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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의 양심고백 더이상 광고하지 말라

이요나 2013. 6. 19. 23:59
  •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성애 대응에 대한 생각과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를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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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현의 양심고백 더이상 광고하지 말라 최근 동성애반대운동을 하는 어떤 시민단체는중요 일간지 신문에"양심고백" (김정현)이란 입에 올리기 조차 더러운 글들을 전면광고를 내고 있다. 더우기 그들은 대통령, 국회의장,법무부장관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달아 시시때때로 광고를 게재한다. 더우기 그 광고에 동참한 55개 이상의 단체들이 공동이 
  • 내가 이러한 글을 웹에 올린 것에 대하여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론 바성연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는 바성연의 사역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크리스챤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론이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우지 않았고 칼을 잡은 베드로를 책망하셨다. 우리의 목표는 동성애에 빠진 자들을 구원하는 일이지 동성애의 더러움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가 죄이고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는 믿지 않는자들도 모두 알고 있다. 바성연에 내가 건의하는 것은 이러한 일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고 동성애로 인해 고통을 받는 형제자매들을 구원하기 위한 상담사역을 위한 복음의 실제적인 활동과 준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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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현의 양심고백 더이상 광고하지 말라 최근 동성애반대운동을 하는 어떤 시민단체는중요 일간지 신문에"양심고백" (김정현)이란 입에 올리기 조차 더러운 글들을 전면광고를 내고 있다. 더우기 그들은 대통령, 국회의장,법무부장관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달아 시시때때로 광고를 게재한다. 더우기 그 광고에 동참한 55개 이상의 단체들이 공동이 
  • 동성애의 더러움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이 우리 교회의 사역이 아니고 동성애의 죄에서 구원하는 복음의 길을 제시하고 동성애에 빠진 형제자매들에게 온전한 상담교육과 극복훈련을 통해서 구원을 하는 일이다. 한국교회에 동성애나 성적인 문제를 성경적으로 상담하고 교육하는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활이지 비판의 종교가 아니다(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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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성애는 반대하는 운동도 중요하다. 하지만 너무 극단적인 것은 비효율적이다. 모든 일에는 우선 순위가 있다, 교회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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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현의 양심고백 더이상 광고하지 말라 최근 동성애반대운동을 하는 어떤 시민단체는중요 일간지 신문에"양심고백" (김정현)이란 입에 올리기 조차 더러운 글들을 전면광고를 내고 있다. 더우기 그들은 대통령, 국회의장,법무부장관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달아 시시때때로 광고를 게재한다. 더우기 그 광고에 동참한 55개 이상의 단체들이 공동이 
  • 지은자매님,,,영어실력 중국어 실력 작난이 아니네용!!
    위에서 보면 다 똑같이 나쁜놈인데..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있고, 안하는 사람이 있을 뿐.. 
    As the Scriptures say, "No one is righteous— not even one.(Romans 3: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롬3:10) 
    就如经上所记,没有义人,连一个也没有。(羅馬書 3:10) 
     
    위에서 보면 다 똑같이 멍청한데.. 
    내가 아는게 다인 줄 알고 그렇게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난 지혜가 없으니 알려주세요.. 그럼 그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고. 
    This foolish plan of God is wiser than the wisest of human plans, and God's weakness is stronger than the greatest of human strength. (1 Corinthians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 1:25) 
    因神的愚拙总比人智慧。神的软弱总比人强壮。(哥林多前書 1:25) 
     
