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7) 믿음의 출발선
(눅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추석주간이 되었습니다. 나야 움직일 곳이 없는 사람이지만 가정을 가진 분들은 여러가지로 걱정이 되는 때입니다. 나라살림도 어수선한 차에 하늘 인심마져도 예전같이 않아서 아침에 흐린 하늘보는 것조차 민망스러스럽습니다. 모쪼록 하나님이 도우시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다니엘서를 끝냈습니다. 정말 카다란 산을 넘은듯한 기분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터 위에 뼈대와 골격을 갖추고 하나님의 집이 우뚝 섯으니 소선지서로 예쁘게 집단장을 하여 주께서 활짝 웃으시며 들어 오시도록 준비하여야 겠습니다.
다니엘서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하나님 앞의 의로운 사람 다니엘 단 한사람의 기도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영적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 천사를 이끌어 내었다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침몰되어 가는 우리 정치현실 속에서 비판과 한탄만할 것이 아니라 의로운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 주께 기도하여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누가복음 8장은 어쩌면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강해에서도 큰 은혜를 받았지만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가는 가운데 오묘한 하나님의 비밀을 다시 체험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지난번 누가복음 7장에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7:23)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적들을 보고 가르치심을 들으면서도 실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실족한 이유는 결국 그들의 잘못된 지식과 인식들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구원의 주 메시야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천사의 수태고지와 예언자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으면서도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지 못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누가는 1절에서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후란 7장의 말씀과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는 7장에서 믿음의 주체를 상실한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의 영적 실태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그들 뿐이 아니라 오늘날 은혜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우리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도 열두명을 거느리고 본격적으로 전도의 길을 나섰습니다, 지금까지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시적인 사역을 하셨지만 이젠 나름대로 체제를 갖추시고 각 성과 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님과 함께 나선 사람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와 함께 선 사람들은 갈릴리 어부출신을 주축으로 세금쟁이, 민족투쟁가 등 학벌은 물론 이름없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의 지지세력들이란 유대인 체제속에서 족히 비난 받을 만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누가는 2절에서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날 유명한 목사들이 해외선교나 전도집회를 나선다면 각 교회에서 내노라 하는 수석 장로들과 선교회장들이 앞을 다투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조직하신 복음전도단은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제자들은 그렇다치고 후원단체의 선봉에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와 그의 동료들이 서있다는 것입니다. 일곱 귀신이 일곱 종류의 귀신을 말하는 것인지 귀신의 최상급을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성경은 이 여인의 과거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여기에 소개되는 요안나와 수산나는 모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들로서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여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이 자기의 소유로 저희를 섬겼다는 말은 결국 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돈으로 복음 사역자들을 뒷바라지 하였다는 말이 됩니다.
요즘 정치판에서는 한창 검은 돈의 실체들로 온통 머리를 앓고 있습니다만 돈의 가치는 '얼마를 어디에 사용하였는냐'에 따라 그 가치가 들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인격에 따라 그 가치가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돈이란 묘한 매력을 갖고 있어서 그 쓰임 속에 인격을 잠재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악한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돈은 악한 일에 쓰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악에서 벗어나 의로운 길에 섰다면 그의 물질은 의로운 일에 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그 주인을 따라서 돈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어릿광대들 같은 집단을 이끌고 있는 예수는 흡사 이단괴수와 같았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그에게 나온 무리가 얼마나 큰 지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바다에 띄게 하신후 배안에서 설교를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나왔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 군중을은 지금까지 예수께서 하신 병고침, 귀신 쫓아냄과 같은 이적들을 보기 위해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전도여행을 위해 길을 나선 예수님의 첫설교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천국의 비밀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천국의 비밀'은 이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면 그들도 귀를 귀를 기우렸을 터인데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삶 가운데서 모두 알고 있는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5-8) 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벌리는 세기의 쇼를 볼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바다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정말 김빠지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때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 지어다"외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어두운 세력 가운데 사람들의 귀를 여는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하시지 않고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대하여 여러가지 각도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귀를 갖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를 갖고 있는 사람은 정말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요?
