 백성을 돌보려 하다가 살인자가 되어 애굽에서 도망하여, 미디안 광야의 목동이 된지 이미 40년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서 고립무원 (孤立無援) 신세로 전락하여 이방의 객이 된 것이다. 그러나 80살의 목동 모세는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주의 부르심을 받아 40년간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후회할 것이 없는 아름다운 인생을 마치게 된다. 실로 모세의 인생은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재신 120년의 생애였다.
Ⅰ. 불꽃 가운데로 이끄심
(출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택하신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고 또 기이하다. 어떤 사람은 이상 중에 주의 말씀이 임하였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꿈 속에서 주를 보았으며, 어떤 제자는 고기를 잡던 중 잡혔으며 또 누구는 그물을 고치는 중에 부름을 받았으며, 또 어떤 죄인은 나무 위에 올랐을 때 주의 부름을 받았으며, 또 제자는 세상으로 돌아서는 길에 나타나셨으며, 또 어떤 이는 주를 향해 뒷발질 하다가 주께 붙잡혔다. 이 무수한 증인들이 아직도 우리 가운데 살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자기를 부르신 이의 은혜의 구원을 칭송하고 있다.
40년간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치기가 되어 80살이 된 모세를 하나님은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부르셨다. 모세가 양무리를 이끌고 광야 서편의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을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난 것이다. 이제 그 무엇을 바라 볼 소망도 없고, 그 어떤 삶에 의욕도 상실하여 남은 생애에 의미까지 상실한 모세의 시선을 집중시킬만한 기이한 큰 광경이 나타난 것이다. 불에 붙은 가시덤불이 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모세라도 불에 타지 않는 가시덤불은 돌이킬 수 없는 큰 광경이었다. 모세가 그 광경을 보려 옆으로 비켜설 때에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에 모세가 “내가 여기 있습니다” 답하였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불꽃에 타지 않는 가시덤불도 기이하지만 모세를 이러한 방법으로 부르신 것이 더 기이하다.
40년간 누리던 왕자로서의 화려한 인생은 한 순간에 불타버리고 소생할 수 없는 가시덤불 같은 이방인의 양치기가 된 모세에게 불에 타지 않는 가시덤불은 정말 큰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찌든 인생에 갈급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무미 건조해 버린 삶의 의욕을 불러 일으키기에 족하다. 이에 모세는 그 큰 광경을 조사하기로 결심하고 가시덤불 옆으로 다가 갔다.
Ⅱ. 말씀 앞에 선 모세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5)
주의 부르심에 응답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 하셨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계속하여 하나님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6) 하셨다. 이 얼마나 두렵고 감격스런 말씀인가? 사고무친의 이방 땅에서, 생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 땅은 40여년 동안 아무 거리낌도 없이 지나던 곳이라도, 선전수전을 겪은 여든의 나이가 된 모세라도 주의 임재를 목격한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출 3:7,8) 하셨다.
주께서 그의 백성들의 고통을 아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이며, 주께서 그의 자녀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모든 것을 상실한 80의 인생 끝자락에 선 모세에게 있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은 막힌 숨통을 여시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모세는 그동안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과 오해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찌하여 주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을 고통과 부르짖음과 우고를 알지 못하시는가? 과연 믿음의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은 모두 역사 속의 신화인 것인가?
우리 또한 인생의 고난 중에서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한다. 나는 예수를 믿은 후 주의 풍성하신 복을 누리며 그 복이 내 생애에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주의 은혜 중에 득죄하여 일본으로 내어 쫓겨나 사고무친의 인생을 살 때에 나는 주의 손이 영원히 나를 떠났으며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고통의 날의 슬픔에 대하여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시 102:9-11) 고백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땅끝에 선 모세 앞에 나타난 하나님은 ‘나는 애굽에 있는 나의 백성의 고통을 확실히 보았다. 내 백성들은 오랜 세월동안 애굽인들에게 괴롬과 박대 당하고 있다. 그들은 노예와 같고, 가축과 같이 부림을 당하며, 갖은 학대와 굴복 당하고 있다. 내가 이것을 보고 있고 알고 있으며, 또 나의 백성들이 구원을 갈망하며 나에게 부르짖음을 내가 듣고 있다’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압박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입술을 닫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손을 거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그 시간이 길어 전혀 응답을 받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 이를지라도 우리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말씀과 함께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구원의 계획에 대하여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10) 하셨다. 이 말씀은 이제 나의 구원의 때가 되었다 말씀하신 것이다.
III. 능력이 없음 (3:11)
(출 3: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졸지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세는 선듯 나서지 못하였다. 이는 과거 애굽 왕자의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이다. 그때는 부르심이 없었어도 스스로 그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 생각했었다. 일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주어졌고 의기와 패기도 만만했었다. 결국 젊은 모세는 자기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충분한 계획도 없이 충동적인 행동에 빠져버린다.
