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갈라디아강해

(갈라디아4:28) 누가 약속의 자녀인가?

이요나 2007. 2. 28. 10:06

(갈라디아4:28) 누가 약속의 자녀인가?

 

(갈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오늘은 갈라디아서 4장입니다. 바울은 3장에서 믿음과 율법의 성경적 정의를 하였습니다. 바울의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부르심 속에 언약된 약속을 따라 온 것임을 강조하며 율법은 하나님의 부르신 사람들의 범죄함을 막기 위해 주신 것으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음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사람들은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에 바울은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물으며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스스로 답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먼저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범죄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율법을 지키게 하셨으나 결국 사람들로서는 그 율법을 지킬 수 없고 그 율법의 정죄로 말미암아 모두 죄인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3:22) 기록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범죄를 예방하고 또 그를 지키지 못함으로 하여 정죄한 사람들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믿음이 오기전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갈3:23) 말하며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율법이 몽학선생의 역활을 담당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은 신령한 것'(롬7:14)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3장 마지막 절에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갈3:26) 하였고 또 "너희가 그리스도에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9)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는 우리가 유업을 받을 자인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하여야 했습니다.

 

바울은 유업을 이을 자에 대한 효과적인 증명을 위하여 먼저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양식을 예로 들었습니다. 물론 근대에 와서는 이러한 생활 양식은 없어진 상태이지만 아직도 상류 사회에서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후견인 또는 가정교사를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었 종노릇하였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후견인이란 정치적 용어로서 대외활동을 위해 뒷배를 보아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의 부모를 대신하여 대외적인 대인관리 및 인격 보증에 관한 전반적인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또한 청지기란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의 역활로서 자녀의 재정관리와 가정생활을 위한 예의 범절과 등을 지도하는 가정교사와 같은 위치입니다. 헬라시대에서는 에페보스라는 성인식이 있어서 부모들은 후견인이나 청지기 밑에 자녀를 맡겨 18살이 되기까지 대외적인 인격수양을 담담하게 하였습니다.

 

또 로마시대에는 '리베랄리아'라는 성인식 의식이 있어서 14살이나 17살이 되면 아폴로 신에게 예물을 바치므로 성인식을 하였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12살이 되면 성전에서 성인식 의식을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도 성인식을 하셨음이 기록되었습니다.

 

성인식은 모두 각 나라의 풍습이기에 앞서 종교적 의식이였습니다. 자기들이 믿는 신 앞에 성인됨을 고하고 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3절에서 말한 '초등학문'(스토이케이온) 기본적인 학문 즉 1234와 같은 계단식 공식을 외우는 과정으로 헬라사람들은 후견인이나 청지기를 통해 자녀에게 헬라철학의 기본적인 지식들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하려 하심이라"말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우리가 율법아래 머물러야만 했던 것은 성경적 계시였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3장에서 너희가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복음의 기초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어 그때로부터 우리를 친히 가르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하고 죄와 의와 심판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요한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일을 알리시리라 기록하였으며(요14:16.26; 16:8,13), 그의 서신서에서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말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심을 증거하여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너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바란 어린자녀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사랑의 애칭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아닌 사람을 스스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의한 것입니다.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14)증거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7절에서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연히 받아야할 권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 교회가 하나님의 후사인 것을 누누히 가르쳤습니다.

 

로마서 8장에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독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라"(롬8:17) 하였으며, 에베소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엡1:5-11 참조)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장자 하나님의 후사인 우리가 입을 영광에 대하여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다리노라"(빌3:20,21)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9절) 책망하였습니다. 아는 자들이 그 아는 것을 무시하고 잘못된 것을 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동안 율법안에서 터득한 지식을 천한 초등학문이라고 격하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초등학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10절에서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하노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날이란 유대교의 안식일을 말하는 것이며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같은 절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해는 7년에 한번씩 돌아 오는 대안식년을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의 말을 상고해 보건데, 그당시는 교회가 탄생한지 1세기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또한 성도의 분포는 당연히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유대인들은 수천년동안 지켜운 율법과 함께 살아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에서 이 문제를 단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사람의 철학과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들을 경계하며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치 못하게 하라" 경계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히브리 교회를 향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과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을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5"2)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요즘에는 추수감사절이다 크리스마스까지 생겨나서 교회는 온통 세상사람들이나 하는 축제장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께서 크리스마스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알고도 크리스마스 축제를 행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삿상도 차려야 할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이러한 일들을 바벨론의 음행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내가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에 첫발을 들였을 때 사도의 위엄과 권위로 그들 가운데 온 것이 아니라 비천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으로 나타났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 무리한 전도여행으로 인해 심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더우기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선박을 이용하여야 하는 관계로 건조한 유대와 다소에서 자라난 바울로서는 습도에 약해 풍토병에 시달렸습니다. 바울의 질병이 심해지자 할 수 없이 해안지대를 떠나 고원지대로 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이 갈라디아였습니다.

