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후서

(고후4:1) 새 언약의 일군들의 명심보감

이요나 2007. 2. 27. 15:23

(고후4:1) 새 언약의 일군들의 명심보감

 

(고후4: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불과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긴 터널을 빠져 나온 듯 합니다. 나의 지루함은 비단 장마와 더위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경망스러워서 진득하지 못하고 더우면 덥다 추우면 춥다 난리들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조짐마저 우리를 더욱 덥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사노라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또 견딜 수 없는 시기와 질투도 일어나며 또 참을 수 없는 분노도 일어나게 마련이지요, 이것이 세상의 구조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것이 세상 속에서 우리를 성숙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기업에 참여하였다면 또 우리의 육체의 연약한 것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불세례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 여름 부디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평안한 하루를 만나게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서술하였습니다.

 

이 말은 앞에서부터 이어진 것으로 3장 6절에서 말한 '새 언약의 일군'의 자세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구약의 시대를 벗어나 그리스도의 시대에 대한 사역적 역할에 대한 설명과 그들이 세상 가운데서 받아야 할 당연한 일들 즉 세상에서의 환난과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새 언약의 일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과 지켜야 할 수칙들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믿음의 확신입니다.

 

바울은 본문 서두에서 ‘우리가 직분을 받았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직분이란 3장에서 언급한 ‘새 언약의 일군’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관하여는 우리가 이미 고린도전서 12장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창세전에 아신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시고 성령세례를 통하여 각 사람에게 사역을 위한 직임을 주셨습니다(참조 고전12장, 엡1:4; 4:11).

 

두 번째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긍휼'(mercy)이란 원래 이스라엘과의 언약적 사랑에 바탕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사랑의 언약(헤세드)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자비(mercy)와 심판과 구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 가운데 나타나신 긍휼(자비)은 가족은 물론 이웃까지 확산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잠21:10, 욥19:21, 출22:21-22).

 

예수께서는 고난당하는 자들과 목자 없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마9:36). 따라서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긍휼(자비)은 언약의 백성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신적 은사로 나타났습니다(롬9:23,엡2:4-5, 딤전1:13).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의 '긍휼'(자비)은 인간의 뜻이나 노력과는 무관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긍휼'(자비)은 복음의 제자들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은사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6절)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오직 그의 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신 자들에게 주신 신령한 은사로서 부르신 자들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보배의 질그릇을 깨트려 하늘의 보화를 빼앗으려 하는 영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며 핍박과 거꾸려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 진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사역자들을 위해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이제 우리는 큰 은혜를 입은 우리가 해야 할 수칙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제일 먼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라'(2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된 사역자들이지만 참으로 부끄러운 일들을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가 죄 많은 곳에 임하였다고 할 때 택하심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주장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 많던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는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기록되었습니다.

 

두 번 째로 바울은 '궤휼 가운데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궤휼'이란 간교한 행동들을 말하는 것으로 남을 넘어뜨리기 위한 간사한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뱀이 하와를 간교한 속임수로 유혹하였습니다, 오늘도 많은 거짓 교사들이 광명한 얼굴로 다가와 간교한 말로서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세 번 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2장 17절에도 언급된 말씀으로 잘못된 복음의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 예언자들이나 교사들을 언급한 것입니다. 최근 TV 방송이나 인터넷에 올라 온 설교들을 보면 정말 그들의 설교가 어디를 근거로 한 것인가 알 수 없는 설교들을 봅니다. 로마 교황청에서나 입을 법한 거창한 옷들을 걸치고 나와 성경에 근거도 없는 세상철학들을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고 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이 덕망 있는 목사라고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한 일입니다.

 

네 번 째로 바울은 '진리를 나타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리'란 하나님의 신적 성품으로 신뢰와 신실을 포함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멘'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저들을 악에서 보전 하소서'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세상의 철학이나 학문을 교회에서 가르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학문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도덕은 가정에서 가르치면 됩니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연구하고 잘 살펴 하나님의 진리를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사역자로 삼으심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기록하였습니다.

 

다섯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비판을 받을 것이 없이 하나님과 각 사람의 양심에서 조금도 꺼리낌이 없어야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말한 바로 자신이 판단을 받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의 양심에 꺼리낌 없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설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위에서 언급한 것은 새 언약의 일군들이 스스로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하여 말한 것이지만 사역자들로서 꼭 명심해야 할 것이 더 있습니다.

 

여섯 번째로 바울은 10절에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 이라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예수를 죽인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악이며 우리 육체의 소욕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우리의 죄 값에 넘기셨습니다(고후5:21)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더하고 있습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니라"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의 보다 깊은 사고와 지식을 요하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란 불가사이의 세계입니다. 오직 믿음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들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말하며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안다"고 증언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다음 장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표면적 사람은 철저하게 오염되고 쇠약해질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신 은혜를 말미암아 날로 새롭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려 함이라"(17절) 말하며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읽으시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묵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평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