이는 오늘날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신학생들이 졸업하자 마자 대뜸 목사 안수부터 받고 아무런 준비나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교회부터 세우기 일수다. 오늘날은 매년 수백명의 목사들이 교회 문을 닫고 방황을 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나를 부르셨다고 확신했던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시다.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들이다.
졸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 3:11) 반문하였다. 이 말은 나는 그런 일을 할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이 이처럼 하나님의 면전에서 반대 의사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사실 요나 선지자가 그러했고, 사도 베드로가 그러했었다.
흥미롭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고자 할 때 세상 가운데서 가장 능력 있는 자들을 찾아내어 그들 중에서 골라 쓰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고 유명신학대학교에 들어가려고 애를 쓴다. 오늘날은 학위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사44:2) 하였고 다윗도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71:6) 고백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대하여 왈가불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성경은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기록하였다.
모세의 반응에 하나님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2)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제는 네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통해 일을 하겠다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후일 확실하게 증명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보장은 없다. 이 세상에 누가 하나님을 능가할 자는 없기 때문이다.
IV. 메시지가 없음 (3:13)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13)
그러나 하나님의 설득에도 모세는 전혀 감동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모세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3) 하고 거듭 사양을 하였다.
그 무엇이 용기 충천하던 모세를 이처럼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을까? 그러나 아무런 소망도, 무엇을 위해 살아갈 의욕 조차 상실한 이방 땅에서의 양치기의 삶 40년은 인생의 꿈은 고사하고 삶의 기력조차 상실케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40년 동안 찬란하게 꿈꾸어 오던 왕자로서의 야망과 통치자의 꿈은 물론 하나님의 택하신 유일민족으로서의 우월감과 자부심 모두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이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명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나설 명분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없습니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에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말하여 “나는 스스로 있는자니라”하시며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말씀하셨다.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는 것은 자기와의 관계를 설정한 것이며 그가 누구인지를 알므로 그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 말하여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 창조된 분이 아닌 처음부터 태초이신 창조자 되심을 알리신 것이다.
V. 메시야 계시(3:15)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 3:15)
하나님은 계속하여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 3:15) 말씀하셨다. 이는 여호와에 대한 계시를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스스로 계신 자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씀하시며 그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으며 장차 오실 자 곧 메시야를 계시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주 여호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 우리의 구원자로서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고 또 장차 오실 자이신 것이다. 그가 우리를 죄 중에서 구속하셨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영생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출 3:16) 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들 조상들과 함께 하셨으며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 대한 영원한 약속을 하셨다. 그러므로 이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또 권고하셨는 것은 커다란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계속하여 하나님은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출 3:17)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으며 또 입에 담고 있으며 그날을 향한 광활한 이상을 펼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모세가 바로 왕 앞에 할 말을 주어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출 3:18)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바로가 할 모든 말과 행할 모든 일들을 세밀하게 가르쳐 주셨다. 이제 모세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은 바로가 그의 전한 말을 듣지 않을 것을 말하여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출 3:19,20)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우리가 행할 그 모든 일들을 명하신다.
어떻게 생각하면 모세를 비롯하여 구약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에 비하여 좋은 상황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에게 그들이 행할 모든 말씀과 장래 있을 일들을 모두 알려 주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이미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말씀들을 성경에 모두 담아 주시지 않았는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 또 주께서 오실 날을 정해 놓으시고 그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행하여야 할 믿음생활의 모든 일정과 계획과,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행할 일 또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행하여야 할 일들을 기록하시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은 430년간 종살이하며 박대받은 그들의 삶의 보상까지 베풀어 놓으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출 3:21,22) 하셨다.
이들은 그들이 앞으로의 삶에 필요한 그 모든 것을, 또 그들이 갖고 싶어하고 누리고 싶었던 것을 취하여 나오도록 계획하셨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 말씀을 믿고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는 종말을 사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하신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 갈 때 이미 주께서 예비하신 그 모든 축복들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출애굽 4장) 모세의 순종
(출 4:20)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I. 권위의 문제(4:1)
(출 4:1)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하나님의 줄기찬 설득에도 모세는 계속 사양을 하며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출 4:1) 라고 핑개를 댄다. 이는 거절이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자신감이 있으면 실패를 무릅쓰고 나서게 된다. 그러나 커다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좀처럼 나서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에게도 볼 수 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자라도 오직 기도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끌어 내어 아합의 처 이세벨의 선지자 450명과 싸워 이기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한 선지자이다(열상17-19장 참조).
