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후서

(고후2:15) 그리스도의 향기를 찾아서

이요나 2007. 2. 27. 15:24

(고후2:15) 그리스도의 향기를 찾아서

 

(고후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바울은 1장 마지막 절에서 "우리가 너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글 속에서도 다 큰 아들을 염려하는 부모의 어려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마칠 때까지 이와 같은 심정으로 때로는 엄하게 책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의 상한 심령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1장 끝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한 이유는 그들 속에서 바울의 이같은 염려와 가르침에 대하여 지나친 간섭이라고 말하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끌어 갈 때쯤이면 알게 될 것입니다만 청년 때에는 자신이 하는 일들이 나름대로 소신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하는 일을 염려하여 부모들이 조언을 하면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경륜으로 보건데 자식의 하는 일이 미덥지 못한 부모는 틈이 있을 때마다 충언을 하게 되지요, 대게 이때쯤되면 자식들은 나도 알만큼 아니 제발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라고 불쾌해합니다.

 

바울은 2장 서두에서 "내가 다시 근심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다"고 말하며 이유에 대하여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일로 근심하고 있는 자식의 모습을 보고 노심초사 하는 부모의 마음이 역역합니다. 이 글 속에서 우리는 바울이 이 일로하여 얼마나 큰 근심을 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바울의 근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고린도 전서 5장에 언급한 음행한 사람을 출교한 일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를 고린도 교회가 용납하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심한 책망을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와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 그를 판단하였다" 하였고 "너희는 내 영과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를 사단에게 내어 주라"하였습니다(고전5:3-5).

 

그러나 그러한 편지를 보낸 후 바울은 견딜 수 없는 아품과 애통함에 빠졌습니다. 그 이유는 출교를 한 그 사람도 자신의 제자였고 예수를 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의 형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의 자신의 애통함에 을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의 판단은 그 일을 한 자를 미워해서 아니라 그의 음행이 교회안에 누룩처럼 번져 나갈 것을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린도전서가 시작될 무렵 정말 아픈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마침 고린도전서 5장을 강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제가 자식처럼 생각하던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정말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있는 청년들이였습니다.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여러번 거듭하며 그래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하였고, 군대를 갖다 온 후 이제 그들은 청년의 시기를 맞아 제2의 도약의 인생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심취되어 오직 주를 향한 믿음생활을 다짐하며 자신들의 연약한 부분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그들 가운데 심각한 이성적 삼각관계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을 자식처럼 여겨왔던 터이라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설명하며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기를 여러번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가슴에 지펴진 뜨거운 불길은 꺼지지 않고 더 다른 방향으로 번저가고 있었습니다. 믿음생활은 물론 가정과 사회생활까지 질서를 잃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라도 취하려는 각오가 된 것처럼 마음과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나 역시 불같은 젊은시절을 겪어 왔었기에 그 불은 누군가가 끄지 않으면 스스로 꺼지지 않고 오히려 집 전체를 불사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 역시 자신의 감당할 수 없었던 욕정을 술회하면서 "말이나 노새는 굴래와 멍애로 제어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나오지 않는다" 말하였습니다. 나는 더이상 멈추지 않을 것이라면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이미 그 청년은 교회를 나오지 못하는 아품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책망에 승복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것으로 저희 교회를 떠났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정말 왜 더이상 참아주지 못하였는가 자책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 당시는 왠일인지 내가 더 참을 수 없는 심령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마 이 일은 내 목회 일생 속에서 나를 자책하는 올무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의 심정은 정말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 아이를 사랑하였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아들에게 더이상 말을 듣지 않으려면 나가라고 야단했을 때 정말로 집을 뛰쳐나간 자녀를 경험해 보신일 있습니까?

