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6:18) 심령 안에 역사하는 은혜
(갈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마지막 장입니다. 특별히 2003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이 메시지를 나누게 되어 더욱 큰 은혜입니다. 신년 첫 목요일 저녁에 우리는 에베소서를 공부하게 됩니다. 이 메시지를 듣는 주의 자녀들에게 충만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갈라디아서 6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삶을 위한 바울의 권면이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명심보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신 믿음 가운데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우리의 육체 가운데는 악한 영들이 주관하는 육체의 소욕들이 있어 우리의 이성으로는 그것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고자 할 때 성령이 우리의 삶가운데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갈라디아서 6장에는 본질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6장 전체에서 11가지의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6장 서두에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의적인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어쩔 수 없이 짓는 실수와 같은 죄를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영적이고 그리스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일수록 도덕과 윤리적인 면에서 엄격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 서게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성도의 범죄를 용납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형제가 범죄하면 경계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바로잡고'라는 단어는 교정을 한다는 뜻으로서 치료와 관련된 말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주를 향한 베드로의 맹세와 또 그의 범죄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는 주께서 미리 경계 하셨음에도 주를 부인하여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너는 돌이켜 형제들을 굳건히 하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쉽게 맹세하고 쉽게 저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 우리의 온유한 심령은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절)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오직 사랑의 완성입니다. 먼저 우리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짐을 지기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합니다. 주님은 무거운 짊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인 것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서로 짐을 지지 않으려는 일이 지도자 층에 있을 수 있음을 경계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의 지도자들이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 하셨습니다.
3번째로 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 있지 아니하리니"(4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솔직하지 못하고 자랑을 일삼는 위선적 크리스챤들을 경계한 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자신의 생활이 썩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 자랑을 일삼기까지 합니다.
네번째로 바울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어쩌면 2절의 말씀과 반목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2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마땅이 저야할 짐을 서로 나누라는 것이며 5절에서의 짐은 자기의 생활을 위한 짐을 남에게 지우지 말라는 것입니다(행15:28).
여섯번째로 바울사도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하라"히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매우 좋아합니다. 한국교회를 보면 스승과 제자가 없어지고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만 앞으로 사역자가 되고자 하는 분들은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스승과 제자의 질서를 떠난 사람들을 향하여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9)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가 스승보다 클 수 없다 하셨고 또 제자가 열심히 하면 스승만큼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스승과의 질서를 언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제자를 통하여 확장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세상의 학문과 달라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계시된 말씀을 열어가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의 승계는 릴레이를 하는 선수들과 같아서 앞 선수의 바턴을 받지 못하면 나아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7절에서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니나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6절의 가르침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많은 이단들을 생각할 때 그들은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절) 하였습니다.
8번째로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선행'이란 문자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실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도하는 모든 사역을 통괄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피곤치 아니하면"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계획하고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 하는 일들은 피곤함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얼마나 하지 않아도 될 일에 힘을 빼고 있습니까? 결국 사역자는 물론 성도들까지 모두 지쳐서 떨어지고 말지 않습니까?
성령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위하여 중보하시며 위로와 권면과 치료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있어서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일을 행함에 피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최근 3년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성경을 보고 연구하고 또 나름대로 깨달은 바를 인터넷에 올려 왔습니다. 어떤 일이든 싫증을 쉽게 느끼는 내 성격에 이처럼 오랜 세월 지침도 없이 성경 강해에 몰두 하고 있는 나를 볼 때 스스로 놀랍기까지 합니다. 나는 이 일에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루종일 앉아서 이 일을 하느라 운동이 부족하여 요즘 다리에 힘이 없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낙심하지 말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낙심하지 말라'는 지치지 말고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저는 나의 하는 일에 피곤하지는 않지만 많이 낙담을 하였습니다. 3년동안 사무실에 앉아 성경을 연구하고 또 그것을 얼마 않되는 성도들과 또 우리교회 성도들도 아닌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나는 늘 내가 지금 이들에게 행하는 일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하고 생각하며 혼자서 울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일에 대한 수확을 언급한 것입니다. 성령이 하였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 수확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홉번째로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에 있는 선행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가정을 굳건히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을 굳건히 하는 일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물질일까요? 글세요. 저는 믿음의 가정은 이미 이 문제를 초월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가정이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위로와 권면과 교제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큰글자'는 갈라디어서를 바울 자신이 쓴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어떻게 처리하지 못하던 잘못된 가르침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의 율법을 병행시키려는 유대인들을 단호히 대처하는 바울의 담대함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복음을 해지는 일은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도들의 수장 베드로라해도 그가 복음을 따라 행하지 않았을 때 그 먼전에서 면책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단호하게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하였습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라는 말은 참으로 놀라운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다 말하며 내가 십자가와 함께 못박혔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지 아니하면 결국 아직 나는 세상과 타협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을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열한번째 권면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 규례를 행하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많은 법을 알고 있으면 무엇합니까? 행하지 않으면 돼지의 진주 목걸이가 아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열한번째의 권면으로 "이 후로는 누그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갖었노라"(17절) 하였습니다. 그동안 사실 바울은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받아왔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한 것뿐이 아니라 잘못된 지식을 따르려는 제자들도 포함된 말입니다. 바울의 괴로움은 대적하는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떠나려는 사람들의 태도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예수의 흔적을 갖었다고 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제 바울을 괴롭히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당신은 바울의 권면을 아멘으로 받아드리고 그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그의 성도들을 위해 기원한 축복이 당신에게도 임할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 아멘" 저또한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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