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갈라디아강해

(갈라디아5:13) 열매 맺는 온전한 삶

이요나 2007. 2. 28. 10:05

(갈라디아5:13) 열매 맺는 온전한 삶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평화와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올해로 갈라디아서를 끝내고 신년에 에베소서를 공부하게 되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내년도에 서울 갈보리채플 사역을 쉬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일을 해 보고자 하였습니다만 아직 주께서 미국행을 허락하시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주님의 계획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으로는 알 수 없으나 내 마음은 일단 서울 갈보리채플 담임사역은 좀 놓고 쉬고 싶을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4장에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즉 율법의 행위에 빠져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하늘의 예루살렘의 아들로서 자유자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나는 이 말씀은 오늘의 모든 교회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제 5장과 6장에서 율법의 행위 속으로 달려나간 갈라디아 성도들을 추스려 그리스도의 기업을 물려 받는 자유자들이 행하여 할 아홉가지 규례들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A. 멍에를 메지말라(1-12)

오늘 5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행하여야 할 명심보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바울의 주장은 율법과의 전쟁을 선언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알기는 주께서는 율법의 일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하셨고 또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로 로마서에서 '율법이 죄가 될 수 업다'(롬7:7) 하였으며 다시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의 신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7:14)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의로운 생활 규범을 위하여 주신 율법의 속성을 말한 것으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이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그 율법에 매여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 율법과 관련하여 누가복음 16장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로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임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예정과 계시된 복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릴 수 없다"하였고 다시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3:22)말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2절에서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 온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아야만 의로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바울이 이처럼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존폐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한다" 하며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에서 끊어져 버린 자가 됩니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 것에 둔감한 지경에 있습니다. 또 알고 있다하더라도 온전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을 인간과 같이 생각하여 무엇을 드리고 행하여야만 우리를 받으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와 거룩함이란 오직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과 인격으로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6절에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절)증거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처럼 쉽게 율법의 세계로 돌아선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너희가 다름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애통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말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곱게 잘 자라던 자녀들이 한 순간에 타락한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덩이에 퍼지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예로부터 죄를 누룩에 비유하여 왔습니다. 적은 누룩이라도 그것은 순식간에 전체를 부풀러 버리고 맙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말하였습니다.

 

B. 서로 종 노릇하라(13-15)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인의 행하여야 할 두번째 지킴이를 언급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이 말씀은 오히려 자유자라고 선언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에 쒜기를 박는 말과도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도리혀 섬기고 목숨을 주러 왔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이 그토록 공경하는 율법을 인용하여 "온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주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어느날 율법 학자가 율법 중에 무엇이 가장 크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모든 울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이라" 하셨습니다.

 

-->1. 서로 멸망할까 조심하라(15)

바울은 15절에서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하였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북왕국과 남유다는 서로 다른 나라를 이끌어 내어 형제의 국가를 멸하러 하였습니다. 요담의 아들 아하스는 시리아왕에게 조공을 바치며 그의 신을 끌어들이고 앗수르의 손을 빌어 남유다를 쳤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경쟁심리에 몰려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교회에서는 서로 경쟁심을 부추겨 성도들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여호와의 사랑의 실천은 뒷전이 되고 또 사랑해야 할 이웃들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교회들이 온통 축복이라는 미명아래 강요된 예배와 봉사에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려 합니다.

 

C. 성령의 좇아 행하라(16-24)

세번째로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절)하였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와도 관계가 있음을 뜻한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신적인 무장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시며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14, 16장 참조).그러나 이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소욕의 고통을 언급하여 "내 육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범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외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저내랴"(롬7:24) 탄식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난 육체와 정신적 갈등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스스로 육체의 소욕을 정복한다는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영적 지각을 가진 존재로서 아담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빼앗겨 버림으로 세상의 신이 죄된 인간의 육체를 주관하도록 셋팅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이라"(롬8:20)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영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의 의지를 언급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 8장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롬8:26).

 

바울이 여기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안에 서로 대적하고 있는 두 영적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을 내주시키신 것은 육신을 지배하는 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18절에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상 주의하여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미 앞에서 우리가 율법아래 있지 않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지위가 죄인에서 의인의 위치로 바뀐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범죄하면 다시 율법의 정죄를 받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의 저주에서 풀어난 은혜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더이상 우리에게 역사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역사할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를 하여도 우리의 주께서 우리의 죄를 징치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보증인 성령을 주셔서 그의 인도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1. 육체의 소욕

바울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하였습니다. 사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이러한 일들을 완전히 끊어내고 살 수 있다면 그는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육신의 일 중에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을 먼저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첫번째 요구되는 정결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호색'은 육체의 향락을 위한 단계로서 자제할 수 없는 정신적인 측면을 언급한 것입니다.

 

'술수'는 문자 그대로 '약물'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육체의 쾌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약에 빠져 있는지요, 또한 '분쟁과 시기'는 경쟁과 열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불필요한 일들을 위해 경쟁하고 열심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마르다와 빌립보교회의 두여인을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당짓는 것'은 이기주의를 뜻하는 것으로 공공의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높은 직책을 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정국을 보면 당짓는 사람들의 실태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분리함'은 따로 서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팀과 합하지 않고 자신의 두각 시키는 행위를 말하여, 또 '이단'은 파벌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많은 파벌을 만들었습니까?

