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설교

(누가복음13:34) 예루살렘 애가

이요나 2013. 5. 22. 18:51

(누가복음13:34) 예루살렘 애가

 

( 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오늘 말씀에는 이스라엘 한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비롯한 구약 속의 모든 믿음의 조상과 선지자들과 예배와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맡은 백성으로서 더 없는 영광을 입은 민족이다. 더욱이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영광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 속의 혈통적 후손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시리라 언약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에 대하여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민족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신 주 하나님의 거룩한 자를 스스로 저 버리고 말았다. 주께서는 이 모든 사실에 대하여는 이미 알고 계신 터라 하나님의 미리 하신 말씀을 따라 자기의 길로 가셨지만 잘못된 종교적 관습에 빠져 구원의 주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소경 된 하나님 백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애통하심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실을 목도하는 우리에게 이 메시지는  의미가 있는가? 이 말씀은 과연 이스라엘 역사 속의 파묻힐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애가인가? 종말의 시대를 사는 구원의 믿음과 소망을 가진 우리에게 향하신 메시지는 아닌 것인가?            

 

I. 이스라엘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획(1-9)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 5)

 

A.   인생의 죽음과 죄

13장 서두에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되었다. 두어 사람이 주께 나아와 총독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 제물에 섞은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우리는 이 사건이 어떤 내용인지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눅가복음 23 12절의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는 서로 친구가 되니라는 말씀에서 갈릴리 분봉왕이든 헤롯과 로마 총독인 빌라도 간에 서로 반목된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당시 총독으로 부임한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심각한 급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수도 건설을 구상하고 그 공사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성전의 돈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성전의 재물을 로마 총독이 임의로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격분하였고 이로 인하여 결사항쟁의 민중 봉기가 일어 났는데 그 선봉에 성격이 과격한 갈릴리 사람들이 서 있었다.

 

아무리 로마의 집정관이라도 예루살렘 성전에 군사를 투입 할 수 없는 터라 빌라도는 민중으로 변장한 군사들을 투입하여 무리를 해산하려 하였지만 성난 군중들과 큰 마찰이 야기되어 급기야 군사들의 손에 살해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그들의 피가 제물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피가 하나님의 신성한 제물에 섞여진 것을 들어 이들에게 특별한 죄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주님은 너희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물으시며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 하셨다.

 

계속하여 주님은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히리라(4,5) 하셨다.

 

실로암 망대 사건 또한 언제의 사건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빌라도가 결국 수도공사를 실행하였다고 할 때 수로 공사 중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상자를 낼 수 있는 것은 다반사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죄인에 대한 교리이다. 욥기에는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기록하였고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6:22b-23a) 증거하였다.

 

B.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 나무

이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은 비유로서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어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수원지기에서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말하니 종이 대답하되 주인이여 금년에는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를 열면이서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8,9) 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의 상징적인 비유에 대한 성경적 해석을 필요로 한다. 잠언서 기자는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27:18) 기록하였고 그리스도의 날을 꿈꾸던 스가랴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3:10)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있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특별히 포도나무에 관하여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들이 기록되었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5:7)고 기록하였다. 또한 주님은 친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15:1) 하셨고 다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15:5) 하셨으니 주께서 무엇을 언급하신 것인 줄 우리는 익히 알 수 있다.

 

또한 무화과나무에 관하여는 주께서 저주하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말라 죽은 것을  우리가 알고 있고 그후 교회와 이스라엘의 장래를 말씀하시면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13:28) 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무화과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미 이스라엘은 1948년에 514일에 독립을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모두 열매를 맺기 위한 과실수 있다. 특히 포도나무의 목적은 열매를 맺는 것 외에는 관상수로서 땔감으로도 아무 가치가 없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15:5) 하셨으므로 주의 몸 된 교회의 구성체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언급하셨다. 

 

그러면 여기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두고 금년에도 그냥 두소서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미 주님은 무화과나무 된 이스라엘을 축복하기 위해 3년을 참으시며 권고하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소경된 이스라엘은 그 한계를 벗어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하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얻는 데 있다. 그러므로 두루 파고 거름을 줘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를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3년의 충분한 기회를 상실한 이스라엘은 오직 마지막 단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을 뿐 주여 용서하소서 주께서 이기시리로다. 주는 영존 하시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아멘 이 이야기는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와 함께 이 땅에서 숨을 쉬며 살아왔던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다.이다.

