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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3:8) 성경과 계시의 속성

이요나 2007. 2. 28. 10:10

(갈라디아3:8) 성경과 계시의 속성

 

(갈3:8)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믿음과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성취는 우리 교회의 가장 큰 핵심으로서 이것이 무너지면 그리스도의 은혜는 모두 헛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6,7절)라 선언하였습니다. 이같은 바울의 선언은 수천년 동안 주장해 오던 그들의 주장을 뒤집는 것으로 그 때까지 언급하지 않았던 새로운 주장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할례의 언약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함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의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성경적 논리는 복음이 선포되기 전까지 할례를 받으므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의 민족을 지배해온 신앙적 이념이었습니다.

 

바울의 위험

이제 바울은 유대인들과 그들에게 미혹당한 그리스도인들 앞에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야 했습니다. 바울이 이미 그들 앞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선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주장은 유대인을 모욕하는 것으로서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주장한 새로운 복음의 원리를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에 확증하여야만 합니다.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하듯이 이제 바울의 주장 앞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율법은 유대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표증하는 선민적 우월의 증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존심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됨에 있었으며, 그 증거는 그들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과 예배와 율법에 있었습니다(롬3:1,2; 9:4).

 

유대인들은 수천년 동안 예배와 율법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들의 자존심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 삶의 목표이요 생명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새로운 원리를 주장한 바울로서는 자신이 주장한 믿음과 율법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면 바울의 주장은 무너지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다시 율법의 행위로 인증을 받아야만 합니다.

 

성경의 계시

바울은 먼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8절) 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성경적 논리를 제시하는 것은 유대인의 주장도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논리의 확증은 둘 중에 하나는 진리이고 하나는 거짓된 것임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바울은 먼저 자신의 주장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고 성경에 미리 계시된 말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서두에서 이미 자신에 대하여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어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갈1:1)하였고 또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복음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 계시를 인하여 예루살렘에 올라 갔다고 증거하였습니다(갈2:2).

 

'계시'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과 뜻과 예정을 보이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일반적으로 창조로부터 천지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성과 지배를 알게 하신 '일반계시'와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택하시신 종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예정과 뜻을 보이신 특별계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성경의 말씀은 '계시'라는 것입니다. 계시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경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되고 성경의 영원성을 증명하게 됩니다. 만약에 성경에게 계시라는 의미를 빼어버린다면 생명은 그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계시의 속성

천지가 창조된 이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숨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리켜 생명의 말씀이라 하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음을 증거하는이유도 성경의 계시 때문입니다. 그당시 바울의 시대에서는 아직 계시의 말씀은 완성되지 않았고 성령에 의하여 사도들과 주께서 부르신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계시는 이제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히없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며 또 주라고 부르는 그 자체가 의심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이란 말이고 성경의 계시가 끝난는데 예수를 주라고 부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분과 나와 주종관계가 성립되어야 하는데 주종관계는 살아있을 때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남편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롬7:2)기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종관계는 주인된 사람이 그 살아 있어야 하고 또 주종관계의 계약이 휴효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성경의 계시가 끝났다고 한다면 성경은 더이상 우리에게 설득력을 잃고 기름부음이라는 말도 또 생명의 말씀이라는 의식도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의 말씀이라는 논리도 모두 허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었고 또 계시가 완성되었다고 할 때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어떤 역활이 되며 또 우리는 성경 속에서 완성된 계시를 어떻게 만날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성경의 계시가 끝나 더이상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게 되었다면 이미 완성된 계시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계시는 과거에서 오늘의 일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계시한 그날까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실 때까지 주께서 부르신 사람들 속에 성령으로 역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예수께서는 믿는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는 진리의 성령으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며,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신다 하셨습니다(요14:26, 16:13). 또한 사도요한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하였습니다. 이로서 오늘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그의 택하신 종들을 통하여 조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라고 선언한 바울의 새로운 논리를 확증하기 위해 바울에게 계시된 성경의 말씀을 함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바울의 증거를 따라 성경의 말씀을 살펴볼 때 아브라함과 하신 할례의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한 언약이지 의로운 백성이 되기 위한 언약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할례 이전 있었던 일로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창15:6)고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쩌면 생각하기에 따라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와 같은 그것이나 이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하겠지만 사실 달걀 논쟁도 성경은 닭이 먼저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짐승들과 가축과 기는 것과 새들을 지으셨다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해석의 우선순위

오늘 이 말씀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리라'(갈2:16)는 바울의 가르침과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는 야고보의 가르침과 같이 그 우선순위가 바뀔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고보의 행함의 가르침은 믿음을 온전케하기 위한 후속 조치인 것처럼 할례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인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해석은 항상 먼저 언급된 것에 원칙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상의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각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계시의 발견

오늘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다"(갈3:8)고 말한 선언 속에서 계시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2장의 말씀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즉 그를 의인으로 정하시기도 전에 미리 하신 말씀으로 바울은 지금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은 미리 말씀하신 것이라도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때를 따라 선포되고 그 말씀을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전달됩니다. 그러면 왜 그동안 그 말씀들이 가리워져 있었던 것일까요? 이것이 계시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고난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가리워져 있었던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완전하게 알 고 있는 사항도 그 당시 제자들에게는 가리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주께서 선포하신 성령의 생수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주석하였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성경을 읽다가 예레미야로 하신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이스라엘의 칠십년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기록한 글은 다니엘이 터득하기 전까지 수많은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제사장과 학자들에 의해 읽어 왔던 성경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계시는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 하나님의 때를 따라 설정된 것입니다.

 

성령의 약속

바울은 이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믿음의 후손들에게 미치는 성령에 약속에 대하여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라"(14절)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믿는자들의 증거이며 결과이며 복음증거의 역활이며 복음의 계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어러한 이유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기적)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3:5)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새벽예배로 당신의 기도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며 금식으로 당신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이 됩니다. 오직 성경에 계시된 그의 말씀을 듣고 성령안에서 기도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부디 다시 스스로 율법에 얽매인 믿음생활로 돌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에서 뵙겠습니다. 평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