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16:3) 헌금의 은사적 위치

이요나 2007. 2. 27. 13:11

(고전16:3) 헌금의 은사적 위치

 

(고전16: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오늘로서 고린도전서가 끝이납니다, 12장의 성령은사와 13장 사랑은사 부분을 다루는데만 3개월 이상이 걸렸습니다. 갈보리채플 목회 10년간 고린도전서를 두번에 걸쳐서 강해를 했습니다만 시간이 허락된다면 다시 한번 해보고 싶은 부분입니다.

 

우리가 다음주부터 고린도 후서를 공부하게 되겠습니다만 바울이 편지한 일곱개의 교회에서 두번을 편지한 곳은 고린도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두곳의 공통된 내용은 교회의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정말 의미있게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우기 고린도전서는 우리 믿음생활의 가장 근본적인 파워가 되는 성령은사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들로 좀더 시간을 내어 다시 한번 살펴 보는 기회를 갖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16장은 참으로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물론 서신의 마지막 부분이기 때문에 설교자들도 깊이 다루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바울은 16장 바로 앞에서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가장 최고의 신학인 교회의 휴거와 부활에 대하여 언급한 후 바로 실제적인 믿음생활 속에서의 열매에 대하여 언급하며 서신을 종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헌금에 대하여 언급한후 복음을 위해 인생을 바친 믿음의 동역자들의 열정어린 헌신 그리고 그들의 수고와 사랑을 맺은 믿음의 열매들의 아름다운 믿음의 생활방법에 대하여 소개하며 소망과 기쁨에 찬 크리스챤의 여정을 통하여 성도들이 무엇을 귀히 여기고 무엇을 중히 여겨야 할 것인가에 깨닫게 되기를 소망 하였습니다.

 

바울이 1절에서 언급한 '연보'(로기아)는 십일조나 주일헌금이 아닌 특별 헌금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는 십일조나 주일헌금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특별헌금을 조성할 때가 있습니다만 바울은 유대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특별 헌금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갖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여러 곳에서 언급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바울이 16장 서두에서 헌금을 언급하면서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인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당시 유대의 예루살렘 교회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고 기근까지 겹쳐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단일 종교 민족이라서 유대교에서 출교당한 자들은 유대 공동체속에서는 물론 가족 친지간에서도 교제는 물론 인간관계까지 상실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도들은 생업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또 정치적 압박까지 받게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서야 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를 떠나 이방지역으로 흘러 나왔지만 어느 곳을 가던지 유대인들이 종교적 집단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속에서 발을 붙이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중추적으로 돕던 교회가 바로 바나바와 바울이 개척한 안디옥교회였습니다. 원래 마음이 온유하여 권면의 사람이라 불린 바나바는 이방교회를 세워 예루살렘 교회와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이방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조성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를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공격과 오해를 받기 쉬운 미묘한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바울을 시기하던 유대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도전하며 바울을 모함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으로 몰고 가려 하였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예루살렘을 위한 특별헌금을 요청하며 헌금에 대한 특별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헌금과 관련하여 매우 귀중한 신학적인 요소이기도 하며 깨끗한 목회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말한 내용은 한마디로 헌금을 자신의 면전에서 내려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과의 인간적인 관계로 인하여 헌금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헌금과 목회자들의 비리와 교회의 분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좀더 의미 깊게 살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말씀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부자청년을 비유로하여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막10:22). 우리는 주께서 왜 제자들에게 재물의 위치가 하나님과 대비하여 설명되고 있는지 음미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재물은 우상숭배라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재물의 위치는 물질만능의 요술방망이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유명하다는 많은 목회자들이 헌금과 관련하여 깨끗하지 못한 점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교회의 건축이나 선교를 위하여 헌금을 걷는다고 하지만 헌금이란 목회자의 생각이나 교회의 제도적 방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갈보리채플의 경우 헌금은 예배 가운데 찬양과 함께 드려지는 제물로 경배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예배후에 헌금을 걷는 것은 헌금을 많이 걷기 위한 편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우기 헌금을 위한 기도는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의 가르침과 기도로 성장한 교회들에게 헌금을 권면하면서도 헌금이 일반적인 모금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예물이 되어야 함을 설명하여 3절에서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에 가지고 가게 하리니" 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에서 드린 '연보'를 '은혜' 즉 카리스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선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헌금이 그 액수가 얼마가 되었던지 사람의 생각과 사람과의 관계로 드려진다면 그것은 예물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5장에서 성령을 기만한 죄로 죽음을 당한 아니니아 부부를 보았습니다. 또 3절에서 헌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윤리적인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서신에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을 여러가지 다른 단어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은 '연보' '은혜' '나눔' '봉사, 등의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성도들의 헌금에 대하여 여러번 언급하였습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3절과 후서 8장4절에서 "은혜"라 말하여 헌금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사가 아니면 헌금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물질은 우리 생활에 중요한 부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이 넉넉한 사람이 교회 헌금이 인색한 반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아끼지 않는 분들을 보면 정말 헌금은 하나님의 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1절에서 '연보'를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사용한 헬라어는 오늘 우리가 1절에서 읽은 연보(로기아)와 다른 '하플로테스'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라는 '하푸로스'에서 파생된 말로 고난을 당한 자들과 동질의 마음에서 드려지는 '구제 헌금'을의미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8장 4절과 9장13절, 그리고 로마서 15:6절에서 '코이노니아'(나눔)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은 성도와의 교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 고린도후서 8장4절과 9장1절에서 "디아코니아"(봉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므로 헌금은 그리스도인의 봉사임을 설명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당시에도 카다란 헌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20절에서 '풍부함"(한글성경- 거액의 연보)을 의미하는 '하드로테스'라는 헬라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거액의 연보로하여 악한 자의 훼방을 받지 못하기 위한 감독자들의 주의를 경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생각할 때 바울의 지적은 정말 우리를 소스라치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형제를 사랑하는 애정의 표현으로 드려진 헌금을 '율로기아'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고후9:5). 이것은 박애의 정신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니라 고린도후서 9장12절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라는 표현하는 "봉사" 즉 '레이톨기아'라는 헬라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공익을 위한 자발적인 기부를 의미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말 일평생을 모은 재산을 장학금이나 자선사업에 선듯 헌납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총과 칼로 대통령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며 수천억을 한 입에 넣고도 내 통장에는 한푼도 없어서 이웃 동료들이 보태주는 돈으로 연명한다고 헛소리하는 전씨(錢氏)가 들끓는 세상 속에 이러한 선한 손길들은 우리 마음을 시원케하는 오아시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외에도 바울은 사도행전24장17절에서 "구제"(엘레모스네) 라는 단어와 '제물'(프로스포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엘레모스네'(구제)란 유대인의 종교적 중심 사상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제물"이란 용어 역시 종교적 언어로서 하나님께 바치는 최고의 제물은 회개한 심령을 드리는 것 다음으로 여겨지는 환난에 처한 이웃을 구하는 예물임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관련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제 여러분께서 헌금의 위치가 우리의 예배 가운데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아시겠는지요? 바울이 이 헌금에 관한 말을 최고의 신학적인 교회의 휴거와 성도의 부활보다 다 높은 위치에 놓았는지 이해가 되시는지요. 이제 우리는 다음 주에 이보다 더 귀한 성도의 섬김과 사역자들의 헌신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