이 외침은 진정한 천국복음을 향한 사람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흥미를 잃고 모두 돌아가 버리고 오직 자기를 따르는 열두제자와 함께한 몇 사람들뿐이 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일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때의 심경이 얼마나 허탈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제자들은 이제 우리가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세상을 열어 갈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의기양양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께서 아무것도 보여 주시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니 모였던 사람들이 실망하여 투덜대며 돌아가자 허망해져 내심 예수님을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번개불이라도 내려는 기상천외의 쑈를 보여 주셨다면 그들을 사로잡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때의 제자들의 심경에 대해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13:10)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 속에는 목사들에게 커다란 신적요소를 요구하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또 실제로 많은 목사들이 사역 속에 나타나는 은사들을 이용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주께서 내게 어떤 능력을 주셔서 병을 고치고 예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갈보리채플로 몰려 들 것인데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3:8)하셨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바라고 헬라인은 지식을 구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신적 세계를 경험한 자들이며, 헬라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로 지식을 통하여 신비의 학문들을 터득하고 사회적 입지를 더해갑니다. 이것은 모두 자기들의 삶 속에서 알고 체험된 지식들을 따라 나타나는 비전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심리는 우리 교회 가운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근본 보수주의적 신학로선을 가진 교회들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일에 성경적인 가르침에 충실하려 하여 신적현상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오순절 계열 교회들은 성경 말씀보다는 신적체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균형을 가추지 못한 가르침으로 하여 보수주의적 교회 성도들은 도덕적이고 관념적 믿음의 성향이 나타나고 오순절 계열 교회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무지몽매한 그리스도인들로 보이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갈보리채플이 이 두가지 요소들을 모두 균형있게 수용하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며 제자들에게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를 바라시는 것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비밀'이란 오직 계시자의 입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수 없는 일들로서 누구든지 예수께 나오면 그 비밀들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비유'와 같이 가려진 '비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비유'란 '도달하다', '그것과 같다' '배가 항구에 닿다'와 같은 의미로서 어떤 설명을 그 대상들의 수준에 마추어서 알기 쉽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씨뿌리는 비유'는 이들에게 하늘나라를 가르치기 우해 가장 적합한 설명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어렵게 배우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성경을 배울 때도 한절한절씩 풀어서 가르치면 누구를 어린아이로 취급하느냐 생각하며 신학적으로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낮은 마음과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이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추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서도 나는 목사니까 나는 장로이니까 나는 권사이니까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느냐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내 이야기는 당신이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준비되 있는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단락의 말씀을 계속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눅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추석주간이 되었습니다. 나야 움직일 곳이 없는 사람이지만 가정을 가진 분들은 여러가지로 걱정이 되는 때입니다. 나라살림도 어수선한 차에 하늘 인심마져도 예전같이 않아서 아침에 흐린 하늘보는 것조차 민망스러스럽습니다. 모쪼록 하나님이 도우시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다니엘서를 끝냈습니다. 정말 카다란 산을 넘은듯한 기분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터 위에 뼈대와 골격을 갖추고 하나님의 집이 우뚝 섯으니 소선지서로 예쁘게 집단장을 하여 주께서 활짝 웃으시며 들어 오시도록 준비하여야 겠습니다.
다니엘서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하나님 앞의 의로운 사람 다니엘 단 한사람의 기도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영적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 천사를 이끌어 내었다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침몰되어 가는 우리 정치현실 속에서 비판과 한탄만할 것이 아니라 의로운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 주께 기도하여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누가복음 8장은 어쩌면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강해에서도 큰 은혜를 받았지만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가는 가운데 오묘한 하나님의 비밀을 다시 체험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지난번 누가복음 7장에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7:23)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적들을 보고 가르치심을 들으면서도 실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실족한 이유는 결국 그들의 잘못된 지식과 인식들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구원의 주 메시야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천사의 수태고지와 예언자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으면서도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지 못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누가는 1절에서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후란 7장의 말씀과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는 7장에서 믿음의 주체를 상실한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의 영적 실태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그들 뿐이 아니라 오늘날 은혜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우리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도 열두명을 거느리고 본격적으로 전도의 길을 나섰습니다, 지금까지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시적인 사역을 하셨지만 이젠 나름대로 체제를 갖추시고 각 성과 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님과 함께 나선 사람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와 함께 선 사람들은 갈릴리 어부출신을 주축으로 세금쟁이, 민족투쟁가 등 학벌은 물론 이름없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의 지지세력들이란 유대인 체제속에서 족히 비난 받을 만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누가는 2절에서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날 유명한 목사들이 해외선교나 전도집회를 나선다면 각 교회에서 내노라 하는 수석 장로들과 선교회장들이 앞을 다투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조직하신 복음전도단은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제자들은 그렇다치고 후원단체의 선봉에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와 그의 동료들이 서있다는 것입니다. 일곱 귀신이 일곱 종류의 귀신을 말하는 것인지 귀신의 최상급을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성경은 이 여인의 과거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여기에 소개되는 요안나와 수산나는 모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들로서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여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이 자기의 소유로 저희를 섬겼다는 말은 결국 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돈으로 복음 사역자들을 뒷바라지 하였다는 말이 됩니다.
