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3) 하나님의 의
(로마서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을 로마서 1장 17절에서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이 말씀은 정말 로마서 전체를 대표하는 복음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리켜 우리는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바울이 16절에서 언급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안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말한 것이 복음의 출발점과 구원의 섭리를 설명한 것이라면 오늘 17절의 선언은 복음의 값과 그 결과를 설명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언급한 선언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의'를 살펴 볼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 또는 '하나님의 공의'를 입으로 외치면서 사실은 이 부분을 많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의'란 헬라어로 '디카이오스'로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이성적 성품을 말합니다.
우리는 크게 하나님의 성품을 사랑과 의로움과 긍휼하심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인격적 성품이라 할 때 '긍휼'은 그의 감성적 성품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품인 '의'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과의 언약적 관계 속에 나타난 책임과 의무를 통괄한 인격적 기준을 말합니다.
구약의 시대에 있어는 '의'는 오직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로서 그의 백성들의 삶 속에 지켜져야 하는 율법적 의무와 책임이었으며, 율법의 토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과 관련하여 이 땅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살펴 보면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기준으로서 공평한 저울과 같은 하나님의 법과 규례였습니다(레19:36). 잠언서 기자는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다"(잠8:8) 기록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공의는 그 지도자 들의 행동지침이 되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을 보전하고 이끌어 가는 기준과 지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가의 눈을 어둡게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하셨고 다시 "너는 마땅히 공의만 좇으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얻으리라"(신16:19-20) 명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의로운 판단력을 구하며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라"(시72:2)노래 하였으며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시9:8)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 회개한 자들을 향한 구원의 손길로 나타났습니다. 이사야는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사51:4) 외쳤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는 택하신 사람들과의 언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삶의 기준이며 통치적 기준이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있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 이 땅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의' 가 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기준, 인격의 기준, 사랑의 기준, 윤리의 기준, 도덕의 기준이 되셨습니다.
복음시대에 있어 '하나님의 의'는 대체적으로 종말론적인 판결과 관련된 법정용어로 언급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21:32) 하셨습니다.
또 베드로는 목회 말년을 정리하며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 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벧후2:21) 책망하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사역자들의 탈선이 많은 때에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의'는 그리스도인를 기준이며, '거룩한 품성', '의의 열매', '의로운 행동' 을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도덕적 용어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1:30) 말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에 대한 기준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정말 저울과 같이 공평한 것인데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죄와 의의 사이에서 융통성을 갖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는 의로울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의식 속에서 자만하여 단번에 얻은 하나님의 의를 보전하지 못한다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바꾼 우리의 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다시 죄인으로 물러서야 할 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는 그처럼 가치없는 것인가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하나님의 은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또 돌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 가운데 완성된 것이라 자만하여 그 의로움을 보전하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다시 죄인의 길에 선다면 결국 우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를 의인이라 칭하신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들게 됩니다. 그의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의인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의심받게 됩니다. 성경은 이미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선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삶이 어떻게 보전 될 것이냐에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치도 물러서고 너 나아갈 수도 없는 저울의 눈금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다시 범죄하여 죄인의 자리에 돌아간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성경의 기록된 모든 예언들은 모두 허망한 것이 됩니다. 또한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약속도 이 땅에서의 천년왕국의 언약도 모두 무너지게 되며 그리스도의 날부터 지금까지 그의 의를 성취한 사람들의 수고와 희생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어떻게 자유할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믿을 때 단번 얻은 구원을 그대로 본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제자들을 위해 밤을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온전케 되라는 말씀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불가능한 일이라면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의인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앞에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거룩함을 온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서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 위함이니이다" (요17:15)하셨습니다. 또 주께서 그들을 보전할 수 있는 그것을 위한 방법을 설명하여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람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세상의 시민이 아니요 천국의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또다른 믿음의 세계가 설정되어 있고 그를 위하여 주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지위일 뿐입니다.