    위에서 보면 다 똑같이 불쌍한데.. 
    난 원래 이렇다고 냅두라고 뻔뻔하게 나오는 사람이 있고, 
    나 좀 도와달라고 두 손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을 뿐.. 
    For everyone has sinned; we all fall short of God's glorious standard. Yet God, with undeserved kindness, declares that we are righteous. He did this through Christ Jesus when he freed us from the penalty for our sins.(Romans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속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는 판단을 받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롬 3:23-24) 
    因为世人都犯了罪,亏缺了神的荣耀。如今却蒙神的恩典,因基督耶稣的救赎,就白白地称义。(羅馬書 3: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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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에게든지 고통의 역사는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은 오늘을 이루어낸 아름다운 전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이야기, 지울 수 없는 삶의 역사.. 그리고 오늘의 나.. 내일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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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의 사랑 (DAUM 2000년 칼럼대상 수상)1999년 12월 27일 어느 청년의 이야기 며칠전 칼럼가를 거닐다가 어느 청년이 쓴 칼럼을 읽다가 울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버지에 대하여 썼습니다. 그 제목이 "나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였습니다. 그 청년의 글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간질병 환 
  •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가 필요했다면 제 나라 여자들을 데려가 위안부로 삼지 남의 나라 민족의 여인들을 수탈해 놓고도 그 후손된자가 반성조차.. http://durl.me/58aghv
    media.daum.net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일본유신회 공동대표 겸 오사카 시장이 19일 "일본군 위안부는 필요했다"는 자신의 발언에 대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당 공동대표의 비판에 대해 발언을 철회하거나 사죄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그는 이날 오사카시청에서 취재진에게 "(내 발언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유권자에게 정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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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레니엄 단상> 천년의 사랑

    어느 청년의 이야기

    며칠전 칼럼가를 거닐다가 어느 청년이 쓴 칼럼을 읽다가 울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버지에 대하여 썼습니다. 그 제목이 "나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였습니다.

    그 청년의 글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어느날 그의 아버지는 전도지를 들고 길에서 전도하다가 갑자기 딩굴기 시작했습니다. 시장 통에서 장사하는 옆집 할머니가 달려와 전해 준 말을 듣고 단숨에 달려간 그 아이의 입에서는 "아빠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소리 없이 터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얼마를 울어야 했던지..그날 나는 그 글로하여 채면이고 뭐고 차릴 정신이 없을 만큼 울었습니다. 내 가슴속에서 내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 불어 온 근대화 바람은 우리로 하여 현대를 살아가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먹고 살아가야 하는 투쟁은 우리 삶 속에서 진정한 삶의 근본 "사랑"을 뺏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사랑에 대한 개념은 있는데 사랑의 삶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인간의 삶은 진정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가요? 자기의 이상을 달성하는 것일까요? 명예인가요? 아니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어느 시점에 와서 자신을 돌아 볼 때 우리의 결론은 결국 허무에 도달하고 맙니다.

    우리는 물질세상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아 헤메는 가운데 진정한 삶의 목적과 근본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은 시작과 끝이라는 일직선상의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의 삶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논리적인 공식이 아니고 나의 의지와 조물주의 섭리에 의하여 시작되고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긍국적 목적은 삶을 영유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아니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사랑의 완성에 있습니다.

    이제 다음 밀레니엄에는 우리 인간의 형상 속에 내재한 삶의 근본적 사랑이 우리 삶 가운데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우기 지난 세기 동안 우리는 타민족으로부터 그리고 동족상쟁으로 또한 국가 지도자들로부터 우리 안에 내재된 근본적 사랑이 훼방당하고 봉쇄당하며 유린당해 왔습니다. 지난 세월 우리의 상처를 모두 털어버리고 화해와 용서로 다가가서 우리 안에 내재한 사랑의 진실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성취될 것을 믿고 나의 인생 경륜 속에서 깨달은 "사랑의 이야기"를 털어 놓으려 합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내 기억에는 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기억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석꾼의 아들로 두번의 결혼을 하신 아버지는 일곱의 아들에 딸 하나를 두셨습니다. 그 중에 나는 두번째 부인인 어머니의 장남 그러니까 아버지의 5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꼿꼿한 어머니 밑에서 장남으로 자라났습니다.