 

II. 이스라엘과 교회(10-21)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16)

 

A.   흥미로운 대조

두번째 이야기는 안식일에 있었던 일이다. 예수께서 안식일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팔년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불러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고 말씀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었다. 18년이나 허리가 꼬부라졌는데도 회당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다니 이 여인의 신심 또한 본받을만하다. 더욱이 이 여인의 병이 귀신에 들린 것이라는 말씀은 매우 의미 있다.

 

오늘날에는 그 당시 보다 더 많은 질병들이 있다. 계절마다 독감 바이러스가 돌고 IA, 신종플르 등 그 종류도 다행이다. 사람들은 그 당시는 의학이 발달되지 않아서 병을 모두 귀신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과거 스페인에 창궐했던 콜레라도 오늘날 신종플르도 모두 악성 바이러스에 해당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병에 모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의학의 발달로 백신을 만들고 예방하고 있지만 병을 근본적으로 퇴치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야고보서에는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며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기록하였으며 다시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5:15,16)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병의 원인은 죄로부터 온다는 원리도 그대로 적용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께서 이 여인을 고치시자 회당장이 분개하여 무리들을 향하여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라(14) 책망하였다. 이에 주님은 위선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 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지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년 동인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15,16) 반문하셨다.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율법은 참으로 희안하다. 사람의 생명에 관한 것이라도 일로 취급하여 안식일에는 할 수 없게 하니 사람의 생명이 과연 짐승의 목숨만도 못한 것인가? 생명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권위를 위해 이런 법을 만들어 놓았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에 무리들은 주의 하신 일을 영광스럽게 보았으나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앞에서는 실로암 망대에서 죽은 열여덟 명이 소개 되었는데 여기서는 십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임 받은 여인이 소개 되고 있다. 우연의 일치 같지만 열여덟과 십팔은 같은 숫자 아닌가? 앞에서 십이년간 혈루병 앓던 여인이 구원을 얻게 되는 때에 열두살 난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 남을 얻지 아니하였는가?

 

숫자 놀이에 빠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열둘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 된 것 것이 아닌가? 구원의 날과 부활의 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섭리 아닌가? 그렇다면 열여덟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난 시점이 틀림없다. 계시록 12장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 곧 유대인의 구원이 언급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그때에서야 사단의 매임에서 놓여 굽은 허리를 펼 것이 아닌가? 이러한 그림들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고를 더해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B.   천국의 비유

이 말씀과 함께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밭(정원)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19) 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에 갖다(숨겨)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20,21) 하셨다.

 

사실 겨자씨 비유는 이미 마태복음 13장과 마가복음 4장에서 언급되었던 말씀이다. 팔레스틴의 겨자씨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자라면 키가 5미터나 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에서는 으로 마가복음에서는 으로 표기 되었는데 여기서는 채전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성경의 채전이란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정원이라고 표기 되었는데 게포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이곳과 요한복음 19 41절에 예수께서 못박히신 곳에 있는 동산이란 단어로만 기록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자기 채전은 채소밭이 아니라 거대한 정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문제는 이 비유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고민이 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이 부분을 장차 전개될 교회의 성장을 언급하신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해석을 따르기에는 문자적 무리가 있다. 먼저 나무가 되어라는 표현은 채소에 속한 겨자를 가리키는 것에 무리가 있다. 또한 겨자를 자기 정원에 심었다는 말도 많이 어색하다. 이는 관상수가 아닌 십자화과에 속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누룩은 교회의 적이다. 바울은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5:7) 하였고 우리를 향하여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5:8)고 권면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성경해석에는 두 가지 원칙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먼저 최초 사용의 법칙(Law of First Us) 해석의 불변성 법칙(Law of Expositional Constancy)이다. 다시 말하여 성경에서 창조라는 단어를 해석할 때에는 먼저 이 단어가 제일먼저 언급된 창세기 1 1절의 의미를 기준으로 해야 하면 이 해석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된 겨자씨와 공중의 새 그리고 가루와 누룩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음 13장에서 동일한 해석과 적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혹시 달리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에 나오는 감나무와 같은 것이라서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그대로 되어지고 있다는데 심히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자기 정원에 하나님의 말씀을 꽃 피우고 있으며 그 무성한 가지에 얼마나 많은 새들이 깃들고 있는가? 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잘못된 교리를 주장하므로서 온 누룩이 펴지게 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바울이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14, 15) 증거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하신 말씀들은 우리 교회를 향하신 모두 계시의 비밀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III. 구원의 문(22-30)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4)