주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서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17:17) 이 말씀은 정말 우리 가슴에 사겨두어야 할 진리의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우리는 온전케 할 수 있는 그 방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방법은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길이며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3년전부터 목요예배를 개설하고 젊은이들에게 마가복음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고린도후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세월이었습니다만 제게는 정말 귀중한 시간으로 이 시간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살피고 사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서를 마치고 바울서신을 공부하면서 서신서의 모든 내용이 동일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이였습니다.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과 의로운 삶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누누히 설명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때로는 책망으로 때로는 권면으로 때로는 책칙으로 우리를 가르치며 그 말씀을 불순종한 자들을 엄히 꾸짖고 심지어는 교회로부터의 출교를 명하기까지 하였습니다(고전5장 참조) 우리가 부분적으로 바울 서신을 읽을 때에는 정말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이것은 종이에 기록된 글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얻어 천국 시민이 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지키는 수호신인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헤아리면서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또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나 생각하며 많은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심하여 나는 말씀으로 덧입기를 소망하고 그 의로움과 거룩함을 사모하여 나를 경계하며 오직 말씀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러나 당연이 나의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가르치게 되고 의인의 거룩한 삶과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길을 지적하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설교를 듣는 많은 청년들은 그 말씀에 순복하고 자신의 무력함과 무지함을 탄식하며 주께 회개 하였습니다.그러나 어떤 형제들은 육신의 행위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오히려 왜 그리스도인을 정죄하느냐 한번 믿음 구원이 우리가 범죄한다고 없어지는 것이냐 또 범죄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냐 항의 하며 교회를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은 나의 말이 아닌 성경의 진리들입니다.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라"(딤전1:9-11)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일을 대적하는 육체의 일을 경계하며 "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 한 것과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내용을 고린도전서와 또 예배서에서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담배와 자위를 말하며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니 관계없다 말하며 담배 피운다고 또 자위쯤 했다고 천국에 들어 가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않된다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어도 그것은 음행이요 후욕이요 토색인 것입니다. 술이나 담배나 음행이나 자위나 모두 육신의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정죄하기 위한 말씀이겠습니까? 세상 끝날에 나타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부모가 자식을 책망할 때 미워서 책망하겠습니까? 속썩이는 아들보도 차라리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고 그 아들이 집을 나갔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으며 담배와 술을 끊어 온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되라고 가르친다고 분노하여 교회를 나갔다면 그 목사의 마음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오늘 나의 슬픔과 고통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공의로우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돌아 와도 나는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나갈 것이며 그들이 깨달은 마음으로 주의 말씀에 순복하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권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늘로 구름을 타고 올라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판단과 심판의 기준이 됨을 깨달아 이제로 모든 죄에서 자신을 깨끗히 하십시다,
(로마서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을 로마서 1장 17절에서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이 말씀은 정말 로마서 전체를 대표하는 복음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리켜 우리는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바울이 16절에서 언급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안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말한 것이 복음의 출발점과 구원의 섭리를 설명한 것이라면 오늘 17절의 선언은 복음의 값과 그 결과를 설명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언급한 선언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의'를 살펴 볼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 또는 '하나님의 공의'를 입으로 외치면서 사실은 이 부분을 많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의'란 헬라어로 '디카이오스'로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이성적 성품을 말합니다.
우리는 크게 하나님의 성품을 사랑과 의로움과 긍휼하심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인격적 성품이라 할 때 '긍휼'은 그의 감성적 성품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품인 '의'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과의 언약적 관계 속에 나타난 책임과 의무를 통괄한 인격적 기준을 말합니다.
구약의 시대에 있어는 '의'는 오직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로서 그의 백성들의 삶 속에 지켜져야 하는 율법적 의무와 책임이었으며, 율법의 토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과 관련하여 이 땅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살펴 보면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기준으로서 공평한 저울과 같은 하나님의 법과 규례였습니다(레19:36). 잠언서 기자는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다"(잠8:8) 기록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공의는 그 지도자 들의 행동지침이 되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을 보전하고 이끌어 가는 기준과 지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가의 눈을 어둡게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하셨고 다시 "너는 마땅히 공의만 좇으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얻으리라"(신16:19-20) 명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의로운 판단력을 구하며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라"(시72:2)노래 하였으며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시9:8)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 회개한 자들을 향한 구원의 손길로 나타났습니다. 이사야는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사51:4) 외쳤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는 택하신 사람들과의 언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삶의 기준이며 통치적 기준이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있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 이 땅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의' 가 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기준, 인격의 기준, 사랑의 기준, 윤리의 기준, 도덕의 기준이 되셨습니다.
복음시대에 있어 '하나님의 의'는 대체적으로 종말론적인 판결과 관련된 법정용어로 언급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21:32) 하셨습니다.
