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후서

(고후8:9) 가난과 부요의 은혜

이요나 2007. 2. 27. 15:18

(고후8:9) 가난과 부요의 은혜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효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입니다. 이 부분은 헌금과 관련된 내용으로 어쩌면 헌금에 대한 정의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내용은 고린도전서 16장과 관련된 부분으로서 왜 바울이 이처럼 연보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문맥을 따라 살펴 볼 때 바울이 말한 메게도냐 교회에게 주신 은혜란 '연보' 즉 헌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카리스)란 단어는 "기쁨'을 갖다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은혜'는 또 '은총'으로도 기록되었는데 그 뜻을 잘나타나 있는 곳은 다니엘과 누가복음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가 말한 것으로 다니엘은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하였고 누가는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눅1:30, 2:40)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라고 할 때 구원의 은혜, 영적축복, 평안과 기쁨, 성령의 은사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마게도냐에게 주신 은혜'라고 말하였습니다. 연보란 말할 것도 없이 헌금을 말하며 자신의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물질은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입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그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 매스컴을 보면 돈있는 곳에 재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은행들이 난리이고 재벌들이 목숨을 끊고 정치인들이 옥에 들어가고 노사가 분규하고 요즘 눈만뜨면 억억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아마 이요나가 넘어지면 댕그렁하는 소리가 날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구요? 동전 쏟아지는 소리내구요? 아니요 교회문 열쇄고리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어쩌면 궤변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환난의 많은 시련과 가난 가운데서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어느날 연보궤 앞에서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과 어느 한 과부가 두렙돈을 넣는 것을 보며 제자들에게 이 여인이 가장 많은 연보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자들이 더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다만 부자에게 있어서 연보는 있는 중에서 내는 것이고 그 과부에게 있어서 두렙돈은 먹고 살기 위한 전 재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주님은 부자 청년이 재산이 많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 가는 것을 보고 부자는 천국에 들어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 하셨습니다. 이 젊은 부자에게 있어 돈은 생명의 올무였습니다. 우리가 이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각 사람에게 있어서 물질의 위치입니다. 과부에게 있어서 물질은 삶의 도구일 뿐이고, 젊은 부자에게 있어서 물질은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는 권세였습니다.

 

주님은 세금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옳으냐고 시험하는 바리새인을 향하여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돈이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있어 물질에 대한 가치관이 어디에 있느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였다" 하였습니다. 바울의 글을 미루어 보건데 지금 마게도냐 사람들은 극한 환난과 가난에 빠져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방인들은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빈곤한 자들이였고 마게도냐도 로마정치 배경 속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사람들은 어려운 중에서 누구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자원하여 헌금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이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였다" 증언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연보를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로 나누어 정의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섬기는 일이란 '코이노니아'를 의미 합니다. 즉 성도의 교제 가운데 나타나는 당연한 의무와 책임입니다. 또 그들이 그 일을 간절히 구하였다는 말로 보아 바울은 그들의 형편을 아는지라 만류했었던 것 같습니

 

우리는 바울은 어떤 이유로 연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하였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없는 살림에 헌금까지 떼어 놓으면 그 액수만큼 생활비가 줄어 드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더구나 삶의 환난 가운데 처한 성도들이 자신의 교회도 아닌 어려운 다른 교회에 헌금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의 비밀을 9절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효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 언급합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축복을 받을 기회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스스로 기쁨으로 헌금에 참여할 마음의 소원을 갖게 하셔서 그로 장차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기리며 "저희가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헌금은 먼저 주께 자신을 드리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주께 드린 사람은 자신에게 있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만약 주께 헌신이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생의 애착 때문에 아무리 물질이 많아도 헌금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 당시 교회의 시초이며 토대인 예루살렘 교회가 당한 환난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로마와 유대인의 박해 뿐이 아니라 기근까지 겹쳐 정말 살아가기 힘든 처지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6장에서 날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와 그들의 식탁을 공궤하는 일로 교회가 혼란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극심한 환란과 가난에 처한 마게도냐 성도들이 그 소식을 듣고 스스로 자원하여 예루살렘 돕기 운동을 벌렸던 것입니다. 이에 힘을 얻은 바울은 하나님 앞에 뜻을 세워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도를 아가야 일대와 고린도교회에 보내어그들도 이 은혜와 섬기는 일에 동참할 것을 권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한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어떻게 헌금을 명령으로 하겠습니까?

