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후서

(고후5:4) 생명의 업그레이드

이요나 2007. 2. 27. 15:21

(고후5:4) 생명의 업그레이드

 

(고후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4장1절에서도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말하였고 다시 16절에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우리게 함이라”(고후4:16,17)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역자들이 낙심할 일들이 많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오늘 5장 본문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우리 영혼의 실존의 세계인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5장 서두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장막이란 두말 할 것도 없이 우리의 육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의 마지막 서신을 쓰며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1:14)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우리의 육신을 장막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 당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함께 장막을 짜는 일로 생계를 꾸리며 복음의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장막의 중요성에 대하여 매우 잘 알 것입니다. 장막이란 나그네들에게 필요한 임시 거처로서 집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무용한 물건입니다.

 

시인들의 노래처럼 동가식서가숙 하며 살아가는 집시들의 나그네 생활은 그 노래만큼 낭만적이지는 못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나그네의 장막을 좋아하였다면 오늘날과 같이 부동산 값이 치솟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켜 이 땅의 나그네들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의 살다가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 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기록하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요14:2)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삶을 끝내고 이 장막을 떠나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 갈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소망을 힘입어 믿음의 세계로 정진합니다.

 

만약 이 소망이 없다고 하면 오늘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내와 참음과 굴욕과 자기 육신을 향한 투쟁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우리가 주를 믿는 믿음 또한 허망할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에서 떨어져 세상 사람들 속에서 먹고 마시고 육신의 즐거운 것에 만족하며 살아 있는 인생을 만족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말한 것과 또 다른 새로운 지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상반된 이론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더욱 진보된 소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 땅에서 믿음의 생활을 다한 후 육신의 장막을 다하고 들어갈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늘의 영원한 집을 덧입기를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있어 탄식하며”라는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의 생활 속에서 격어야 할 육체의 환난을 의미합니다. 아마 믿음의 집에 들어와서도 호의호식하며 자랑하며 먹고 마시고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는 무늬만 크리스챤인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말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궤변을 떨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3절)말하였습니다.

 

사실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서 견딜 수 없는 눌림과 핍박과 짐승들과 또 영들과의 투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하였고 그들이 받은 복에 대하여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계7:14-15)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믿음 안에 설정된 새로운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의 삶 가운데서의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는 이미 삼층천 하늘에 끌어 올려가 인간으로는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상황에 대하여 바울은 내가 몸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고 증언하였습니다. 후일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내가 그 두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말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논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만약 천국이 육체의 죽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 또한 투쟁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를 믿음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보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시며 내가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는 것이면 너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 하셨습니다. 또한 제자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내가 너와 함께 오래 살았는데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 책망하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주께서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사모하노니” 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신비로운 체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이글을 읽으면서 주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신 말씀을 다시 상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성령에 대한 재인식을 위해서 입니다.

 

더 나아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된다”는 말씀은 육체의 더러운 욕망을 벗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선한 충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계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볼 수도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음 안에서 소망하는 거룩한 신비의 세계이지만 이러한 믿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바울은 5절에서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5) 고 증언하였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 지식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으로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앞에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주께서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씀은 다시 상고하여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주께서 거기서 성령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6절과 7절에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담다한 믿으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4장 13절에서 이미 “기록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고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언은 담대한 믿음의 확신이 있는 자라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그들과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진 우리의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발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나는 이것은 오직 믿음의 사도들만이 가진 믿음의 비밀인 줄만 알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바울과 함께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외치고 싶습니다. '힘쓰노라'는 말씀은 우리의 믿음의 투쟁과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필히 기억해야 할 지식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기록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으로 자신은 판단 받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누가 앞에 놓인 믿음의 환난을 보고도 달려 나가겠습니까? 바울은 각 각 공력의 시험이 있을 것을 경계하였습니다.(고전 3:13)

 

이제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가장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저는 이 말씀을 매우 좋아합니다. 나와 같은 죄악에서 고통 받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혼을 맑게 깨우치는 생명수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를 믿는 누구든지에게 동일한 은혜를 내리십니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오직 창조자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102:18)노래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신중히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란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신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의로 나아온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죄는 모두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어떤 변명을 하여도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사람인척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먼저 부르신 자들로 화목의 직책을 주어 그들로 그리스도의 대사로 삼아 화목케 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들로부터 화목의 말씀을 받고 있다면 당신은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의 집'을 덧입을 수 있을 것이며 그와 함께 '내가 믿는 고로 말한다' 하고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지으신 당신의 새로운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판단 받을 일이 있다면 당신은 속히 화목의 말씀을 받는 그리스도의 사신을 찾으십시요, 그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권면하고 간구할 것입니다(참조 고후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