또 베드로는 목회 말년을 정리하며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 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벧후2:21) 책망하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사역자들의 탈선이 많은 때에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의'는 그리스도인를 기준이며, '거룩한 품성', '의의 열매', '의로운 행동' 을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도덕적 용어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1:30) 말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에 대한 기준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정말 저울과 같이 공평한 것인데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죄와 의의 사이에서 융통성을 갖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는 의로울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의식 속에서 자만하여 단번에 얻은 하나님의 의를 보전하지 못한다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바꾼 우리의 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다시 죄인으로 물러서야 할 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는 그처럼 가치없는 것인가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하나님의 은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또 돌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 가운데 완성된 것이라 자만하여 그 의로움을 보전하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다시 죄인의 길에 선다면 결국 우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를 의인이라 칭하신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들게 됩니다. 그의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의인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의심받게 됩니다. 성경은 이미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선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삶이 어떻게 보전 될 것이냐에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치도 물러서고 너 나아갈 수도 없는 저울의 눈금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다시 범죄하여 죄인의 자리에 돌아간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성경의 기록된 모든 예언들은 모두 허망한 것이 됩니다. 또한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약속도 이 땅에서의 천년왕국의 언약도 모두 무너지게 되며 그리스도의 날부터 지금까지 그의 의를 성취한 사람들의 수고와 희생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어떻게 자유할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믿을 때 단번 얻은 구원을 그대로 본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제자들을 위해 밤을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온전케 되라는 말씀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불가능한 일이라면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의인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앞에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거룩함을 온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서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 위함이니이다" (요17:15)하셨습니다. 또 주께서 그들을 보전할 수 있는 그것을 위한 방법을 설명하여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람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세상의 시민이 아니요 천국의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또다른 믿음의 세계가 설정되어 있고 그를 위하여 주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지위일 뿐입니다.
주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서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17:17) 이 말씀은 정말 우리 가슴에 사겨두어야 할 진리의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우리는 온전케 할 수 있는 그 방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방법은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길이며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3년전부터 목요예배를 개설하고 젊은이들에게 마가복음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고린도후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세월이었습니다만 제게는 정말 귀중한 시간으로 이 시간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살피고 사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서를 마치고 바울서신을 공부하면서 서신서의 모든 내용이 동일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이였습니다.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과 의로운 삶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누누히 설명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때로는 책망으로 때로는 권면으로 때로는 책칙으로 우리를 가르치며 그 말씀을 불순종한 자들을 엄히 꾸짖고 심지어는 교회로부터의 출교를 명하기까지 하였습니다(고전5장 참조) 우리가 부분적으로 바울 서신을 읽을 때에는 정말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이것은 종이에 기록된 글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얻어 천국 시민이 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지키는 수호신인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헤아리면서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또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나 생각하며 많은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심하여 나는 말씀으로 덧입기를 소망하고 그 의로움과 거룩함을 사모하여 나를 경계하며 오직 말씀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러나 당연이 나의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가르치게 되고 의인의 거룩한 삶과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길을 지적하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설교를 듣는 많은 청년들은 그 말씀에 순복하고 자신의 무력함과 무지함을 탄식하며 주께 회개 하였습니다.그러나 어떤 형제들은 육신의 행위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오히려 왜 그리스도인을 정죄하느냐 한번 믿음 구원이 우리가 범죄한다고 없어지는 것이냐 또 범죄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냐 항의 하며 교회를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은 나의 말이 아닌 성경의 진리들입니다.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라"(딤전1:9-11)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일을 대적하는 육체의 일을 경계하며 "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 한 것과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내용을 고린도전서와 또 예배서에서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담배와 자위를 말하며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니 관계없다 말하며 담배 피운다고 또 자위쯤 했다고 천국에 들어 가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않된다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어도 그것은 음행이요 후욕이요 토색인 것입니다. 술이나 담배나 음행이나 자위나 모두 육신의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정죄하기 위한 말씀이겠습니까? 세상 끝날에 나타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부모가 자식을 책망할 때 미워서 책망하겠습니까? 속썩이는 아들보도 차라리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고 그 아들이 집을 나갔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으며 담배와 술을 끊어 온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되라고 가르친다고 분노하여 교회를 나갔다면 그 목사의 마음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오늘 나의 슬픔과 고통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공의로우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돌아 와도 나는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나갈 것이며 그들이 깨달은 마음으로 주의 말씀에 순복하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권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늘로 구름을 타고 올라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판단과 심판의 기준이 됨을 깨달아 이제로 모든 죄에서 자신을 깨끗히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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