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12:5-6) 너의 직분 주께서 주셨는가?

이요나 2007. 2. 27. 12:56

(고전12:5-6) 너의 직분 주께서 주셨는가?

 

(고전12: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봉사와 직임*

우리의 봉사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여러 가지 봉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 목사와 교사의 은사를 가진 사람,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 혹은 돕는 은사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봉사의 종류로 교회 안에서의 직임입니다. 그러나 주는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런 여러 가지 은사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상호보완의 관계입니다. 우리 주위에 위로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중요하고도 귀중한 은사입니다.

 

그가 비록 교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서있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사역을 하지 않아도 괸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로의 은사를 주셨고 그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가 그를 통하여 나타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상한 심령이 치유되면 힘을 얻고 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로하여 사람들이 세상 가운데서 악한 영들과 대적할 준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담대함을 얻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교회 안의 봉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같습니다. 주는 한 분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같은 주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주를 섬기고 있지만 같은 주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맞는 옷*

사실 저는 의식주의(儀式主義) 예배의 관습들에 대하여 반대해왔었습니다. 또 과도한 표현을 하는 오순절파에 대해서도 반대를 해왔습니다. 인간은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의 결점을 발견하게 되며 그것을 비판하고 싫어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 전통적 의식 속에 행하여지는 예배는 도대체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요? 향을 뿌리며 물을 뿌리는 의식들, 그리고 중세 왕들과 같은 그들의 복장과 장신구들은 참으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또 오순절 어느 교파의 예배를 가보면 온통 술주정뱅이들처럼 소란스럽고 춤추고 넘어지고 고함을 지르는 모습들은 정말 어디로부터 시작된 예배인지 그 근원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생을 살면서 발견한 것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선하고 좋은 모습들은 오랜 세월 속에서 각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여 사람들을 원만하고 평안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러한 악습에서 벗어 나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전통적 문헌에 따른 예배 환경에서 예배드리고 싶어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오순절 교회 사람들 또한 이해할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터득하는데 예수를 믿은 후 20년이 걸렸습니다. 사실 나는 7년전 서울 갈보리채플을 개척하면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갈보리채플 예배에 익숙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일본에서 갈보리채플의 예배의 방법에 익숙해져 있었고 내 기질이 그것을 받아드렸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도 순복음식 예배에 질들여 있어서 갈보리채플의 예배가 맞지 않아서 한동안 많은 갈등을 느꼈었습니다. 처음 순복음을 다니시던 저의 누님은 눈물을 흘리며 힘들어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경쾌한 리듬속의 프레이즈를 함께 부르며 차분히 앉아서 말씀듣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는 각각의 기질들이 있어서 자기들에 맞는 환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같을 필요가 없다!

예배의 모습은 다를 수 있어도 우리는 모두 같은 주를 섬기며 같은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구속받고 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예배의 방법에 따라 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14:4)」하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누구를 맞추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혹 넘어지고 소리지르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 해도 그 일에 대하여 당신이 언급할 일은 없습니다.

 

그를 세우고 너머 지는 지는 것이 모두 그의 주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사의 참된 역사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는 같기 때문입니다.「또 역사는 여러 자기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6)」성령의 은사는 우리들 가운데서 다른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흉내내지 말자!*

은사가 같다해도 역사는 여러 가지입니다. 당신에게 예언의 은사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은사가 있다고 하십시다. 당신에게서는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기 전에 흥분되어 가쁜 숨을 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게 은사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한 주님은 아주 다양성이 있는 분이어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같이 묶지 않고 각 개인과 개인으로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개인으로서 사랑하고 계십니다.

 

당신 고유의 기질과 성질에 따라 하나님은 당신을 개인으로 취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의 역사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사람에게 서로 다른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대로 흉내내지 않는 것입니다. 은사의 역사에는 꼭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하여 다른 사람이 하는 방법을 따라 해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은사의 역사에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어떠한 틀에 맞추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상자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개인의 인격으로 섭리하시도록 하나님을 그대로 두십시오. 우리를 포함한 이 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은사가 다르고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입니다. 봉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주는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역사에는 여러 가지 역사가 있지만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입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