그러나 “내일 정오에 네가 죽은 자들과 같이 네 생명을 빼앗을 것이라”는 이세벨의 말을 전해 들은 후에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하나님 앞에 죽기를 간청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자를 보내고 또 친히 나타나 용기를 북돋았으나 그는 결국 뒤로 물러서 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로 하여 그의 임무는 엘리사가 이어받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엘리야의 콤플렉스라고 말한다. 이처럼 아무리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던 사람이라도 삶의 의욕을 상실한 자는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다.
두려움과 염려는 하나님의 사역에 나서는 것을 가로막는 커다란 걸림돌 중 하나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의욕의 상실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이는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종들에게 나타나 실패의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한다.
이에 하나님은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다. 모세는 양치기인고로 지팡이를 갖고 있었다. 사실 양치기는 목자에게는 지팡이 하나가 유일한 도구이다. 그 어떤 것도 필요없다. 지팡이로 양들을 몰며 짐승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한다. 또 피곤할 때에는 몸을 의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지팡이는 삶의 필수 도구였다.
여호와는 그에게 “그것을 땅에 던지라” 명하셨다.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자 그것이 뱀이 되는지라 모세가 놀라 뱀 앞에서 피하매 주께서 네 손을 내밀어 꼬리를 잡으라 하였다. 모세가 손을 내밀어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지도자에게 지팡이는 다스리는 권위를 뜻한다. 야곱은 그 아들 유다를 향하여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예언하였다.
후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 족장에게 지팡이를 들게 하였는데 모든 지파 중에서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리게 하셨다이는 레위지파에게 하나님의 주권이 레위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민17:8).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4) 노래하였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애굽의 능력에 의지하려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여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왕하18:21) 책망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니 그가 손을 가슴에 넣자 문둥병이 발하였다. 이에 다시 네 손을 가슴에 넣으라 하시니 손이 여전하여 졌다. 성경에서 문둥병은 원죄와 같이 여겨진다. 다시 말하여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저주인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백성들이 첫번째 표징을 받지 않을지라도 두번째 표징을 믿으리라 하셨다.
그 백성이 지팡이의 표징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그들은 430년 동안 애굽을 통치를 받은 민족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표징은 성경 역사속의 일이다. 그러나 애굽의 통치는 실제적이며 그들의 신들을 실제로 삶을 주관한다. 그러므로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다 해도 그런 일을 이방의 술사들도 함으로 그들에게 그리 큰 표징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둥병에 대한 것은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인간이 고칠 수 없는 병이다. 그 병이 어디서 오는지 조차 모르고 그들은 문둥병을 저주로 여긴다. 그러므로 문둥병을 온전케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모세에게 주신 표징은 매우 흥미롭다. 하나님은 하수의 물을 취하여 땅에 부으라 그리하면 네가 하수에서 취한 물이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 하셨다(9). 이는 해석하기 난해한 구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들은 후일 계시록에서도 언급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물과 피는 하나님의 생명임을 알게 된다.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물과 피로 임하셨다 증거하였다(요일5:6). 따라서 주께서 귀히 여기는 인간의 생명이다. 따라서 오늘 여호와께서 보이신 세가지 표징은 모두 메시야에게 속한 표징으로 통치와 죄의 구속과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주께 있음을 상징한 것이다.
II. 말재주가 없음 (4:10)
모세는 주 여호와의 이러한 권고에도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나이다”(10) 사양을 한다. 참으로 완고하기 그지 없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기 싫다는 사람을 왜 계속 설득하시는지 이해가 않된다. 차라리 이스라엘 민족 중 말 잘하고 용맹있는 자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말이다.
모세의 말에도 여호와는 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11) 하셨다. 이는 그 인간에 속한 그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계속하여 여호와는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2) 하셨다. 참으로 인자하신 분이 아니신가? 모세는 이제 더 이상 핑계할 말이 없게 되었다.
III. 의욕의 상실 (4:13)
(출 4:13)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설득에도 여전히 모세는 순종하지 못하고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13) 하였다.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까 할 정도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이것으로 보아 정말 모세는 더 이상 그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남은 인생을 양이나 치면서 조용히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사람이 의욕을 상실하면 그 어떤 일에도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한 때 노숙자들을 섬기는 교회에 봉사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돌보는 목사에게 이들에게 밥이나 옷가지를 주는 것보다 일자리를 구해 주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내게 이들은 일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세끼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중에는 집이 있어도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일하기 싫어서이지요. 다시 말해 그들은 인생의 실패 후 누구를 책임진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실패는 사람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모세의 이 말에 주께서 크게 노를 발하여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의 말 잘아는 것을 내가 안다. 그가 너를 만나러 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이 기뻐할 것이라 (14) 하셨다. 형제란 참으로 좋은 관계이다. 싸웠다가도 다시 마음을 풀어 하나가 되는 관계다. 어떤 이해관계라도 서로 마음을 하나가 될 수 있는 관계이다. 근래에 와서는 형제 간에도 재물로 인해 싸우고 소송하며 죽이기도 하지만 피를 나눈 형제는 정말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 가장 좋은 관계이다. 이는 피를 나눈 형제이므로 서로의 마음을 알고 서로를 믿고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내 형제와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 그 때도 작은 재물 때문이었다. 한 쪽이 넉넉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어느 한 쪽이 재물에 욕심을 갖게 되면 곧 싸움이 된다. 그러나 내가 곤고해졌을 때 나를 돌아 보는 사람은 역시 형제 뿐이었다. 지금 우리 형제는 오직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할 자가 형제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형제라 하였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
IV. 모세의 출발(18-26)
(출 4: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그러나 긍휼과 인내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리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 너희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말할 것이요 그는 네 입을 대신 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15-17) 명하셨다.
