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바로 프레스바이플(http://www.pressbyple.com/) 이기덕 기자와 이태원 거리를 탐방했다.
몇년전에도 이태원을 방문한 일이 있었지만 작정하고 거리탐방을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때 이태원 거리를 장악(?)했던 내게 있어 이태원 외출은 두려움과 떨림의 시간이었다.
더우기 프레스바이플 기자와 함께 이태원 거리를 탐방한다는 것은 마치 김정은이와 박대통령이 워싱톤을 걷는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이계덕 기자가 몸담은 프래스바이플은 어쩌면 내가 지향해온 철학, 이념 노선과는 전혀 상반된 극진보 성향의
소셜미디어로서 나와는 물과 기름의 관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계덕 기자를 만난 것은 지난 4월 프레스바이블에서 운영하는 시사토크 쇼 [시사어그로 4화]에 초대로 시작되었다.
동성애를 반대라는 목사가 극진 계열의 미디어 토크쇼에 출연하는 것은 심각한 안티들의 공격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계절을 살고 있는 내가 두려워야할 대상은 교회 밖에 아니라 교회 안에 있었다.
처음부터 세상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과 철학과 사상과 이념을 갖고 공존하도록 구성되었으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신 지상명령은 더이상 벽장 속에 감긴
볼멘 소리가 되어서는 않될 것이다. (그동안 나는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 참으로 속좁은 꼴통이었다)
양념갈비 식사로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서로의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는 공통된 분모가 있었다.
동성애라는 주제만을 놓고 보면 극과 극을 치닫는 상반된 논리를 갖고 있지만 이요나와 이계덕이 아무꺼리낌없이 웃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영적 진리가 전재되어 있었다.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이방인도 아니요 유대인도 아니며 목사도 아니고 일반신자도 아닌 그리스도의 형제였다.
6시에 해밀톤호텔로 시작된 우리의 외출은 이테원의 하렘가 소방소 골목을 거슬러 올라 갔다. 건물과 거리의 구조는 30여년전 내가 이 거리를 접수하던 때와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분명하게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 첫째는 영적배경이었고 둘째는 거리의 사람들이었다.
35년전 내가 이 거리에 진을 치고 있었던 시절 이 골목은 미군들을 위한 환락가였다. 크고 작은 클럽들이 모두 미군들을 유흥을 위해 준비 되어 있었다. 한국인들을 위한 춤추는 환락의 거리는 이태원 언덕 넘어 한남동으로 밀려나 또다른 환락의 거리로 조성되고 있었다. 그당시는 미군들과 한국인들의 유흥의 문화가 공존하지 못하였다. (이태원의 소방소 골목은 늘 윤락의 거리였다)
그 당시 미군들의 환락가 속에 유일하게 공존한 새로운 시작이 있었다면 게이바였다. 그 고통의 해산이 내가 세운 열애클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죄스럽고 21세기의소돔성 문앞에 고통하는 롯이 된듯싶다.
오늘날 이태원 골목에서 술취한 미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 대신에 검은 두건을 두른 여인들, 도포와 같은 긴 옷을 입은 이슬람교도들의 행열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제 이 골목은 더이상 서양의 거리가 아니라 중동의 하렘가를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다. 건물 옥상에는 이슬람 교도를 알리는 붉은 깃발이 한집건너 나풀대고 있었다. (붉은 깃발은 흡사 무당집 골목과도 같다).
소방소 골목을 타고 셋길로 들어서자 작은 클럽과 카페들이 금요일 밤을 불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8시가 되면 일제히 문을 열기세이다.
목사의 신분으로 선득 들어설 곳을 찾지 못한 나는 이계덕 기자를 데리고 나의 흔적을 찾아 보광동 입구 열애클럽이 있는 건물로 향하였다. 버스정거장 앞의 한라약국은 내가 알고 있는 여주인이 백발의 머리로 지키고 있었고 열애 옆 건뭉의 2층의 장미 미장원은 나와 동년배가 된 주인 아주머니가 나를 기억하고 반겨 주었다. (서로의 얼굴 속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보는듯했다)
미장원에는 30여년 전과 같이 낯 익은 중년의 게이들이 이태원의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년의 아이는 30년전 18살로 이태원에 발을 딛어 내가 가장 아끼고 예뻐하던 M이였다. 오십이 넘어 아직도 거울을 마주한채 진한 화장을 하고 있는 M을 보며 나는 내가 뿌려놓은 고통의 열매를 먹는듯하였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중년이 다되었을 이름들의 안부를 물으며 나는 이 이름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했다.
미장원을 나온 우리는 다시 소방소 뒷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계덕 기자가 간혹 찾는 작은 카페의 샷터는 반쯤 올라 있었다. 이기자는 나를 데리고 카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입구문 앞 계단에 걸터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밤을 준비하는 분주한 종업원들... 그렇게 우리는 흘러 지나가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 20대 남짓한 외소한 청년이 반쯤 올려진 셧터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나왔다. 우리와 우연이 눈이 마주치자 청년은 나를 알아보고 안녕하세요 하고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해왔다. 졸지에 인사를 받은 나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아시나요?'하고 묻자 그 청년은 목사님은 저를 몰라고 저는 목사님을 알아요,, 언젠가 다음 카페에서 상담을 한 일도 있어요 하고 내 손을 잡았다.
갑자가 길잃은 내 아들을 만나는 것 같았다. 그 청년은 마치 전설을 보는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청년은 내게 자신도 총신에 다녔었다고 한다. 무슨 말을 할수 없어 청년의 손을 마주 잡고 마주한 순간 그 얼굴에 서린 고통이 나를 슬프게 했다.
이 순간 내가 이 청년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겨우 나는 "갈보리채플이 여기서 2정거장 밖에 않된다. 주일날은 우리가 만나자!" 하며 명함을 건네며 이름을 물었다. (이 청년의 이름은 곧바로 내 기도 수첩에 기록해 놓았다)
이 아이를 천국에서 만날 때까지 내 입술에서 나의 기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이 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는 내가 다시 이 거리의 전설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2013.6월 7일. 금. 8시 이태원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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