 

이런 일은 부모에게 있어서는 심장이 떨리고 피가 꺼꾸로 끓어 오르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또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해도 잘못된 행동에 대해 묵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묵인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자식들이 어른이 되어 자신도 자식을 낳아 기르게 되면 그 때에 부모들의 진정한 사랑과 아픈 마음을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음행으로 출교한 형제의 문제는 자신의 근심이기도 하지만 "나를 근심한 자는 어느 정도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 이라고 말하여 그 문제가 고린도교회에도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바울은 그들을 생각하여 "어느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않으려 함이라" 말하여 그들의 심적인 부담을 덜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바울의 심중이 무엇인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여 음행의 물결이 교회 전체를 더럽힐 것 같아서 눈물을 먹음고 그를 출교 선언하였지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눈물로 괴로워하고 애통해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애통해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오히려 앓던 이 빠진 것처럼 생각해 버릴 것입니다.

 

바울은 사실 그의 죄를 묵인하던 함께 동거동락하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함께 회개하며 그와 함께 그리스도께 돌아 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자마자 오히려 바울 보다도 더 엄격하게 그를 대하고 짐승보듯하고 교제를 단절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바울은 6절에서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족하다"말하였습니다. 그들이 당연한 일을 한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에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는 말 안듣는 자식을 책망하고 때리지만 부모는 그 형제들이 나서서 그를 감싸고 대신 매맞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야곱의 아들 유다에게서 발견합니다.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갔다가 오히려 아버지의 사랑하는 말째 아들을 볼모로 잡히고 돌아 온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애굽에 가서 사랑하는 아들을 데려 오겠다고 울며 아버지를 설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다를 사랑하여 유다지파로 메시아의 가문을 삼았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에서도 탕자의 비유를 볼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은 돌아 온 탕자를 위하여 축하 파티를 열고 있는 아버지를 못마땅히 생각하여 언제 나를 위해서는 빌어먹은 닭한마리라도 잡아 준일 있습니까 하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부모라면 어떻겠습니까? 내어 쫓은 아들은 제 스스로 돌아 올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누가 동기 부여를 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형제된 자가 더 야단치고 덩달아 큰소리로 정죄를 한다면 그것을 보는 아비의 마음은 가슴을 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아비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큰 아들을 야단치지 못하고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 하노라"(7절) 하고 넌즛이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눈물겨운 사랑의 편지입니까? 방탕하고 패역한 자식을 내어 쫓고 밤마다 눈물짓는 아비의 마음이 엿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패역한 인간을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다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더 나아가 바울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할 수는 없고 엎드려서 절받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였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하였습니다. 이것은 반 협박이기도 합니다. 그를 용서한 것이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한 증거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라고 말하여 그들로 그 일을 아니할 수도 없는 입장이 되게 합니다. 바울의 카운슬링은 정말 최고입니다. 그가 목회 심리학을 배웠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절을 받던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망설임으로 사단이 어부지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아들이 자신의 육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사단에게 돌아 갔다면 누가 손해 본 것입니까? 하나님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백마리가 자기의 양이였었던 것입니다(눅15장 참조).

 

사실 바울은 디도를 통하여 이에 대한 결과를 듣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래서 드로아에 갔지만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하자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다시 마게도냐로 건너 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께서 누가북음 15장에서 비유로 하신 돌아 온 탕자의 소식을 듣고자 하는 아비의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서술하였습니다.

 

오늘 이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바울의 마음이 어떻게 느껴지고 있습니까? 성경말씀을 잘못 해석했다고 이단이라고 정죄하여 내어쫓은 아들을 망나니라고 두둘겨 패야 속이 후련하겠습니까? 당신의 가슴에 야곱의 울음이 들리지 않습니까? 당신의 마음에 아비의 마음을 아들에게 돌리려하는 유다의 결단은 없습니까? 누가는 그의 서신 1장에서 세례 요한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 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이 글에서 우리의 불의를 보고 화가 나신 하나님을 돌이키는 역활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를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화요일 저녁 모임에서 누가복음을 강독할까 합니다. 화요일 저녁 그리스도의 향기 기대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