 

바울은 처음 자신이 그곳에 당도하였을 때를 말하며 "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14절)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경우의 사람을 만나면 정말 그를 불쌍히 여기고 천사의 손길로 돕기를 기뻐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위치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아진듯 하면 아직 자신의 행위가 온전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자기와 자기를 아는 사람들을 부끄러워 하게 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과 바울의 만남은 정말 눈물겨운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온유한 심령으로 그리스도안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서자 스스로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고 거룩한 체하며 오히려 잘못된 길을 살아가는 사람들 편에서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합니다.

 

바울은 15절에서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하며 "내가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책망하였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과 첫 대면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첫사랑을 떠나 스스로 거룩함을 주장하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서 아직 벗어버리지 못한 세상의 악한 습관들을 엄히 경계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늘 바울 앞에 있으면 자신들의 위치가 죄인처럼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비는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을 책망한다 하였습니다.

 

과거 나는 나의 젊은 시절과 같은 고통의 시대를 지닌 젊은이들을 많이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정과 사회에서 오갈데 없는 그런 위치에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나의 과거의 악한 생활들을 알고 이었지만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자식처럼 대하였고 그들은 나를 스승과 친구와 아비와 같이 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가지 않아서 다른 곳에 나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었고 지금 나름대로 변모한 모습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서고자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그들의 육체의 약한 부분들을 용납하지 않고 책망하였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 사이에 들어온 잘못된 사람들 때문입니다. 바울은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요즘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교회 나가는 사람들에게 너무 열심을 갖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열심히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님을 언급하며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19-20) 하였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지식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도 전에 그들을 미혹하는 영들에게 이끌려 사람들 가운데 거룩한 자로 보이기 위해 스스로 율법의 행위에 붙잡혀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노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들을 다시 낳지 않으면 즉 다시 그들이 복음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로서 다시 낳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이란 이미 더러워진 속성을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개혁이란 결국 또 다른 개혁을 만들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미 영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면 이처럼 모두가 무너져 버리고 다시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새롭게 시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쌓았던 것을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처음 시작하는 것보다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이제 바울은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반문하며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여 신학적 중요한 지식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미 바울과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구약의 전반적인 성경공부가 끝났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즉 사라의 계집 종 하갈에서 낳은 이스마엘과 사라에게서 낳은 이삭을 언급하여 "하나는 계집 종에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습니다. 바울은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이미 창세기를 통하여 귀가 닳도록 들어 온 내용들입니다.

 

바울은 이 내용을 가리켜 "이것은 비유이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4-26)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쑈킹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들으면 일제히 돌을 들고 일어날 일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당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언급하여 그들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나은 계집 종 하가의 자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오늘날 성령과 축복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하고 있는 거대한 교단을 들어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 받을 수 없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세워진 교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도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갈라디아 사람들은 왜 이처럼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나서는 것일까요? 바울은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27절) 외쳤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새롭게 시작되는 복음의 시대를 바라보며 외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동시대에 살던 미가가 선지자는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 지어다"외치며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가운데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미5:2)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외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육체를 따라 난 계집 종의 아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증거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땅을 새롭게할 그리스도의 복음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처럼 오랜 해산의 고통을 언급하였습니다. 저는 10년 동안 한국에서 갈보리채플을 개척을 하면서 이제서야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의 기쁜 뜻을 따라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제 5장에서 뵙겠습니다. 평안하십시요. 그리고 자유자가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