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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6) 믿음의 위치

이요나 2007. 2. 14. 14:10
구원론(6) 믿음의 위치

(눅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이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우리는 앞에서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나타는 믿음의 형태를 살펴 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들께서 구원론을 말하면서 자질구레하게 성경을 펼쳐 믿음의 형태까지 언급하느냐 하실지 모르겠지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란 진리 가운데 전재된 믿음은 이 땅의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돈과 지식과 명예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가복음 7장에서 살펴보는 백부장의 믿음과 죄인된 한 여인의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천차만별한 이 땅의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있느냐를 단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살펴 볼 예정입니다만 복음서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구원의 이야기가 기록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모두 그 시대에 있었던 일들이지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지루하시겠지만 나의 자질구레한 설명을 용납하여 주십시요. 자 이제 여러분은 누가복음 7장36절을 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보고자 하는 죄인된 여인의 믿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여인은 백부장과 같은 지위적 환경도 지식도 갖지 못한 여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은 창녀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유대인 중에서 어떻게 창녀가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창녀였던 아니던 성경은 그녀를 죄인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을 초청한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속이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늘 자기를 시험하며 조롱하는 집단의 초청에도 마다하지 않고 가셨으니 말입니다. 주께서 그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실 때 죄인인 한 여인이 향유 담은 옥합을 들고 예수님 뒤로 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주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었습니다. 참으로 모든 시간을 정지시키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은 이 여인을 보며 "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더면 자기를 만지는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그 시대 청렴결백을 주장하며 가장 의인이라 칭하는 바리새인이 어떻게그 여인을 알고 있었으며 또 그러한 죄인을 어떻게 집에 들였는지 의심을 해 볼만합니다. (전승을 따르면 바라새인은 이 여인과 관계가 있었다고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이란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죄란 법률적인 용어입니다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 죄란 종교적인 용어였습니다. 원래 죄란 빗나간 화살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기준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롬7:7)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만약 율법이 없었다면 자기가 행한 일들이 죄인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3:19)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죄와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만 그것은 갈라디아서 강해때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오늘은 누가복음에 나타난 구원의 믿음의 형태를 살펴보는 관계로 대력적인 부분만을 터치하겠습니다.

죄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적 기준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란 의식은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만 감각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방인의 세상은 죄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이방인은 처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율법이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죄는 하나님과 관계가 아니라 집권자가 정한 도덕과 윤리적 법률에 따라 죄를 적용하였습니다 . 이것은 오늘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오늘 복음서에 기록된 이 여인이 로마에 태어났다면 창녀는 직업이지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사실 그 시대에서는 통치자들로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창녀들이 판을 치던 시대였습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창녀나 술집 종업원들을 죄인이라 부르면 이건 인권에 관한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돌로 맞아 죽을 중대한 범죄요 이스라엘을 더럽히는 누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율법을 자기들의 기준에 맞게 개조하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지위와 재물이 있는 자들은 그 무엇을 해도 합당하였고 생존경쟁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율법을 적용하여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똑 같은 범죄를 짓고도 한 여인은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창녀가 되고 그녀와 함게 음행한 사람은 자기의 지위에 그대로 있어 오히려 그를 죄인이라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남자는 돈을 주고 인생을 즐긴 것이되고 여자는 돈을 받고 몸을 팔았으므로 음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범죄한 바리새들은 자신이 죄인이란 의식을 갖지 못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종교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의인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람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의식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여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것은 그가 영적으로 하나님을 채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하나님을 채감한다면 그는 바로 회개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단번에 주신 구원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누가복음 7장 29절과 30절에서 언급된 세례요한의 침례는 그 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인간의 죄를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의 형테 속에 발견된 죄의 문제를 언급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직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을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복음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며 그들을 주의 은혜 가운데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악한 영적 사슬들을 끊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눅룩없는 하얀 가루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를 믿을 때 그의 은혜로 모든 죄에서 용서 받은 의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 앞에 여전이 죄인으로 회개하여야 하는 우리의 심령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요?

만약 내가 주의 온전한 거룩함에 들었다면 우리는 주앞에 찬양하며 우리가 받은 주의 은혜로 인하여 주의 의를 선포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탄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주 앞에 죄인이란 말입니까? 이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다시 범죄한 우리는 아직 주의 자녀의 신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을 때에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고후6:18)는 새언약 속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은 아무도 끊어 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보장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아직도 범죄한 심령으로 회개를 하고 있어야 하나요? 나는 당신에게 아직 회개의 시간이 남아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주의 인내하심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종말에 사는 우리를 향하여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께서 오시리라 하시는 그날이 홀연이 임하여 거룩한 자들을 신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4) 권고하였습니다.

저는 주께 헌신된 삶 속에서도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죄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역자들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이글을 쓰는 나 자신도 하나님의 자녀로 도저히 용서를 받지 못할 범죄를 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심령은 이 글을 쓰면서도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영혼이 그의 거룩한 진리의 말씀 가운데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최근 어떤 형제가 음행은 죄인데 술과 담배는 죄가 아니라고 말하며 내가 전하는 복음은 거짓복음이라고까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아직 깨닫지 못한 심령으로 하나님의지식에 이르지 못한 것을 알기 때문에 주께서 친히 권고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그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던 그 아이들이 불과 몇개월의 만에 그처럼 잘못된 생각 속에 사로잡히게 된것이 무엇때문일까 생각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담배는 죄가 될 수 없다는 의식이나, 자위는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성경을 받아드리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범죄의 사실들을 다시 율법적으로 조목조목 헤아려 자기 합리화 하려는 생각입니다. 만약 이들이 다시 율법적인 조항에 의지하여 자신의 행위의 죄들을 인식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기록한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의 이런 변론를 가리켜 구원이 이르는 믿음은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것은 지혜요 지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하였거늘 안다는 것 조차 지식입니다.

