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후서

(고후1:4) 위로의 하나님

이요나 2007. 2. 27. 15:26

(고후1:4) 위로의 하나님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응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오늘은 고린도후서 2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게된 배경을 살펴 보면서 고린도후서가 우리 믿음생활에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최근 한 형제와 함께 매일 아침 일본어로 고린도후서를 한장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9장을 공부했습니다. 외국어를 하시는 분들이면 모두 공감하시겠지만 저의 경우는 일본어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의 깊이를 더 사고하게 됩니다. 매일 아침 고린도후서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정말 뜨거워집니다. 저의 이 뜨거운 마음에 여러분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기를 기도합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만 일주일에 다니엘과 고린도후서를 함께 공부하며 설교문을 작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무리입니다. 주일 오후에 진행되는 마태복음까지 그리고 화요일 저녁 카운슬링 스쿨까지 하면 성경책을 끼고 살아야만 합니다. 목사가 그것도 독신자 목사가 성경책을 끼고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 저의 경우는 입안이 헐지경입니다. 나름대로 4년동안 칼럼을 써왔기 때문에 지금이야 많이 익숙해졌지만 독수리 발톱을 날리며 컴퓨터와 싸우는 시간은 제게 있어서 가장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고 고통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를 읽으면 거대한 강을 만나는 느낌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울의 필체가 묵묵히 하늘의 뜻을 먹음고 흐르는 강물같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격동의 파도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울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고린도후서로서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길 떠나보낸 어린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을 엿볼수 있으며 과년한 딸을 시장 한 복판에 내놓은 어미의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보다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고린도전서를 세밀히 공부하여야만 합니다. 더우기 1장부터 5장까지를 통해서 고린도지역의 성도들의 성품과 지역적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고린도서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는 저의 삶의 배경과 또 저의 성품이 흡사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지역 사람들은 한마디로 야생마와 같은 사람들이였습니다. 정말 가까히 하기 힘들고 사귀기 심히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겪으셨겠지만 세상 깊은 곳에 살던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지성과 사고력을 가추지 못하여서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만약 당신 주변이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은 고린도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접근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1장에서 먼저 '위로'라는 단어를 9번 사용하였습니다. '위로'라는 '팔라클레시' 원어는 보혜사 성령과 같은 어근을 가진 말로서 '옆에서 부른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난 받은 사람 옆에 자신의 고통을 알아줄 사람이 옆에 서있다면 그보다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란 어떤 책망이나 고통이나 환난 가운데 필요한 것입니다. 기쁨에 차있을 때에는 위로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왜 위로가 필요하였을까요? 우리는 앞에서도 살펴 보았지만 사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의 잘못들을 일일이 열거하여 책망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실 복음을 접한 후 하나님의 많은 은사를 받아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의기양양하였었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세상 가운데서 막 살아가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라는 영광된 위치에 있는 하나님의 예배자였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의 앞을 가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당당하였고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로 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가운데서 더렵혀진다 책망하여 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일일이 열거하여 그들의 잘못된 행동들을 밝은 빛 가운데 벌거벗겨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고린도전서를 일을 때 그들의 심정은 차라리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했었을 것이고 정말 하나님은 고사하고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사람이 아니로다"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정말 잘하는 것인 줄 알고 세상 사람들 앞에 얼굴을 꼿꼿이 내밀고 거룩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지도자의 입장에 서왔었는데 사실 그들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은 불안전하고 먹을 수 없는설익은 밥이였습니다. 그동안 주인 없는 곳에서 종이 상전 노릇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저들을 향하여 너희가 우리 없이 왕노릇하였도다 책망하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 중에는 옛날의 모습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 아직 음행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아버지의 처와 통간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를 내어쫓지 않은 고린도교회를 심하게 책망하며 내가 그를 이미 시단에게 던져 주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살펴 보건데 그들의 믿음이란 정말 부끄러움 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와 성도들 앞에서는 물론 세상 가운데서 왕노릇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나는 고린도전서를 끝내고 이제서야 내 수치스런 모습을 발견하게되어 이 말씀들이 모두 바로 나를 향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많은 사역자들이 다녀갔습니다. 게바의 이름도 나오고 또 바나바는 그들의 담임으로 오랫동안 복음의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실로 그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쩌면 더이상의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신학적 높은 지식과 복음의 지식들을 주로부터 받았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도이며 그들의 스승인 책망의 글을 받아 든 그들은 천길 낭떨어지 앞에 선 낙오자의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스승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아 본 일이 있었는지요? 사실 저는 거의 동년배인 스승들로부터 만날 때마다 책망을 듣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나의 스승들이란 주께서 내 앞에 세우신 선배 목사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나는 정말 지옥 끝에 선 것같은 기분이고 정말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낙담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앞의 편지에서 내가 가서 모든 것을 바로 잡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노도와 같이 성난 스승의 얼굴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자가 누구겠습니까? 누가 바울 보다 더 깊은 지식이 있어서 또 누가 바울보다 더 큰 은혜를 입은자가 있어서 그에게 항변을 하겠습니까? 누가 바울보다 높은 지혜와 학문을 가추었겠으며 누가 그와 같은 하나님의 경륜을 갖고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바울의 책망 앞에 고개를 들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설혹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해도 말입니다.

 

바울은 서신을 보내고 정말 오랫돈안 심한 고통과 눌림에 빠졌습니다. 바울은 2장 서두에서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결단했다" 말하며 3절에서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다"하였습니다. 이것은 먼저번 편지를 보낸 후 바울의 솔직함 심정을 털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2절에서 바울의 마음을 거울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말하고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라"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글 속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마음입니다.

 

저는 얼마전 정말 자식처럼 사랑하던 두 이이를 책망하였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 따위로 할려면 차라리 나가거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그 애들은 나가버렸고 아직 돌아 오지 않습니다. 사실 고린도전서가 시작될 무렵이였습니다. 그러니 벌써 육개월이 되었군요, 나는 그 애들을 내어 보내고 많이 울었습니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다가도 깨어 통곡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내 일생이 그처럼 고통스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되돌이킬 수도 없고 이미 업지러진 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눈이 나를 지켜 보고 계신 것 같기도하고 스스로 목회를 접는 것이 옳다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나에게 이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일만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책망을 하지 않으면 내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었습니다.

 

아마 내가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였다면 좀더 세련되게 그들을 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나의 마음은 그들이 돌아와 또 같은 일을 거듭한다면 나는 또 똑같은 입장이 될 것입니다. 어찌 자식의 잘못 보고 참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것이 나의 단점이고 또 장점이기도 합니다. 나는 고린도후서를 보고야 내 앞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내가 겪어야만 될 일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내게도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그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뵙겟습니다. 펑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