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흔적들

서른 일곱 해의 사모곡

이요나 2012. 10. 10. 10:32

어느 칼럼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쏟아낸 아들의 하얀 눈물을 보았다. 그는 자기의 슬품의 고통을 말하여 뼛속까지 스며든 눈물이라고 표현하였다.

 

음력 팔월 스무엿새, 추석을 지내고 열흘이 넘은 정오 무렵이었다. 목욕탕을 다녀 온 어머니께서 정갈한 한복을 입으시고 아들이 거처한 이층방으로 올라 오셨다. 그때 나는 인생의 진리를 찾지 못한 허망한 인생이 되어 승려로 출가할 마음에 내 방안에 작은 불상을 모셔 놓았을 때였다.

 

평소 불심이 강한 선배가 먼길을 떠나며 자기가 모시던 불상을 내 앞에 내려 놓으며 부처에게서 진리를 찾으라는 말을 남겼다. 지금 생각하니 젊은날을 다 버쳐 부처를 섬기면서도 진리를 찾지 못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한 돌중이 감히 진리를 운운하며 내게 부처를 내려 놓았단 말인가?

 

인생이 아무리 발버둥처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거늘 하물며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를 스스로 터득하려 하였으니 이처럼 우매한 생물로 없으리라. 그럼에도 나는 내 마음 한 구석에 진리를 향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 그 자체에 감사의 무게를 두고 싶다. 그것이 없었다면 내가 진리를 찾고자 하는 생각도 터득하고자 하는 욕망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없이 아들의 방으로 들어 오신 어머니께서는 나즈막한 작은 불상에 촛불을 켜시고 정한수를 올리신후 촛불이 끊어질 적막함을  이고 부처를 향하여 합장하여 절을 하시고 또 절을 올리셨다. 어느 산사에서도 보지 못한 경건함이 방안에 엄습하였다.

 

아무 말도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어머니의 봉헌을 지켜 보는 아들의 가슴에서는 하얀 눈물이 이슬처럼 맺히기 시작하였다. 늙은 허리를 내리고 내려 한 줌의 작은 몸으로 마루바닥에 엎드린채 마음을 토하는 어미의 얇은 어깨가 소리없이 흔들릴 때마다 불효한 아들의 넋을 뼛속까지 흔들어 놓았다.

 

아직 서른도 되지 못한 청춘의 나이에 어미의 마지막 혼심을 토하는 묵묵한 절규를 대하는 아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으랴. 백발의 나이에 다시 이 상황을 대한다 해도 아들의 혼백은 하얗게 굳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어미의 모숩이다. 어미는 그날로 아들을 하늘에 맡기고 총총걸음으로 가로수 은행잎 사이로 떠나가셨다. 그리고 사흘을 누이와 함께 보내시고 그처럼 애뜻하게 아파하던 막내의 얼굴은 끝내 보지 못하신채 손주의 노트장에 유언을 남기셨다.

 

 '어미가 가는 것은 형을 살리기 위함이니 형을 원망하지 말거라 어떤 일이 있어도 형에게 순종하거라!'

 

 어미를 생각하면 바늘 구멍만한 숨구멍도 없는  인생이거늘 사망을 끊어낸 은혜로 말미암아 하늘을 보고 있다. 어미가 떠난지 삼십칠년~ 어미는 차마 아들의 나이만큼도 숨을 쉬지 못하고 먼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아들은 아직 남은 세월들을 총총히 살아가고 있다.

 

이제 내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나의 숨을 멈추랴. 애처러운 아들도 없고, 남겨둘 인정 또한 없으나 뼛속까지 스며든 내 어미의 눈물을 위해 나 또한 오늘의 어미들의 고통을 위해 바쳐야 할 것이 아닌가?

 

아서라! 오늘의 세상에서 누가 어미의 눈물을 기억할 것인가? 하늘의 진리가 왜곡되고 바다가 소용돌이치고 산들이 우는 이 세월 속에서 내 아들들의 영혼은 누가 위로해 줄 것인가? 한흠이도 길 떠났고, 용조도 죽었거늘 용기는 아직 살아서 무얼한다더냐?  (아들들은 거리에서 싸이와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어미들아! 너희는 아직도 신천지를 찾더냐 소망교회에 진리가 있다고 하더냐?  아들들아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싸이더냐, 아비들아 너희가 바라는 자들이 누구더냐? 박가더냐 문가더냐 안가더냐? 아서라 주께서 이미 내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노라. 이미 그날이 벌써 문 앞에 와 있구나1

주여 어서 오시옵서서! 아멘 아멘!(이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