요즘 정치판에서는 한창 검은 돈의 실체들로 온통 머리를 앓고 있습니다만 돈의 가치는 '얼마를 어디에 사용하였는냐'에 따라 그 가치가 들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인격에 따라 그 가치가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돈이란 묘한 매력을 갖고 있어서 그 쓰임 속에 인격을 잠재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악한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돈은 악한 일에 쓰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악에서 벗어나 의로운 길에 섰다면 그의 물질은 의로운 일에 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그 주인을 따라서 돈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어릿광대들 같은 집단을 이끌고 있는 예수는 흡사 이단괴수와 같았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그에게 나온 무리가 얼마나 큰 지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바다에 띄게 하신후 배안에서 설교를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나왔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 군중을은 지금까지 예수께서 하신 병고침, 귀신 쫓아냄과 같은 이적들을 보기 위해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전도여행을 위해 길을 나선 예수님의 첫설교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천국의 비밀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천국의 비밀'은 이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면 그들도 귀를 귀를 기우렸을 터인데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삶 가운데서 모두 알고 있는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5-8) 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벌리는 세기의 쇼를 볼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바다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정말 김빠지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때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 지어다"외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어두운 세력 가운데 사람들의 귀를 여는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하시지 않고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대하여 여러가지 각도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귀를 갖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를 갖고 있는 사람은 정말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요?
이 외침은 진정한 천국복음을 향한 사람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흥미를 잃고 모두 돌아가 버리고 오직 자기를 따르는 열두제자와 함께한 몇 사람들뿐이 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일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때의 심경이 얼마나 허탈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제자들은 이제 우리가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세상을 열어 갈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의기양양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께서 아무것도 보여 주시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니 모였던 사람들이 실망하여 투덜대며 돌아가자 허망해져 내심 예수님을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번개불이라도 내려는 기상천외의 쑈를 보여 주셨다면 그들을 사로잡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때의 제자들의 심경에 대해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13:10)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 속에는 목사들에게 커다란 신적요소를 요구하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또 실제로 많은 목사들이 사역 속에 나타나는 은사들을 이용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주께서 내게 어떤 능력을 주셔서 병을 고치고 예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갈보리채플로 몰려 들 것인데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3:8)하셨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바라고 헬라인은 지식을 구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신적 세계를 경험한 자들이며, 헬라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로 지식을 통하여 신비의 학문들을 터득하고 사회적 입지를 더해갑니다. 이것은 모두 자기들의 삶 속에서 알고 체험된 지식들을 따라 나타나는 비전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심리는 우리 교회 가운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근본 보수주의적 신학로선을 가진 교회들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일에 성경적인 가르침에 충실하려 하여 신적현상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오순절 계열 교회들은 성경 말씀보다는 신적체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균형을 가추지 못한 가르침으로 하여 보수주의적 교회 성도들은 도덕적이고 관념적 믿음의 성향이 나타나고 오순절 계열 교회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무지몽매한 그리스도인들로 보이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갈보리채플이 이 두가지 요소들을 모두 균형있게 수용하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며 제자들에게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를 바라시는 것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비밀'이란 오직 계시자의 입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수 없는 일들로서 누구든지 예수께 나오면 그 비밀들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비유'와 같이 가려진 '비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비유'란 '도달하다', '그것과 같다' '배가 항구에 닿다'와 같은 의미로서 어떤 설명을 그 대상들의 수준에 마추어서 알기 쉽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씨뿌리는 비유'는 이들에게 하늘나라를 가르치기 우해 가장 적합한 설명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어렵게 배우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성경을 배울 때도 한절한절씩 풀어서 가르치면 누구를 어린아이로 취급하느냐 생각하며 신학적으로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낮은 마음과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이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추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서도 나는 목사니까 나는 장로이니까 나는 권사이니까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느냐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내 이야기는 당신이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준비되 있는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단락의 말씀을 계속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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