모세는 젊어서 자기 백성들에게서 거절을 당한 일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이용하여 기독교 심리학자들은 내적치유와 같은 심리학의 원리로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게 하고 심리학자처럼 그들을 용서하라 말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말을 할 수 있는 믿음과 재능을 가진 동역자를 허락하시고 그에게 능력에 능력을 더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누구에게 그 어떤 상처를 받았다 해도 그것이 자신의 길을 막는 커다란 장애의 기억이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막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나아가라고 명하셨다. 이는 그에게 통치의 권세를 주신 것이고 그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하신 것이다.
V. 하나님의 예비하심(27-31)
(출 4: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은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 가서 자기 형제들의 생존을 알아보기 위해 돌아 갈 것을 말하고 그의 평안의 기원 속에 그의 처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향하였다.
하나님은 애굽을 향하는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출 4:21-23)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애굽에서 있을 일들을 모세에게 말씀하심을 그 모든 것을 예측하고 준비하게 하셨다. 우리가 앞에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고 행한다는 것은 답을 알고 문제를 푸는 것과도 같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예언이고 예언에 대한 답변인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당장 하나님 앞에서 풀지 않으면 안 될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더욱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의 종으로서 먼저 주께서 행하신 말씀에 온전한 순종을 해야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난 과거에 조상에게 하신 말씀이라도 여호와 주는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까지라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므로 모세는 이유가 어찌되었던 하나님 말씀을 이루어야만 했다.
그것은 세상에서 장자된 이스라엘 민족의 표징 할례였다. 이 언약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으로 이스라엘에서 난 사내아이들은 난지 8일만에 하나님 앞에서 할례를 하고 또 종이라도 이스라엘 중에 살고자 한다면 그 누구라도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다.
그렇다고 할 때 하나님의 장자 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인도하여야 모세가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이는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로므로 여호와께서 노중의 숙소에서 나타나 모세를 죽이려 한 것이다. 이에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아들의 할례를 하여 모세의 발 앞에 던지므로 주께서 모세를 놓으셨다. 십보라는 모세를 가리켜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였다. 아마 미디안 여인인 십보라가 그 아들들의 할례를 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모세는 이방인에서의 생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론: 여러분은 어떠한가?
(출 4:28)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부탁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고하니라
주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은 어떠한가? 주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당신은 곧바로 순종하고 있는가? 너무 바빠서 성경공부는 고사하고 예배시간조차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나마 수요 예배에는 못 나가고 주일예배만 간신히 섬기지는 않는가? 아들의 학원비 때문에 십일조 생활을 온전히 못하는 것은 아닌가? 교회에 봉사할 시간은 없어도 골프장에 나갈 시간만큼은 기뻐하고 있지는 않는가?
어쩌면 당신은 달란트가 없다고 말하며 요리저리 피해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신이 살아 온 세상에서의 모든 능력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당신이 잘나서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지진이 일어나고 또 가족 중에 큰 병이 나면 당신의 능력이나 또 세상은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가?
어쩌면 나는 말재주가 없어서 전도를 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는 않는가? 그러면 당신은 세상을 살아 갈 때 무엇으로 말하고 있는가? 당신의 출세와 당신의 가족을 위해서 당신은 마치 변호사와 같지 않는가? 그러나 복음을 전도를 하는데는 당신의 말재주 같은 것은 필요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필요하다. 이미 성경은 당신이 할 말들을 다 기록해 놓았고 이미 하나님은 말 잘하는 당신의 형제를 당신 앞에 세워 놓으셨다. 그러니 당신은 더 이상 핑계할 것이 없다.
문제는 당신이 하나님 앞에 의욕을 상실한 것이다. 의욕을 상실한 자는 하나님도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그러니 이제 당신은 하나님 앞에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주의 말씀을 따를 것이다. 그리하면 주의 권세와 능력이 당신을 일으켜 세우고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실 것이다. 아멘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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