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갈라디아강해

(갈1:9)무엇이 다른 복음인가?

이요나 2003. 12. 15. 16:27

(갈1:9)무엇이 다른 복음인가?



(갈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이제 갈라디아서 두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나는 갈라디아서를 새롭게 살펴보면서 또 다른 감회에 젖었습니다. 사실 나는 지금부터 사오년전에 목회자 세미나를 통하여 갈라디아서를 강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목회자들 사이에 갈보리채플 강해설교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저는 동경에 있는 아카시 기요마사 선교사와 함께 오륙십명의 사역자들과 함께 갈라디아서를 세미나를 갖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쥐구멍으로 들어 가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당시 나는 조급하여 설익은 밥을 그릇에 퍼놓았던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 당시 나는 갈라디어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헌신자들이 말씀을 사모하며 여기저기 찾아 다니며 성경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느낀 것은 그들은 교회성장을 위한 설교방법을 찾아 다녔던 것이지 성경의 진리를 찾고자 귀를 기울였던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면 그렇게 쉽게 말씀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앞에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증으로 인사를 대신한 바울이 다짜고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바울이 얼마나 격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자신이 온 몸과 뜻을 다하여 심혈을 기우려 가르친 사람들이 자신이 가르치지 않은 다른 방향으로 돌아 섰다면 그 허망함과 배신감이야 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성경의 "다른 복음을 좆는 것'이라 기록된 부분을 킹제임스 성경은 '옮겨가는 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메타티테미'는 군사용어로서 자신의 충성을 바꾼 사람들 즉 변절자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으로 바울이 개척한 갈라디아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변절하였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에 대한 변절이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와 나의 말을 부인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아도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받지 못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에 대한 인간적인 배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가장 친한 친구나 동료들로부터 배신을 받아 본 일이 있습니까? 배신이란 정말 견디기 쉽지 않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악한 세월 속에서 배신은 길바닥에 널려있는 돌뿌리처럼 도사리고 있는 우리의 삶의 덫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인간적인 배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에 대한 배신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은혜란 부르신 자들에게 나타난 최고로 아름다운 매력으로서 그의 긍휼하신 인애를 따라 내리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고대 헬라인들은 오직 진리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신비의 지식이라 생각하여 많은 선생을 통해서 철학적 학문을 터득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음의 관계는 같은 수식안에 포함된 말씀인 것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언급 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정의하여 '다른 복음은 없다'고 전재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유일성을 말한 것으로 하늘 아래 다른 해는 없다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성경은 한 분이신 하나님, 오직 하나이신 그리스도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오직 하나뿐인 진리의 성령이 있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오직 하나인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다른 복음' (another)이란 말을 설명하기 위하여 헬라어 '헤테로스'(different)와 '알로스'(a second)라는 의미의 '다른'(another)이란 형용사를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너희는 다른 복음 즉 '헤테로스'(different)로 돌아서고 있다'라고 말한 것이고 7절에서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복음 즉 '알로스'(a second)가 아니다'라고 말하여 갈라디아 교회가 전혀 다른 복음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주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설명하실 때 '알로스'를 사용하여 자기와 또 다른 분이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란케 한다'는 말은 '선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교사들의 잘못된 지식으로 충동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최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같지 않은 말들을 지어내어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하는 일들을 보면 마치 술취한 말처럼 앞뒤 분간하지 못하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일들은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고질병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이방교회의 전초지 안디옥 교회에 유대에서 온 바리새인 중에서 믿은 사람들이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은혜의 복음에 모세의 할례를 추가하려는 잘못된 지식이 들어 왔습니다. 결국 이 일은 교회 가운데서 격론하여 초대교회의 본거지인 예루살렘 공회에 상정 되었습니다(행15장 참조)

이 때 많은 사람들의 상반된 논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일어나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행15:7-9)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복음 사역을 위한 주의 택하심을 언급한 것입니다.

계속하여 베드로는 교회 중에 만연되고 있는 잘못된 복음을 바로잡기 위해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라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로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행15:24,15)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변질 시키려는 무리들을 가리켜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8.9절)라고 아주 강한 말로 경계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먼저 '우리'와 '너희'의 관계를 언급하였습니다. '우리'와 '너희'는 하나님의 뜻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하나 된 수직과 수평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나' 라고 말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는 무리 중에 사도들까지 포함될 수 있음을 시사하였습니다. 이미 사도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저주를 받아 멸망의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도라 할지라도 잘못된 복음에 빠질 수 있음을 언급한 것입니다. 또 '천사'까지도 언급하므로 이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문제임을 상기시켰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저주'라는 단어는 헬라어 '아나테마'(anathema)입니다. 이 단어는 아간이 감추었던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저주가 확정된 사물과 사람들을 말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복음을 변질 시키려는 그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원래 '복음' 이란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기쁜소식'을 전달하는 자에게 돌아가는 보답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원리에서 생각할 때 복음의 시초는 하나님이며 그리스도이며 그의 보내신 종 사도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기쁨은 복음을 전한 자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제가 갈보리채플에 온지도 벌써 십년이 되었습니다. 나는 갈보리채플에 오기전 오랜 세월동안 어느 다른 교회를 섬겨왔었습니다. 그 당시 나의 열심은 정말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유대교에서 행한 것처럼 앞뒤 분간 하지 못하고 달려 나갔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 당시 나의 믿음이란 교회 생활 속에서 행함으로 평가받는 것이었습니다. 주일을 섬기고, 남보다 봉사하고, 남보다 십일조를 많이 내며, 남보다 더 많은 예배를 드리고, 전도대열에 나서고 기도원에 다니고 때때로 금식하는 그 열심으로 교회는 내게 직분을 주었고 믿음의 사람이라 평가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교회성장과 부흥에 관련하여 결국 헌금과 전도에 귀착되어 성도들간에 경합이 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성경 전체의 말씀을 살펴 볼 필요도 없었고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습니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오직 "네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라"는 삼박자 축복의 메시지를 외우며 교회가 요구하는 것만을 하면 되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믿음의 척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복음이 아니였습니다.


내가 갈보리채플 사역자가 되어 한국에 온지도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사모하여 몰려 왔습니다. 그들을 보는 나 역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요?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우리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말씀을 사모하던 그들이 그렇게 쉽게 돌아 선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오히려 우리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설교만 해도 부족할 터인데 왜 성경에 기록된 책망과 저주의 말씀들까지 말하느냐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을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절)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노예가 만연된 시대로서 여기서 종이란 주인 안에서만 허락된 생존을 누리는 노예의 신분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시대를 따라서 변함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뜻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