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예수 죽었는가 살았는가?
(행 25:19) 다만 자기들의 미신과 또 예수라는 이 곧 죽었지만 바울이 살아 있다고 확언하는 사람에 관한 어떤 문제들을 제기하여 그를 대적할 뿐이었나이다.
벨릭스 후임으로 온 베스도 총독은 부임 인사차 유대인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요세프스는 그를 유능하고 능력있는 지도자로 평가했다. 그때 유대지도자들은 바울을 고소했다. 이는 종교적 적대감은 깊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들의 의도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죽이려는 것이었다.
이에 베스도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는 대신 그들을 가이사랴로 내려가게 하고 거기서 증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바울을 송사했을 때, 바울은 그가 가이사에게나,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서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변명했다. 이에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물었고 바울은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Caesarem appello)라고 답했다.
로마시민은 자기의 재판이 공정한 재판이 아니었다고 느낄 때에는 가이사에게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베스도는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결정했다. 그러나 베스도는 가이사에게 보낼 확정적인 증거 자료를 채택할 수 없어 고심하였는데 이는 총독으로서 자질을 문책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아그립바 2세와 그의 동거녀 버니게가 베스도를 방문하러 왔을 때 베스도는 바울의 문제를 설명하며 가이사에게 상소할 자료를 얻기 위하여 그와 함께 바울을 재심하게 되었다. 버니게는 두르실라의 동생으로 친 오빠와 동거를 한 패역한 여인이었다.
베스도가 쌍방의 주장을 요약해 볼 때 유대인들은 예수가 죽었다고 믿었고,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살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슈의 핵심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는 죽었거나 아니면 살아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는 죽었다고 믿는다. 세상 사람들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빈 무덤의 이야기는 하나의 동화이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살아나심을 믿지 않으려는 것은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며 또 죄의 시작인 육신의 쾌락을 멈추기 싫어서이다. 그러나 예수가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둡고 희망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들의 현재의 삶에 소망이 없으며, 갈수록 사회는 통제되지 않는 폭력과 전쟁으로 무너져 가고 있다. 정부의 부패와 살인과 도적 그리고 성병이 판을 치고 있다.
미친 듯이 파멸로 질주하는 것을 중단시킬 만한 능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또한 미래를 향한 희망도 없다. 돼지 같이 살다가 개처럼 죽는다. 사람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공허감을 어떻게 해서라도 채워보려고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그러나 명예와 돈이 그것을 채우지 못한다. 섹스와 술과 마약이 그것을 채우지 못한다.
한때 바울은 주님이 죽었다고 믿었다.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 바울이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다면 그는 변화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원수에서 친구로 변했다. 박해자에서 선포자로 변했다. 예수를 미워하던 자가 사랑하게 되었다.
나도 흑암 속에서 예수의 복음을 들었을 때 첫 번 째가 예수는 죽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두 번째 소식은 예수는 살아나셨다는 메시지였다. 예수가 살아나지 않았다면 내가 믿어야 할 소망이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7-19) 증거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여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늘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4-28)
그렇다면 예수께서 사셨다면 그것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를 믿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와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사심을 믿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
그러나 이 축복에 이례적인 사항이 있는데, 예수의 사심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 가운데 죽어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주되신 예수께서 사신다는 것을 믿지만 자신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주님이 죽으신 것 같이 산다. 주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켜라 하셨음에도 그들은 주의 계명들과 아무 상관이 없이 산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를 전혀 알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나쁘게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의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너희에게 나으리라”(벧후 2:21) 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하셨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 예배에 규칙적으로 참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께서 사셨다고 확신하면서도 아직도 어둠의 자식처럼 사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이 죽으신 것 같이 살고, 주의 계명은 자신들의 삶에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구원은 예수께서 사신다는 것을 믿는 것 그 이상이며, 주님이 명령하신 삶을 사는 것이다. (이요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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