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후서

(고후6:1) 은혜를 헛되이 말라

이요나 2007. 2. 27. 15:20

(고후6:1) 은혜를 헛되이 말라

 

(고후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면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오늘 우리가 살펴 볼 고린도후서 6장은 크게 셋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로 10절까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으로서의 입장을 설명하였고 11절부터 13절까지는 사역에 대하여 고린도교회의 보다 넒은 수용을 촉구하였으며 14절부터 믿는 자들의 생활규범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은 문맥상 5장20절부터 연결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5장 후미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말하며 주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게 하는 직책을 주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5장 20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한다"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신'이란 헬라어 '프레스뷰테스'이며 라틴어로는 '레가터스'입니다. 이 말은 로마시대의 정치 용어로서 '황제의 대리인' 또는 '원로원의 대사'의 의미를 모두 수용합니다. 그 당시 로마는 두가지 정치 체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로마지역은 원로원에서 관할 하였지만 새로운 점령국가나 위험지역은 황제가 친위대를 통하여 통치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에 황제가 임명한 사신이 나가게 되는데 그를'프레스뷰테스'라 불렀습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로마군대가 어느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 원로원에서는 10명의 '사신'을 파송하여 그 정부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그들을 '프레스뷰테스'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여기서 말하는 '사신'이란 한 국가의 대사로서 그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므로 대사의 말은 바로 그를 파송한 통치자의 말이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신'이란 그리스도의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들의 말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 됩니다.

 

바울이 구차하게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일군들이 전한 복음의 위치와 주권이 어디에 있으며 복음의 사신들의 위치가 얼마나 막중한 것임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일군들이 자신의 위치의 막중함을 깨달아 그 모든 일과 행동에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신된 바울의 권면이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말하여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과 그 때가 지금 우리에게 이르러 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은혜의 날과 구원의 때가 항상 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바 '은혜를 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는 말씀의 핵심은 1절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에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은혜의 때와 구원의 때가 있는 것이라면 절대로 이 시간을 소홀히 하여서는 않될 것이며 또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은혜가 다시 무너지니 않도록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가 이 직책을 훼방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꺼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스스로 천거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신의 직무'를 훼방하는 무리가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 땅이 창설된 이래 그리스도의 복음은 늘 훼방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도 꺼리끼지 않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단의 역사는 늘 하나님의 사람들을 참소할 때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하여 바울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감수해야 할 일들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신'된 자들의 삶은 먼저 '견딤'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견딤이란 모든 환경으로부터의 초월된 신뢰를 말하며 그것은 의로움을 이루는 초석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온전한 견딤을 먼저 환난과 궁핍과 곤란을 통한 내적투쟁을 두었습니다.

 

