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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5) 믿음의 지혜

이요나 2007. 2. 14. 14:09
구원론(5) 믿음의 지혜

(눅7: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우리는 앞에서 믿음의 언어적 속성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를 좀더 면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서를 통하여 나타난 믿음의 상태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 '어떤 믿음이냐'(종류), '믿음이 있다 없다'(소재), 또 '믿음이 크다 적다'(양) 라고 말 합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도 그의 제자들을 가리켜 '왜 믿음이 없느냐' 또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가리켜 '네 믿음이 크도다' 하셨으며 또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복음서를 전반적으로 살펴 보아야 할 것이지만, 저의 저서 "지혜와 지식과 믿음의 선물"(말씀나라)에서 상세히 언급하였기 때문에 오늘은 누가복음 7장을 중심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두 사람의 믿음의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최고의 믿음이라 칭찬하신 백부장의 믿음과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입마추던 여인의 믿음입니다.

한 사람은 세기적인 위엄과 인기를 갖고 있는 '로마의 꽃' 백부장이고 한 사람은 죄인이라 불리우는 유대 여인이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단면적으로 표현할 때 백부장의 믿음은 이만한 믿음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주께 칭찬받은 믿음이었고 죄인된 여인은 죄에서 구원받은 구원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왜 백부장의 믿음을 크다고 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그의 믿음이 어떻게 하여 크게 된 것인지도 추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가 사랑하는 하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장로들을 보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로들은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어 주었으니 복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과거 우리나라를 점령한 일본군사의 만행과 행포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계를 점령한 로마군의 일선 지휘관이라면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는 유대민족을 사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를 청하였습니다. 그가 하인의 병을 위하여 예수를 청하였다면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 속에서 백부장의 성품과 그의 종교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청을 받고 집 근처에 오신 예수께 '벗들'을 보내어 '나는 당신이 내 집에 들어 오심을 감당치 못합니다.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벗들이 예수께 나왔다는 기록을 통해 백부장은 많은 사람들과 인격적 교우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인격과 도덕성을 알 수 있습니다. 벗들이 전한 말을 통해 우리는 로마 백부장은 이미 예수께서 누구인지, 또 어떤 분이신 지를 알고 있었으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신뢰(turst)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7장3절에 그가 '소문을 듣고' 유대인 장로를 예수께 보낸 일입니다. 그가 들은 소문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그 당시 예수는 그가 진압해야 할 민중의 소요를 일으키는 주동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동안 예수가 하는 곳곳마다 사람을 보내어 감시하고 그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하였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올라 오는 보고를 통해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들과 가르침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존재에 대하여 여러가지 각도로 살펴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는 로마 시민 중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로마시민들에게 가장 총망을 받는 '로마의 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 백부장을 이해하려면 로마 군대의 편재를 어느정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전세계가 로마의 정치적 배경 아래 있었음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로마의 군대적 정치제도는 원로원 소속과 로마황제 친위대 소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평화로운 로마제국은 원로원에서 치리하였지만 점령지와 같은 위험한 지역은 로마황제가 지휘하는 친위대가 파송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에 영문(營門)이라고 기록된 로마군대는 독립군대로서 (참조 행21:34, 22:24) 이들은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에 해당됩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로마 군단의 최소 집단병력을 지휘하는 소대장입니다. 한 군단에는 10개의 대대(legion/레기온)가 있었고, 한 대대 안에는 3개의 중대(maniple)가 있었으며 한 중대 안에는 두 개의 소대(century)가 있는데 이 소대를 지휘하는 일선 장교들이 백부장(헬라어로 백 명의 머리)으로서 천부장들과 같이 정치성을 띠지 않는 충성된 로마군대의 실제적 힘이었습니다.