 

또한 21절의 '투기'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떤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갖고자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헤롯은 동생의 처인 헤로디아를 취하였습니다. 근본적으로 투기는 화평을 깨뜨리는 행위들을 말합니다. 또 '방탕함'이란 그 당시 경기장의 우승자를 들러리선 무리들을 합니다. 이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바카스 신에게 축복을 기원하며 연회에 빠져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투기와 방탕에 물들어 있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말씀은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바울은 그의서신 여러곳에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선언하였습니다(고전6:9-10, 엡5:5). 이것은 바울서신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구원의 문제와 연결을 지으려 합니다만, 구원의 문제는 아직 우리가 무어라 단정할 수 없는 아주 미묘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에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받을 형벌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는 "우리가 다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기록되었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히6:5)라고 하였고 다시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니라"(히10"26,27) 기록하였습니다.

 

-->2. 성령의 열매

바울 사도는 22절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평화와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열거한 육체의 소욕과 달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요소가 아니라 그 열매 자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 있는 육체의 소욕들은 여기서 언급된 성령의 열매들을 맺지 못하게 하는 요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아홉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바울이 열거한 내용들은 그 처음에 언급한 '사랑'의 범주 속에 모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하나님의 사랑의 은사는 오늘 바울이 언급한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아홉가지 성령의 열매들은 세단계로 구분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온전할 때 저절로 이루어 지는 영적인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아가페)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으로 그의 인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인간의 영역으로서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않습니다.

 

'희락'(카라)은 하나님께 삶의 바탕을 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기쁨은 성령의 교통 가운데 나타나는 내적 표징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화평'(에이레네)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평안과 안정된 삶의 질서를 말하는 것으로 히브리어의 '살롬'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 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의 두번째 단계인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 나타나는 사랑의 속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오래 참음은 오직 사람에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또한 '자비'는 친절을 나타내는 말로 고린도후서 6장6절에서는 달콤한(sweetneess)로 번역되었습니다. '양선'(아가수토네)은 '최고의 선한 미덕'을 가르키는 말로서 주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셨을 때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주께서 발에 기름을 붓는 죄인된 여인에게 친절한 말을 하셨을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또 세번째 단계인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내 안에서 스스로 이루어야 할 사랑의 속성으로 '충성'은 신뢰를 의미하며 '온유'(프라오테스)는 기본적으로 순종과 배려를 의미하며 훈련과 가르침에 교만하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절제'에 사용된 '엥크라테이아'는 황제가 자신의 욕망과 흥미를 절제하므로 그 영향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는 고고한 황제의 미덕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절제란 욕망을 극복하는 정신이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운동 선수가 자신을 단련시킬 때에 사용하였으며(고전9:25),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욕을 절제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고전7:9). 그러나 충성이나 온유나 절제는 자기 안에서 다스려지고 훈련되어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생활태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결국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 열매는 먼저 가장 아래 단계인 내 안에 있는 것 부터 이루어야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충성하고 온유하고 절제를 하지 못하면 오래참음과 자비와 선한 일들을 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과의 궁극적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D. 성령으로 행할지니(25-26)

바울은 네번째로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권면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령을 향한 의지뿐 아니라 실제로 우리 삶이 성령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반적인 삶 가운데 성령의 나타나심을 업급한 것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된 "성령의 좇아 행하라"는 말씀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위에서 말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정신적 의지를 말한 것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권능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은 단계에서 만족하지 말고 성령세례 즉 성령충만의 단계에 이르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행하는 것이 성령의 뜻인지 알고 행하다가 나중에 그것이 자신의 육신의 소욕인 것을 발견하고 부끄러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일을 하였을 때 그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계속 다른 육체의 소욕들이 확산된다면 그 일은 곧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갈보리채플은 많은 일들을 기획하고 또 중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경우를 보면 중단하는 경우가 다 많습니다. 주께서 내게 허락하시는 것은 가르침을 위한 것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서로 격동하지 말라 (25-26)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격동이란 말은 온전하지 못한 일들에 도전적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 위하여 도전하고 투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최근 촛불을 들고 나서는 시위대를 보면 그들은 그 시위의 의미를 떠나서 미치 촛불 시위를 민중붕기 문화로 정착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들도 중요하지 않은 일들 즉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 일들을 놓고 격동하고 있습니다.

 

-->2. 서로 투기하지 말라 (25-26)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전도에 불을 붙인다는 의미에서 전도를 해온 등급에 따라 우산이나 티셔츠 또 생활용품을 상금으로 주기도 하고 교구실에 그래프를 만들어 놓고 경쟁심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또 어느 교회에서는 자기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문을 위해 헌금을 많이 걷은 사역자들을 사역의 능력으로 등급을 매긴다고도 합니다. 교회가 스스로 투기심을 유발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6장에서 다섯가지의 해야할 일들을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