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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2:17) 그리스도인의 의로움과 변화

이요나 2007. 2. 28. 10:13

(갈라디아2:17) 그리스도인의 의로움과 변화

 

(갈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 잠재의식과 영적상황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부분은 복음의 핵심이며 복음의 진리라고 선언될 바울신학 중 최고의 면류관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역대 신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던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에 관한 것입니다. 저의 짧은 지식과 견문으로 이 부분을 어떻게 서술해 나갈지 두렵기만 합니다만 성경의 기록과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피력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바울이 이방인 성도들 앞에서 행한 베드로의 위선적 행동을 책망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하려느냐"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바울의 책망의 말 속에서 베드로는 나름대로 이방인을 이해하고 있었고 또 유대인의 율법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베드로의 위선적 행동이 그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된 베드로의 위선된 행동은 오랜 세월동안 유대인의 의식 속에 잠재 되었던 생활의식이 돌발적인 상황 속에서 표출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으로 인도되기 전에 하늘로부터 보자기의 환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아직도 변하지 않은 고정관렴을 발견하였습니다. 더우기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돌발된 행동으로 가슴아픈 경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과 행동은 깨달음만으로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꾸중을 들으면서도 계속 같을 일을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 사람의 성격일 수 있습니다만 나 역시 아주 중요한 순간에 내가 원하지 않던 돌발적인 행동의 돌출로 정말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부끄러워했던 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상황은 우리의 잠재의식까지 침투하여 예기치 않은 돌발적인 행동들을 일으켜 믿음의 사람들 관계 가운데 변수로 작용하여 복음사역에 혼란을 일으킵니다.

 

2. 누가 죄인인가?(2:15)

바울은 베드로를 향하여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절)고 책망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돌발적인 행동과 달리 이러한 변수의 상황 속에서 논리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바울의 담대함과 사고력과 침착성은 정말 경탄할만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담대함과 일묘정연한 논리적 사고는 하루 아침에 생길 수 없는 것으로 진리의 깨달음 속에 터득된 삶의 지혜와 믿음의 경륜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나타나심인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이 선언은 지금까지 선민사상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유대인'과 '죄인'의 개념부터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은 이분법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여 자신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고 이방인은 구원받지 못할 죄인된 존재라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민의 택하심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때 그들의 주장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죄인'이란 '공동체의 합의된 규례와 윤리와 도덕을 해친 범법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죄'(히;하타=표적을 빗나가다)는 원초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간 인간의 상태로서 '죄인'이란 말은 오직 판결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천국 법정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여 '누가 죄인인가?' 하는 물음에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롬5:18)하였고 '의인은 없다'(롬3:10)고 정죄하였습니다. 다시말하면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죄되어 사망을 업으로 받은 상태입니다.

 

3. 두가지 개념(2:16)

바울은 16절에서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사용하여 자신들이 알고 있는 두가지 개념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상반된 복음의 진리를 언급하였습니다.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이 일은 사도행전 15장에 언급된 예루살렘 교회 협의회로부터 구원의 진리가 확정된 이후에 발생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는 고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로서 인간은 모르는 것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인간은 어떤 신적 존재를 믿을 때에는 어리석게도 자신도 모르는 것일수록 더욱 신비스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다" (암3:7)기록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의로움'은 거룩한 하나님의 인격과 품성을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속에 나타나는 제반 모든 행위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칭의'(Justification)를 설명함에 있어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는 수동태를 사용하므로 하나님의 속성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언급하였습니다. 따라서 '정죄'나 '칭의'는 거룩한 하나님과의 판결로서 천국 법정용어인 것입니다.

율법에 관하여는 3장에서 다시 공부할 것입니다만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성한 것(롬7:12)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므로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로운 행위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하였습니다.

 

4. 세가지 가정법(2:17,18, 21)

바울은 본문에서 세번의 가정법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칭의'와 '성화'를 설명하였습니다. 먼저 바울은 17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그리스도인의 범죄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바울의 의도는 '결코 그럴 수 없다'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칭의'(Justification)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의 변화 즉 '성화'(Sanctification)를 의도한 것으로, '칭의'는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간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로 옮겨지고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는 하나님의 판결로서 하나님이 그 주체가 되며 단회적이고 영원성인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과정 즉 '성화'(Sanctification)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한 전생애적인 것으로 그 주체가 보혜사 성령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하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라'(살후2:13)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이라고 말한 것은 아직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이루지 못한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 나타난 죄의 모습들로 하여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칭의'가 무효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8절에서 다시 가정법을 사용하여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든 것이라"(18절)말하여 하나님께서 죄없다 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헐어버린 율법이 다시 적용될 수 없음을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서 헐었던 것이란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는 율법을 말한 것으로 만약 율법을 다시 세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너뜨린 여리고의 성을 다시 세우는 의미를 내포한 것입니다(수6:26, 왕상16:34).

 

바울이 이처럼 가정법을 사용하여 강력이 주장한 이유는 우리는 이미 율법의 요구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19절)기록 하였습니다.

 

바울의 세번째 가정법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말하여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의 은혜의 영원성을 증거하였습니다. 여기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페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청산하시어 나로 의인이 되게 하였은 즉 내가 다시 범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없이하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5.생명의 재인식(2:19-21)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토대를 찬미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 고백 하였습니다. 이 짧은 글 속에 '산것'이란 단어가 네 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산 것'의 의미는 육체의 생명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삶을 의미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혼동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육체는 죽고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살고 있다는 지식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육체와 영의 두 생명속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생명은 서로 상반된 위치에 있으면서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육체속에 살면서 영적인 경험을 할 수 있고 영안에 살면서 육체적인 특성이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것이 육체냐 성령이냐에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의식 속에 확고하게 각인되어야 할 지식입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미 육체의 속성이 죽었음과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죄없다 함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직도 율법에 정죄된 당신의 죄를 걸머지고 내가 구원을 받았느냐 정죄를 받아야 하느냐 논쟁을 하여야겠습니까? 아니면 죄없이 함을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의 그 모양이라도 싫어 버려야 합니다. 영원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