사실상 팍스 로마나(Pax-Romana로마에 의한 평화)를 창출한 것은 로마시민의 준법정신과 로마 군인들의 강력한 기강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물론 로마인들의 예술, 철학, 과학 등 전반적인 영향도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로마의 문화체제는 헬라의 문화적 정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헬라의 사상들을 받아들여 체계화 하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로마의 정치제도가 현대정치의 근간이라면 헬라니즘은 오늘날 문화와 철학의 뿌리입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점령지 이스라엘의 통제세력 최일선 장교였던 백부장은 로마명문 출신으로 학문과 철학적 지식을 갖고 있던 백부장이 소문만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단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회 질서 최일선 책임자로서 민중 소요를 일으키고 있는 예수에 대한 정확하고 확실한 지식과 정보와 현실 가운데 나타난 사실들과 증인들의 증언을 확보하였을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문론 그도 처음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로 인하여 군중들이 소요하고 또 특별한 이적이 나타나는 현실을 발견한 백부장으로서는 그에 대한 모든 기록과 정황들을 면밀히 살펴 보기 위하여 병영에 비치된 유대인의 경전 즉 성경을 토대로 메시야에 대한 지식들을 살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예언서가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음을 생각할 때 나는 본문에 '벗들'이라고 기록된 사람들이 백부장에게 성경을 풀어서 가르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흥미롭게도 백부장의 믿음과 아주 다른 유대인의 영적상태를 다음 문단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주께서 나인성 과부의 젊은 아들를 살리신 일입니다. 이 부분은 문맥상 그냥 지나치기 쉬운 부분입니다만 죽은 자가 일어나 앉아 말을 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분명 메시야가 올 것을 고대하는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영적상태였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문단에 기록된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인의 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식탁에 앉은 예수의 발밑에 앉아 눈물로 예수의 발에 입을 마추는 여인을 바라보며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또 죄인인 것을 알았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가장 존경받고 또 최고의 학문과 종교성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이었으면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몰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누가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때 마침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그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가 오시기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다시 이처럼 의심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이 믿음과 현실과의 상황입니다. 세례요한이 믿음(faith)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Trust'를 발견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는 때 마침 모여든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며 대답하여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어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4장에서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 인용하셨던 이사야 61장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으며 세례요한에게 왜 합당한 답변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세례 요한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바 "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하신 말씀처럼 그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였음을 이해 하여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경에 미리 말씀하신 예언을 따라 왔음을 알고 있었고 또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미리 기록하신 말씀을 따라 오셨고 또 예언하신 일들을 하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고자 제자들을 보낸 것인데 제자들의 보는 앞에서 이사야 선지자로 말씀하신 말씀들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알고 있을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바 메시야에 관한 말씀을 전달하시며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7:23) 하셨습니다.

여기서 '실족'이란 새가 그물에 걸린다는 말씀입니다. 새가 그물을 친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그물에 걸리지 않겠지요. 우리가 사기를 당하던가 또 미혹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7장에서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하시며 "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데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메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니라"(눅17:1-3)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어린 양들을 실족시킨 일을 말합니다. 양을 먹이는 일에 불충실하면 그 양들은지식이 없어 사단의 덫에 금방 걸리고 말 것입니다. 오늘 주께서 말씀하신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7:23) 하신 말씀에 대한 의미를 주의 깊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메시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주님으로도 실족당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시대의 정황을 설명하여 "이 세대의 사람들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눅7:31) 하시며 장터에서 아이들이 관혼상제의 놀이를 하는 중 서로 피리와 춤이 맞지 않고 애곡과 호곡이 서로 맞지 않는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판단의 기준이 정확한 지식에 있지 않고 어떤 공식에 의존하고 있는 비유를 풍자하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어찌 관혼상제의 그 기쁨과 아품을 온전하게 표현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믿음의 나라는 인간이 정한 공식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을 어떤 신학의 잣대로 재려 한다면 당신은 평생 그리스도를 만날 수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7:35) 하셨습니다.

백부장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어떤 이적을 일으킨 소문에만 의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알고 있던 메시야의 계시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그곳에 부임한 이후 유대인의 종교에 관심을 갖고 로마군영에 비치된 유대인의 경전인 율법서와 예언서를 읽었을 것입니다. 또 그는 성경 말씀속에 기록된 불가사이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역사들을 중동의 세계사 속에서 확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하나님의 세계를 체감하는 믿음이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였으며 또 그 하인을 사랑하기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암시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3장14절에는 군병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아 왔음을 기록하였고, 7장 29절에서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 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을 향한 위대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9절과 30절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해서 알게 되느냐에 대한 정의를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어떻하여 믿음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느냐라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 중의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였음에도 거듭남에 대한 지식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께서는 바람이 불되 어디에서 불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하시며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식으로도 율법으로도 종교적 행위로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적 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로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물속에 들어 갔다는 것만을 말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다음은 누가복음 7장 마지막 문단에 나오는 죄인된 여인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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