    이미 어머니가 시집이라고 오셨을 때는 이미 아버지가 노름으로 그 많은 땅을 달 팔아 드셨고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우리를 키웠습니다. 제 기억에는 어머니는 안해 본 장사가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닷새마다 열리는 장터 한모퉁이에서 술빵(막걸리로 부풀려서 만든 빵)을 쪄서 파시기도 하셨고 장릉산 유원지 철이면 음료수 자판을 벌리시기도 했습니다. 또한 동네 어귀 빈집을 얻어 보신탕 집을 열기도 하셨고, 그러한 틈에도 인근의 혼수감은 도맡아서 짓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그러한 노력으로 만석꾼이 아들들보다 더 깔끔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가 들어오는 날이면 불도 지피지 않은 냉방으로 쫓겨나서 안방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귀를 막고 있어야 했습니다. 싸움은 늘 어머니의 일방적이 승리로 끝났습니다만 난 그 때마다 울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훤출한 키에 아주 잘생긴 분이셨고 근동에서 온유한 인품으로 칭송이 자자하신 분이셨으며 내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를 늘 깔끔한 한복으로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버지의 밥상은 늘 겨란 찜과 생선토막을 올리셨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토된장찌개를 빠트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진짜로 아버지를 미워하시는 것인지 사랑하시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본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일이라는 것은 새벽부터 밤까지 어머니가 도맡아 하셨지요. 아버지는 밤이 새도록 바둑을 두시던가 골패장기를 두러 다니시느라고 늘 집을 비우셨습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어머니가 시집오셔서 나를 낳을 때까지 아버지는 하루 밤에 땅 한 마지기씩 팔아 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빈털털이가 된 지금은 바둑으로 소일하고 계시고 삼남매와 함께 먹구 살기에 힘이 빠진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기만 하면 싸우시는 것이였습니다.

    내 기억에는 어머니의 푸념을 들으시며 한마디도 말못하고 슬그머니 방을 나가시는 아버지의 멀쑥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울이라는 곳에 이사 오시면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시골 큰 형님 댁에 떨치고 우리 형제들만 데리고 이사오셨습니다. 단칸방인 이유도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아버지가 너무 야속하고 화가 나시는 모양이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정녕 사랑이 없으신 잘못만난 부부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싸우셨고 이제라도 헤여진 것은 어쩌면 잘 된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내 나이 서른이 다 되도록 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을 하던 나를 두고 세상을 떠나시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시는 시골 산모퉁 자락에 가셔서 누우셨습니다. 차마 마지막 숨을 아버지 앞에 보이고 싶지 않으셔서인지 아버지가 사시는 집을 멀리 바라보는 산모퉁이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나는 그날 밤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을 비비며 어쩔 줄 모르고 우시는 칠십세의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내 아버지는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산소를 지키셨습니다. 지금은 강화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산턱에 나란히 누어 천년의 사랑에 들어 계시지만 사실 나는 우리의 어려서 늘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난 커서 결혼하지 않을꺼야 하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나는 오십이 넘었습니다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국 다음천년의 영원한 사랑으로 입실하셨습니다.

    이제 내 나이 오십이 넘어 아버지의 나이가 된 후에야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였습니다. 만석꾼이의 아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나약하게 살아 오셨던 아버지와 억척같이 자식들과 함께 살아 보려던 어머니.. 어린 자식들 눈에 늘 다투시던 그들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었지만 서로를 지키는 애뜻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사랑을 지속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환경과 자식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삶의 분노가 있었을 뿐이지요.

    목사가 된 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카페 사랑을 배우면서 나는 과연 자식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내 어미의 사랑이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나는 자기를 뿌리치고 떠난 여인의 산소를 지킬만한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어버지, 내 어머니의 천년을 이어간 순애보가 오십이 넘어서 다음천년을 바라보는 이 못난 아들의 가슴에 살아서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어머니여 당신은 사랑이셨습니다.

    1999년을 보내며, 통곡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