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한음성

(누가복음10:2)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 주소서

이요나 2019. 7. 13. 12:02

(누가복음10:2)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 주소서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우리는 9과에서 사도들의 시대 곧 오늘날 우리 교회시대를 미리 보았다. 주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상에 올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성적인 천국을 미리 보이셨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초월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이다. 사도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이 날에 소망을 두고 있지만 아직 그리스도의 날은 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께서 세 제자와 함께 땅에 내려오시니 복음사역 현장에서는 세상의 악취가 풍기기 시작하였다.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귀신도 쫓아내지 못하면서 신학자들과 교리논쟁에 정신이 팔린 제자들, 서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교회들, 자기들과 서로 다르다고 하여 배타적인 교회들, 자기들의 감정을 따라 은사를 남용하는 잘못된 사역자들, 이들은 사실 복음사역자들이 아니다. 설혹 이들이 주께 부름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들은 더러운 영들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주님은 9장 말미에서 세 종류의 사역자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불행하게도 셋 중에 둘은 택함받지 못한 자들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타락의 원인은 주께서 부르시지 않은 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목적을 따라 목사와 교사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 보내신 70인 제자들을 본다. 이들은 이름도 없고 그들의 출신내용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제자들은 칠십이라는 완성의 수에 들은 자들이다. 주님은 이들이 세상에 나갈 때에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말씀하셨다. 부족하지만 나도 이들 속에 거하고 싶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주께서 친히 가시고자 하는 각동 각처로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도 두 사람씩 짝지어 보내셨다. 우리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주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회복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또 눈먼 자와 귀머거리를 고치신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 청년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 이들은 모두 무엇을 하였을까? 군대귀신에 집혔던 자는 이미 데카볼리 일대의 전도자가 되지 않았던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을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유대인에게 칠십의 숫자는 매우 의미 있다. 출애굽 때 모세는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70인 장로를 두었고(11:16,17) 이들은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통치기구인 산헤드린이 70인으로 구성되었다.

 

주님은 이들을 보내시면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추수할 일꾼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셨다. 그러므로 이들은 추수의 일꾼들인 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타락한 교회시대의 말미에 나타날 추수꾼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있지 않은가?

 

주님은 이들을 보내시면서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3)하셨다. 그만큼 세상은 악에 물들었고 이들은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할 뿐이다.

 

칠십인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아직도 이들의 후예가 이 땅에 있음을 믿는다. 이들은 알곡을 창고에 거두기 위해 세상 끝에 보냄을 받은 추수꾼들이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러나 귀신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하셨다.

 

21절에는 흥미로운 말씀이 기록되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기도하셨다.

 

이 기도는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이 일은 어쩌면 교회시대의 말미에 있을 일이 될 것이다. 부름을 받지 않은 자들의 헌신으로 교회는 날로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서로 변론과 논쟁에 휩싸이고 서로 배타적인 관계 속에서 사랑이 식어가고 은사가 남용될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들을 보시며 종용이 말하여 너희의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3,24) 하셨다. 여기서 종용히라는 말은 공개적이 아닌 개인적인 개념이다. 이로서 우리는 주께서 이들에게 특별한 영안과 들을 귀를 주셨음을 알 수 있다. (이요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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