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15:51) 부활 이벤트에 참여하라

이요나 2007. 2. 27. 13:09

(고전15:51) 부활 이벤트에 참여하라

 

다음주면 고린도전서도 끝이나고 후서로 넘어갑니다. 크리스챤들에게 있어 고린도전서는 신이 나는 말씀이기도 하고 겁이 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는 고린도서를 읽으며 도대체 바울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급한듯하면 한없이 여유가 있고, 율법적인 사람이다 싶으면 또 한없이 관용이 넉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바늘구멍 보다 더 치밀하고 빈틈이 없으며 한치 양보도 없는 분은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이 이처럼 치밀하고 완벽하면 옆에 있기조차 겁이 나는 법인데 가히 바울의 옆에 많은 사람이 없었던 것을 보아도 그 성품이 어떠하였는가 짐작이 갑니다. 그러면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냉엄하고 비정한 사람이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정적인 사랑을 갖은 사람이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서나 사람들 앞에서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그의 사랑이 어떠했는가는 그가 쓴 각 서신들의 마지막 장에 나타납니다. 그는 정말 자신의 사람들을 아끼고 염려하며 끝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오늘날 교회가 너무 현실에 안착되어 있어 그리스도인의 궁국적인 소망과 목표가 무엇인가를 잊어 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주의 택하심과 부르심 그리고 성도의 직무와 임무를 설법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야 할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지켜져야할 책임과 의무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장차 우리의 공력에 따라 상금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나는 이 상금에 대하여 우리가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이란 말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천국이란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가는 저 세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 안에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도 천국이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 속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현실을 세상과 함께 공존해야 하는 인간으로서는 충만한 복이라 칭하기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먼 훗날의 그 어떤 것보다도 눈에 나타나는 현실적이 것을 중요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령 당신에게 10년 후에 천만원을 받겠느냐 지금 백만원을 받겠느냐 하면 당신은 지금 받는 것을 택할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여기서 부활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에 대하여 오해들을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이 세상에서 부활에 참여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에서 엘리사가 살린 수넴 여인의 아들이나 또 예수께서 친히 살리신 마리아의 형제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 과부의 아들, 그리고 베드로가 살인 도르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그들은 부활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부활한 것이라면 그들은 다시 죽지 않았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었지만 나사로는 12제자들과 함께 있었고 도르가도 초대교회 성도들 속에서 생활하다가 그 수명이 다하는 날 죽어서 하늘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아남이란 그 생명의 주권이 주께 있음을 의미한 것입니니다. 만물이 창조자의 기쁘신 뜻대로 돌아간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부활이란 한마디로 주의 날 단 하루에 있을 우주만물 창조 이래 첫 이벤트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건을 미리 말하여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1-42)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부활 이벤트(?)는 단 한번일 것 갖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하여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15:23-24)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강림하시는 날 있을 때 그에게 붙는 것!!! 이것만큼은 정말 대단한 이벤트이지 않습니까? 하늘 공중에서 에어 쑈만 해도 입에서 감탄이 나올 판인데 홀연히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일순간에 공중으로 들어 올려 그리스도와 공중에서 잔치를 하게 되니 이보다 더큰 이벤트는 이 세상에 없을 것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 우주만물 중에 첫 행사요 마지막이 될 부활 이벤트는 모든 사람들이 초대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만 믿었다고 하여 모두 부활에 참여한다면 그것이 상급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오직 많은 사람이 달려 그 상을 받는 자는 오직 한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시대에 벌써 부활에 대한 오해와 그 감격적인 이벤트에 대한 생각이 식어져 감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만큼 현실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지처서 주의 오심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그의 서신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노아의 때와 같이 불의 멸망이 급히 임할 것이나 아직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신다고 하나님의 자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나희 중에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자 가운데 부활이 없다 하느냐" 책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신학자들이 신학교 강단에서 부활의 무용함을 설파하기도 하고 심지어 주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며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를 종교적인 설화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학식과 배경이 어떻다 할지라도 마땅이 저주받을 원수의 자식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15장에서 발견해야 할 중요한 핵심 문맥이 있습니다. 주께서 부활 승천한지 그리 오래지 않은 그 시점에 왜 이러한 일이 교회 가운데서 발생한 것일까요? 바울은 그에 대한 설명을 3절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3-8절)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성경대로"라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는 물론 성경이 기록되어 가고 있었던 시절입니다. 지금 이 내용도 바울이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5장 1절 서두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라 말하여 아직 그들 속에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문맥을 따라 3절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라는 말씀과 12절에서 "전파 되었거늘" 이란 말씀 속에서 일정한 질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부활의 증인이 누구이며 그 부활의 복음이 누구에게 주어졌으며 또 무엇으로 그들에게 전달되고 있었는가를 상기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너무 많은 스승들이 나타나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며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종교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책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당시의 사상과 시대적 문물을 소상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역사책은 아무나 쓴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속에서 나름대로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과 시대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라야만 그 진가가 명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정경에 들지 못한 그리스도에 대한 무수한 책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우리가 정경으로 하지 않는 바룩이라는 책을 경전에 끼워 놓았습니다. 또 우리는 많은 신학자들이 도마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것이 정말 사도 도마가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리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에 기록된 이 모든 글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기름부으셔서 친히 기록하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학자들은 여러 역사책이나 의학서적 그리고 다른 종교적 철학과 과학적 조명을 하면서 동정녀 탄생의 불가와 부활의 불가함을 억지로 증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수백번을 멸망을 받아도 살아남지 못한 자들이 틀림없습니다.

 

성경의 기록됨을 믿지 않고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부인하고 예수를 배반한 가롯유다의 형벌이 어떠했는지 저희가 성경에서 익히 보았거늘 그들이 그 말씀조차도 부인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기록이 끝났고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판단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54절에서 다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뢱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성경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명하면서 너희의 수가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이제 오늘 하루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리고 육체의 기뻐할 세상의 것에서 떨어져 이제 곧 오실 우리 주의 날에 그의 부활의 이벤트에 참여할 거룩한 상급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