우리가 만약 지식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려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지식의 정도에서 소경 코끼리 다리만지는 답변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데에도 지식이 필요하거늘 지혜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데 무엇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식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무지몽매로서 멸망을 자초하는 지름길임을 기억하십시요.

먼저 우리는 성도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나는 아버지께 보고들은 것을 너희에게 말한다 하셨는데 그분이 성경을 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접어 두십시요, 누가복음에는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기록되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것이면 우리는 그 은혜의 법 가운데서 기쁨과 평강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당신의 평강이 당신의 삶 전체에 미치지 못하고, 또 아직도 거룩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갈 수 없다면 당신은 다시한번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한 성경의 지식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며, 당신의 심령 가운데서 성령의 탄식을 듣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주께서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날 당신의 믿음이 거룩한 품성에 이르러 모든 육신의 허물로부터 벗어나와 오랜세월 은혜로 당신을 섭리하신 성령의 인내를 체험하고 있다면 이제 곧 당신은 귀한 하나님의 정결한 그릇이 되어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의 복음과 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의 기업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라' 하셨습니다. 또 이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세상의 가치와 율법이 아니고 하늘로 구름을 타고 하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준이며 의이며 거룩함입니다. 성경은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전1:30)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것입니다.

만약 믿는 당신이 예수님께서 담배를 피워도 천국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 생각되면 당신은 스스로 율법의 시대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담배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기록할 필요조차 없는 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마초도 카페인도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것들이 악한 영들의 영적 매개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술을 가지고 변명하려 할 때 성경에서 술을 금하지 않고 술 취하지 말라고 한 것은 술은 음식으로 우리의 삶의 노고와 기쁨을 표현하는 매개체이며, 또 아품을 치료하는 약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담배는 백해무익한 것으로 인간의 정신을 몽롱케 하고, 초조 불안케 하며, 그 생각들을 악의 세계로 이끌어 가며, 신체를 해치며 환경을 오염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담배는 하나님과 대화의 기관인 입을 더럽혀 영적인 통로인 믿음의 기도를 막는 악의 요소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술을 마셔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활이듯이 술 또한 풍요한 삶의 노래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위로의 잔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술을 왜 마셨는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잔치집에서 포도주를 마셨으니 나도 잔치집에서 술을 마셔도 된다 생각이라면 당신은 그 교만은 이미 술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성도가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여 식탁에 포도주를 놓아 두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술취함과 담배와 대마초와 마약은 그 어떤 것으로 구실이 될 수 없으며 이러한 것들은 세상에서도 금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시 오늘 언급합니다만 예수를 믿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신분이 어떻든 어떤 구원의 확신을 갖었던 담배를 물고 하늘나라 들어 갈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망령된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한 당신은 성결한 사람이 되지 못하며 또 당신은 당신이 의인된 의로움을 증거할 구실을 얻지 못합니다. 당신의 의롭지 못한 모습들 때문에 당신의 가족의 영혼의 구원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시절 배알이로 고생할 때 어머니가 물려 준 담배가 시작되어 중학교때에 와서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하루에 세갑이고 네갑이고 줄 담배를 피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신학을 하면서도 해결되지 않았고 금식도 소용없었습니다. 제가 지금 깨달은 것은 담배는 세상의 악의 시초요 통로라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과 어울리는 사교의 시작은 담배와 술입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술좌석을 마다하지 않고 세상적인 모든 유혹에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누가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는 아직도 끊어내지 못한 다른 악들도 끊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는 다른 그 어떤것도 끊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담배로부터 해방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확신입니다. 또 어떤 교인들은 담배를 줄이고 주의 날까지 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는 결코 담배를 끊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담배는 그렇게 당신과 타협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생의 괴로움은 계속 될 것이고 담배는 당신의 은밀한 순간을 즐기는 쾌락의 길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바로 결단을 내셔야 할 것입니다. 담배의 존재가 당신과 그리스도 사이를 막게하여서는 않됩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담배 연기로 자욱하게 만들어서는 않됩니다. 당신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산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담배는 당신의 생각을 다스리는 악한 영적 존재이며 어떠한 구실로도 당신을 놓아 주지 않는 악의 뿌리입니다. 오늘 이 글을 보는 당신은 그리스도를 알던 그 순간에 받았던 첫사랑을 기억하십시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구원의 날이로다 하셨습니다. 이 글을 쓰는 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전정으로 당신들을 사랑하며 또 당신들을 위하여 심령을 기도합니다.

내가 이렇게 간절하고 엄하게 책망하는 이유는 내가 담배를 끊어내는데 예수를 믿고 신학을 하며 10년이 지난날에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옥길에서의 비참한 통로에서 내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발견한 순간이 오기까지 나는 담배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그리스도이며 우리의 믿음의 위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하고 있음을 명심하십시요, 거룩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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