 

요즘 많은 교회들이 말라기 3장에 기록된 말씀을 들어 헌금을 의무적으로 강요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의 헌금 강요로 믿지 않는 자들은 교회가 강제로 갈취한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에세 가장 은혜로운 말씀은 마지막 절에 기록된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6)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갈보리채플 사역 가운데 정말 눈물 겹도록 감사하는 세 여인이 있습니다. 한 여인은 지금 홍천이라는 시골에서 남편과 돌보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여전도님이시고 또 한 여인은 가정적으로 환난을 격고 있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또 한 자매는 우리 젊은이들의 모임 가운데 한 자매입니다.

 

이들은 모두 넉넉하지 못하여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입니다. 그러한 중에도 이들은 제가 정말 더이상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 처해 있을 때, 꼭 제가 필요한 만큼의 헌금을 하셨던 분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내가 그 만큼의 물질이 필요할 것이라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나 또한 나의 어려움을 누구에게도 말한 일도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이들은 기도 중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에 동참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커다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헌금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정의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효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9절) 이 말씀은 정말 우리의 마음을 다시한번 새롭게 하게 하는 냉수와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께서 하늘보좌를 버리고 오셨던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는 당연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풍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자리를 버리고 가장 낮은 곳에 내려와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에 들어 가기를 소망하여 주님으로부터 그 방법을 듣고도 재물이 많아 근심하며 돌아 갔습니다.

 

바울은 "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헌금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땅에 심는 한 알의 씨앗과도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곤란함을 듣고 그들을 도와야 할 마음을 갖고 기도하며 이방인 교회에 뜻을 세웠습니다.

 

사년전 저는 카페 크리스챤 펠로우쉽을 개설하면서 재소자 돕기 운동을 함께 펼쳤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보내고 믿음에 유익한 책자들을 보내며 무연고자들에게는 작지만 조금씩 영치금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일에 동참한 사람들은 카페 모임이 아니라 칼럼을 통해서 성경을 공부하는 일반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얼굴도 모르고 그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한 일도 없었지만 아직도 매월 조금씩의 헌금을 보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 즉 이제는 이 일을 성취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보내기로 한 헌금을 일년이 지나도록 즐겨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6장의 편지에세 연보의 필요성을 언급하였고 그들은 디도편에 쾌히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그들은 미적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바울이 헌금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일년전에 디도로 통해서 온 바울의 편지를 보고 흥분하여 서로 헌금을 모으자고 맹서를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고린도 사람들의 성품일지도 모릅니다. 육적인 습성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일에 쉽게 흥분하고 또 쉽게 돌아서기도 합니다.

 

바울은 12절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기록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없는 것을 어떻게 내겠습니까? 헌금은 뜻이 세워져야 하고 그 다음에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6월 미국에 다녀오면서 여렵게 헌신한 젊은 선교사를 만났습니다.그는 100불이면 한 가족의 생활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 매월 100불씩 보내기로 마음으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헌금의 세번째 정의를 가르켜 "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 유여한 것으로 저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13-14) 말 하였습니다. 여기서 '평균케 한다'는 말도 '코이노니아'인 것을 기억하십시요. 어떻게 보면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에게 엎드려 절 받는 것 같습니다.

 

이때 디도가 다시 일어나 그 일을 성취시키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용기이며 견단입니다.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간절한 마음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16) 하였습니다. 디도는 바울의 간곡한 기도와 또 이 일은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평균케하고 또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토대임을 깨달아 스스로 자원하여 나섰습니다. 환란의 때에 돈을 걷으러 나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울은 19절에서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19)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디도의 사역적 택함과 주로 받은 은사를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헌금의 사역도 주께서 주신 은혜가 아니면 동참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20)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물질에는 항상 사단이 역사 할 수 있음을 주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판 가룟 유다도 돈궤를 맡은 자였읍니다.

 

우리는 몇 대의 대통령을 지켜 보면서 돈에 결백한 대통령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들과 그의 측근자들이 모두 돈과 연루되어 모두 쇠고랑을 찼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도대체 수천억의 돈이 어디서 그렇게 쉽게 모여질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결국 어떤 재벌은 수천억의 돈을 내어 놓고도 부정과 연루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디도 외에 다른 형제를 보내며 "우리가 여러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22절)고 증언하였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물질 관리에 신중했던 것은 물질로 하여 헌신된 사람들이 시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와 같은 일에 믿을만한 증거를 가진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장차 받을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며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증언 하였습니다. 이 말은 출애굽 당시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거둔 일을 인용한 일입니다. 우리의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좋아할 말같습니다만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평균케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는 많아서 주체를 못하고 어느 교회는 눈물의 빵을 먹는 오늘과 같은 세대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전달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상고하며 헌금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은사임을 다시 기억하고 우리도 그러한 은사가 주어지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주에 이어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