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갈라디아강해

(갈3:3)교회도 가고 절에도 가려느냐?

이요나 2004. 1. 9. 11:30

(갈3:3)교회도 가고 절에도 가려느냐? [카운슬링 & 강해설교 특강]

(갈3: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오늘은 갈라디아서 3장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의 복음을 수호하기 위한 바울사도의 담대한 투쟁을 살펴 보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하는 베드로 사도라도 여러사람 앞에서 책망하였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진리는 투쟁의 역사 가운데 우리에게 이르른 것입니다.

바울은 2장 끝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선언하므로서 오직 주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진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증거하여 도전의 여지를 봉쇄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갈라디아 사람들의 미혹된 심령의 바로잡기 위해 갈라디아 교인들이 영적으로 잘못된 원인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 잘못된 이론들을 성경적으로 증명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여야 했습니다.

논리학의 4원칙
우리가 바울 서신을 통하여 발견할 수있는 이단 사설에 대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성경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위해 체계적인 랍비교육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헬라인들도 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랍비교육과 헬라학문을 함께 수렴한 바울은 그들이 제시하는 여러가지 모순된 이론과 지식들을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우리가 논리학을 말하고자 할 때 먼저 4가지 기본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긍정(확인)의 법칙으로 모든 사실의 진실은 그 자체가 드러냄을 토대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논리는 성경에서 찾아내야만 합니다. 두번째로 논리학은 모순(부정)의 법칙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모순의 법칙이란 무엇이든지 아닌 것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논리학의 세번째 근거는 양시양비 불가법칙입니다. 이것은 상반된 두가지 중 하나가 진실이면 하나는 거짓이라는 논리로서 중간입장 배제를 의미합니다. 네번째로는 충분한 사유의 법칙으로 모든 판단은 그 판단을 입증할 만한 충분한 근거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납적인 성경연구
우리가 또 성경을 논리적인 증거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추리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하나는 귀납적 추리이고 또 하나는 연역적 추리로서 귀납적 추리는 성경해석을 위한 것이고 연역적 추리는 성경적용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해석의 가장 큰 문제는 귀납적 성경연구를 하지 않고 연역적 적용을 하므로 성경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강력하게 주장한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증거하여 유대인의 오랜 역사 속에 뿌리내린 율법의 모순들을 정의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그러므로 저는 바울의 기록을 따라 귀납적인 해석을 하겠습니다.

심령의 확증과 영적유혹
바울은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를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들 앞에 이미 확증된 바 있는 복음의 주체와 또 하나는 그들을 미혹하고 있는 또다른 영적존재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아시아 고원지대의 이방인들로서 바울이 그들에게 이르기 전까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 눈에 밝히 보이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눈에 밝히 보인다'는 헬라어는 '프로그라페'(pregrephein)는 포스타를 붙인다는 의미로 사용되던 말입니다.

그당시 헬라사람들은 경매를 공고를 할 때나 또는 방탕한 자식의 부채가 아비에게 돌아 올 때 그 책임을 질 수 없음을 공고하기 위해 포스타를 내다 붙였습니다. 이것은 사실을 공고하여 자신에게 돌아 오는 불이익을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공고되어 확증된 것임을 먼저 밝혔습니다.

또한 우리는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바울의 말을 들을 때 하와의 마음을 훔친 간교한 뱀의 유혹(창3:1)을 떠올리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영적의식 속에 있는 '악한 눈'을 의식하고 이 글을 썼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잠언서 기자는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말며 그 진찬을 탐하지 말라'(잠23:6) 기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3장 서두에서 갈라디아 성도들 가운데 완연하게 나타난 복음의 사실을 부정하려는 영적 유혹을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사설에 빠져 들고 있습니까? 실제로 이단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종으로 삼으려고 광분하고 있습니다.

믿는자의 성령의 체험
바울은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은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믿음은 성령의 체험이 동반되고 있는 사실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부활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요엘로 말씀하신 성령의 약속으로, 주님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오순절에 이르러 하늘로부터 임한 강한 바람과 불의 혀같은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였습니다.

그후 성령의 능력은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성경이 이미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죄사함을 얻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 선언하였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 그들에게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그들 위에 성령이 임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또 베드로는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내려가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 왔음을 증거하였습니다(행10:44).

어디 이뿐입니까?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행19:6).

 

이와 같이 갈라디아에서도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했을 때 복음의 계시를 듣고 주를 믿는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 임한 영적체험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물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상반된 속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령과 육체가 서로 대적함을 언급하였으며 '너희가 육으로 살면 반듯이 죽으리라'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주신 성령의 체험을 받은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체험적 지식인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시작하다'와 '마치다'라는 말은 희생제사의 처음 행위와 희생제사를 완벽하게 끝냈을 때 사용하는 말로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그러한 행동은 마치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사로 시작하고 그 끝마침을 우상 앞에서 제사로 지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증거
바울은 4절에서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하고 되물었습니다. 이것은 함께 살면서 희로애락을 나누었던 사람들 사이에서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이 그렇게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래참은 가운데 인내와 절제로 많은 괴로움을 수반하여 왔습니다.

5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너희에게 성령을 (나누어)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기적)을 행하시는 (그분께서) 그 일을 율법의 행위로서 하시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하시느냐"(KJB) 물으며 그들의 삶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너그러움을 의미하는 헬라어 '코레기아'(choregia)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국가적인 재난시 거액의 기부금을 내던가 또는 결혼 서약시 아내를 보살피는 남편의 책임을 나타낼 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삶의 고통과 위험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신부를 보호하는 신랑의 모습으로 임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체험을 한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떠나 율법의 세계로 빠져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지식에 이르지 못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문제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