 

A.   구원 얻은 자가 적은가?

예수님의 성경여행은 각 성 각 촌으로 이어져 가시는 곳마다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다.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어떤 사람이 예수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리이까(23) 물었다. 이는 그가 주께서 각 성과 촌에서 가르치신 말씀을 들으며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위에서 언급하신 것과 같은 말씀들이 이어졌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주님은 저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시며 계속하여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리라(24-27) 하셨다.

 

이 말씀들은 마태복음 7장 말미에 아주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나무와 열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언급하신 말씀이다. 우리 말에 콩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라는 속담이 있다. 분명한 것은 아는 것이 보이고 넣은 것이 나오게 마련이다. 누가 하늘로부터 오는 영적인 말씀을 먹었다면 그에게서는 하나님의 뜻하신 열매가 나올 것이요 매일같이 인터넷 채팅과 테레비를 일삼았다면 그의 삶에서는 쓰레기가 나올 것이고 누가 만약 이단사설이나 성령은 빙자한 은사노름을 즐겼다면 그에서 나올 것은 귀신 노름이 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루에 세차례 씩 밥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면 당신에게서는 진리의 빛이 솟을 것이다. 

 

B.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 나중 될 자도 있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28-30)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과 관련하여 누가복음 16장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살펴 보게 되겠지만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실패를 언급하신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이제 곧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올 새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적용되고 있지 않는가? 복음이 먼저 전파된 카톨릭은 어떠하며 또한 바벨론에 거한 사데 교회는 어떠한가? 그러나 나는 좁은 문 가운데서 자유를 누리려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얻는 영생의 문이다. 아멘 아멘

 

IV. 예루살렘 연민(31-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5)

 

A.   여우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 함

이제 여기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연민을 보게 된다.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께 와서 나가서 여기를 떠나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 고하였다. 바리새인치고는 상당히 양심 바른 사람이었는가 보다. 이에 주님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면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32) 하셨다. 참으로 의미있는 말씀이다.

 

주께서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여우의 속성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명예와 정치적 유익을 따라 무엇이든지 행하는 자였다. 자기의 정적이면 형제도 죽이고 자식도 죽였으며 부귀와 재물을 위하여는 그 어떤 것과도 타협을 하였다.

 

사실 헤롯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고소하지만 그 백성들이 예수를 따르므로 민란을 두려워 하고 그에 대한 판결을 빌라도에게 미루려 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여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느니라(33) 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심을 당할 것을 예고하신 말씀이다. 이로서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일정은 삼일 남았을 뿐이다.

 

B.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과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지 아니하였도다(34) 애통해 하셨다. 사실 주님은 하나님의 대업을 이루러 오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의 백성을 삼으신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집이요 만국을 통치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성이다.

 

수천년의 배반과 믿음의 역사를 이어오며 그래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권고하시며 회개에 이르시기를 종용하셨다. 그들은 조상들도 보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소경이 눈을 뜨고 저는 자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던져야 했다. 이를 목전에 바라 보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소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셨다. 우리는 이 찬송의 소리를 계시록에서 듣는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5:12,13) 

 

나는 우리가 다 의로운 자로서 하늘 보좌에서 이 노래를 듣게 되기를 바란다. 만약 우리 중에 있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노래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이 땅에 있을 마지막 고난을 통해 순교로서 통과해야 할 것이다. 이는 매우 고통스런 구원의 노래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 이제 주의 종의 눈을 열어 하늘의 보고를 보게 하시니 종의 입술을 열어 택하심을 얻은 자들을 만나게 하소서. 때가 이르렀고 알곡을 거두어야 할 것이나 내가 해산할 힘이 없나이다. 내게 당신의 사람을 보내 주소서 아멘 아멘!

 

 

누가_13-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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