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메거진

요르단 - 사막의 땅, 역사의 향기속으로

이요나 2006. 8. 5. 11:37
 
요르단 - 사막의 땅, 역사의 향기속으로

사막의 땅, 일부 다처제의 나라, 전쟁과 내전으로 얼룩진 곳. 우리네 마음 속에 자리한 아랍은 참으로 멀다. 아랍인들의 친절을 느끼고, 그들의 찬란한 역사를 보기 전에는 그럴 것이다. 아랍, 그 속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아랍, 역사의 향기 속으로
-제라쉬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폐허


시리아 국경 디라(Dir’a)를 넘어 요르단 람따(Ramtha)로 접어든다. 고대 도시 제라쉬(Jerash)는 람따에서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자리했다.

중동에는 ‘제라쉬처럼 돼 간다’는 말이 있다. 형체를 잃어버릴 정도로 심하게 부서진 사물을 두고 빗대어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레바논에서 시리아를 지나는 동안 만나왔던 고대 도시들처럼 제라쉬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 것일까.

제라쉬의 역사는 BC6000~4000년경의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BC3200 ~120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에도 제라쉬가 존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제라쉬에 도시가 들어선 것은 BC2세기경 안티오코스 4세가 게라사(Gerasa)라는 도시를 세우면서부터다. 흔적이나마 남은 지금의 유물들 역시 이후 도시의 번영기에 세워진 것들이다. 350년경, 제라쉬는 기독교 마을로 거듭난다. 400~600년 사이에만 13개 이상의 교회가 생겨났고, 4세기경에는 대성당이 지어졌다. 북문 주변에는 여전히 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러한 제라쉬는 614년에 페르시아, 636년에 아랍에 의해 정복됐다. 정복과 정복으로 거듭된 상처. 여기에 더해 746년의 대지진은 제라쉬를 폐허에 가까운 도시로 몰락시켰다.

몰락한 도시라지만 제라쉬의 아름다움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열주(列柱, Cardo Maximus)와 아르테미스 신전(Artemis)은 그 중에서도 손꼽을만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열주는 말 그대로 기둥이 늘어서 형성된 곳이다. 제라쉬의 유적군을 따라 길게 형성된 열주를 따라 걸으면 대부분의 유적과 만나게 된다. 히포드럼을 지나 남문에서 출발했다면 광장(Forum)에 서서 열주를 감상한 후 여정을 잇는다. 광장에서 바라본 열주는 옛 영화를 대변하듯 그야말로 위풍당당하다.

2세기경에 세워진 아르테미스 신전은 현재, 8개의 기둥만 남은 상태다. 기둥이 기둥이려니 하고 발길을 돌린다면 오산. 신전에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아~ 나뭇잎 모양의 섬세한 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함과 섬세함의 조화. 아르테미스 신전은 이 모두를 안은 듯하다.

-‘드디어’, ‘마침내’…장미 빛 도시 페트라

비블로스, 바알벡, 팔미라, 제라쉬…… 레바논과 시리아 요르단을 내달리며 지나온 고대 도시들은 페트라에 가기 전, 잠시 잊는 게 좋다. 아랍의 긴 여정을 잊은 채 ‘드디어’, ‘마침내’를 연발한 것도, 아랍으로 모여드는 세계의 배낭 여행자들이 페트라에 밀집하는 것도 다름 아닌 이유리라.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서 3시간 여. ‘드디어’, ‘마침내’. 페트라는 시크(Siq, 협곡)를 선보이며 꿈에도 그리던 세계의 문을 열었다.

쨍. 시크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부서진다. 장.미.빛.보.물. 엘 카즈나(El Khaznah)! 영국의 시인 존 버곤은 페트라를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 빛 붉은 도시’라 했다. 시크에서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엘 카즈나는, 장미 빛 도시의 화려한 서막을 알린다.

페트라는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안(Nabataean)이 BC6세기경, 사암 위에 건설한 도시다. 도시 전체에 붉은 빛이 감도는 것도 이 때문. 잘 부서지는 성질을 지닌 사암 위에 이처럼 거대한 도시를 지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106년, 로마 트라야누스는 나바테안이 이뤄낸 도시를 정복하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이곳을 방문해 ‘하드리안의 페트라’라고 이름했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같은 뜻으로 페트라는 렉컴(Reqem), 셀라(Sela)라 불리기도 했다.

363년의 지진으로 파괴된 페트라는 역사 속에 사라졌다가 스위스 여행자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L. Burkhardt)에 의해 발견된다. 때는 1812년. 나바테안은 물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 등 시대의 건축양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페트라는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어두운 시크를 지나 환한 빛으로 드러나는 엘 카즈나는 페트라의 보물이다. 하지만 페트라에 와서 엘 카즈나만 보고 돌아가는 여행자는 흔치 않다. 하루는 기본, 보통 2~3일 티켓을 끊어 페트라를 돌아본다. 하루 여행자의 기본 코스는 수도원(El Deir, Monastery). 수도원은 페트라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 꼭대기에 자리했다. 엘 카즈나에서 산 꼭대기까지는 걸어서 2시간 이상, 당나귀를 타고 가면 1시간 가량 걸린다. 만만치 않은 길.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는 여행자가 참 많다. 체력에 자신이 없다면 일찌감치 베드윈(유목민) 호객꾼을 따라가 당나귀를 빌리는 게 좋다. 낭떠러지가 이어지는 험난한 길이지만 당나귀는 타닥타닥 잘도 걷는다.

수도원은 폭 50m, 높이 45m로 페트라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내부에 십자가가 새겨진 것으로 미뤄 비잔틴 시대에 교회로 사용됐을 것이라 추정할 뿐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다. 하나 확실한 건 거듭되는 바위와 어우러진 수도원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분홍 빛, 붉은 빛, 갈 빛 등으로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그의 모습은 페트라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그밖에 볼거리ㅣ 마다바와 느보산

암만에서 남쪽으로 33km 지점에 자리한 마다바(Madaba)는 일명 모자이크 도시라고 불린다. 가장 유명한 모자이크는 성 조지 교회의 바닥을 장식한 예루살렘 지도. 모자이크는 돌을 얇게 깎아 붙여 만들었다. 교회 입구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모자이크를 만들어 판매하는 가게가 많다. 손바닥 만한 작은 모자이크가 10달러 가량. 예루살렘 지도를 그대로 본 따 만든 큰 모자이크는 50달러 가량이다.

마다바 북서쪽에 놓인 느보산(Mount Nebo)은 요르단 강과 사해가 보이는 곳에 자리했다. 모세가 죽어 장사를 지낸 곳이라 알려진 곳으로 산 꼭대기에는 뱀이 감싼 형상의 십자가와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 내부에는 유목민의 생활 등을 담은 모자이크가 장식돼 있다.


+++++플러스 α++++++

★입장료 및 기타 이용요금

제라쉬 입장료는 5JD(요르단 디나르), 페트라 입장료는 1일 21JD이다. US$1=0.7JD 정도다.
페트라에는 여행자를 상대로 당나귀 등을 태워주는 베드윈이 많다. 대개 끈질기게 호객 행위를 하므로 타지 않는 경우에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게 좋다. 매표소에서 협곡 입구나 엘 카즈나까지는 당나귀를 타면 US$3.00 가량, 엘 카즈나에서 수도원까지 US$7.00 가량이다. 흥정은 필수. 손님이 여자인 경우 “사랑한다”거나 “결혼하자”며 접근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기혼자라고 말하는 게 가장 좋다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고대의 신비로운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