'환난'(들립시스)는 근본적으로 육체적 압박을 말합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육체적 환난은 우리의 심령을 압박해 옵니다. 또한 '궁핍'은 문자 그대로 삶의 필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를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였고 바울은 자급자족하기를 권면했습니다. 세번 째로 언급한 '곤란'은 입지적인 조건을 말합니다. 피할 수도 도망갈 곳도 없는 처지를 당한 사람의 곤란함은 격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외적인 문제를 언급하여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나라의 정치와 사회적 씨스템과 관련되어 받아야할 고난을 언급한 것입니다. 여기서 '요란한 것'이란 무지몽매한 자들의 언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자들의 우격다짐은 마치 포호하는 바닷물 소리와 같습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하여 '수고로움'과 자지못함'과 '먹지못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담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신들은 그 모든 삶의 조건에서 견디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보다 더 중요하고 견디기 힘든 정신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깨끗함'과 '지식'을을 언급하였습니다. 깨끗함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믿는 자들의 의로움입니다. 또한 '지식'은 자신이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알게 하는 영적 나침판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오래 참음'과 '자비함' 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없는 사랑'을 언급하였습니다. 이 말들은 모두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에서 많은 실패를 하기 쉽습니다. 사람을 용납하고 인내하지 못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책망을 쌓을 때가 많습니다. '자비'란 엄격함과 반대어로 다른 사람을 향한 동정적인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이 많은 지식에 도말하면 엄격해지기 마련인데 자비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성령의 감화'란 '성령' 그 자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 삶에 나타난 거룩함과 의로움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거짓없는 사랑'이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위선적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말입니다. 최근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방하여 위선적인 행동들을 일삼고 있음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와 같이 위에서 언급한 것은 우리 육체와 정신으로 극복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신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바울은 복음의 사신이 되기 위한 세번 째 단계를 언급하여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안에 있어 의의 병기를 좌우하라"(7절)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이란 사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에게 이것이 빠진다면 우리가 행한 많은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것을 전하기 위하여 오셨고 또 이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그의 사신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오직 복음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의의 병기를 좌우'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병기란 전쟁을 위한 무기를 말합니다. 좌우에 들었다는 것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가추어야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의로움'만이 우리를 모든 악에서 지키고 또 악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무기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의를 나타냄으로 복음의 진리를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서로 대칭되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사신된 명예로운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라 말하여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위치를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서 '욕됨'이란 말은 그 시대적 의미로 로마의 시민권의 박탈당할 때 사용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마친 후에 영광된 하늘의 시민권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참음과 노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한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거론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복음의 일을 하다가 돌아 선 악한 이름들을 봅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자신의 행위로 영광을 구하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또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받는 '그리스도의 사신'들의 처우와 하늘에 대한 우리의 실상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자랑하여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10절)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쁘듯하고 넉넉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속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 오르지 않습니까? 이제 바울은 고린도성도들에게 가슴을 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라"(12절) 여기서 '심정'이란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에 '창자'(bowels)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단어를 확장하면 우리 몸 속에 있는 오장육부 기능을 의미합니다. 이 기능들은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이며 독립기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기관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율기관이 아닙니다.

 

아마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바울의 엄중한 가르침을 들으며 말로는 율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의 성도라 하면서 이처럼 어려운 규범을 앞에 둔다면 도대체 복음의 자유는 무엇이냐고 생각 하였던 모양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녀는 부모의 염려고 권면과 책망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들이 일생동안 겪는 고노와 고통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를 책망하지 않는 부모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날도 갈보리채플에서 설교를 듣던 어떤 사람들 중에는 요즘 세상에 어떻게 당신들이 가르치는 성경의 말씀처럼 살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뛰쳐 나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면 거룩함과 의로움의 평화가 우리를 영원한 자유를 누리며 우리는 그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14절부터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힘들어했던 문제를 다시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14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5장9절에서 음행과 관련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의 일부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는 본질적으로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여 발생된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바로잡은 후 그 후유증으로 발생된 문제들을 아프터 서비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움을 받은 자신들의 위치와 권세를 설명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문제들을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본질적으로 결혼과 관계된 말입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자들과 결혼하는 것을 꺼리낌 없이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혼의 기준을 상대가 하나님을 아느냐, 그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 온 자인가를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인물과 학력과 직업과 가문과 재물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믿음이 좋으니 결혼을 해서 그를 전도하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믿음은 영적인 문제로서 오직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의 은혜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믿지 않는 자들과 결혼하여 실족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또 아직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가 격어야 하는 믿음의 방해와 고통은 마치 폭풍속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메는 배와도 같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힘을 잃게 되고 세상의 즐거움에 빠저 점점 강팍하게 되어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게 됩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벨리알'이란 '불량자'를 의미하며, 사단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믿지 않는 자들의 불량한 모습은 정말 보기조차 민망스럽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의 사회적 삶의 방법을 언급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 버는 일에 빠져 불량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은 정말 가슴아픈일입니다.

 

'상관'이란 단어는 '모임과 교제'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직장 생활 속에서 믿지 않는 자의 모임과 교제에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게 됩니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향락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서울 갈보리채플에서 주관하는 인터넷 카페 '크리스챤 펠로우쉽'의 친교는 한국교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과의 결혼(육)과 사회적 관계(혼적관계)가 다음 단계에서는 영적단계로 이어짐을 설명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의 태도에 따라 하나님의 성전이 우상의 전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얼마나 명백하고 단호한 결단의 말씀이며 위대한 선언입니까? 우리는 전능자의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말씀은 그 전능자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디 자신을 성별하여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지키십시요, 7장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