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후서

(고후10:17) 너의 자랑이 어디에 있느냐?

이요나 2007. 2. 27. 15:16

(고후10:17) 너의 자랑이 어디에 있느냐?

 

(고후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고린도후서 10장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고린도전서에서 다루지 못하였던 것들을 조심스럽게 다루었습니다. 마치 다 큰 아들들에게 말하듯 먼저 번 편지로 하여 상한 심령을 위로하고 또 그 진실을 권고하기도 하며 또 잘못된 일들을 책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헌금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들을 세밀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10장에 이르러 바울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격한 심정과 노한 얼굴로 나타납니다. 바울의 태도는 12장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에 대하여 비방하는 무리를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고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체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를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1-2절).

 

여기서 '겸비하였다'라는 말은 바짝 몸을 나추었다는 뜻입니다. 또 '담대하였다'라는 말은 당당하게 하고자 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자기의 직무를 그의 제자 여호수아에게 위임하면서 '담대하라' 명하였습니다. 그는 종의 아들로서 아직 지도자의 경험이 없었고 백성들 속에는 나름대로 경륜과 지식을 가춘 어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겸비하였고 떠나 있으면 '담대하였다' 말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성도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바울의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미천한 출신들이었지만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기 때문입니다(고전1장, 12장 참조)

 

바울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말하여 이제 곧 그들에게 나아가려는 의지를 표명하였습니다. 무엇인가 그들 속에 발생된 문제에 대하여 면대하여 담대한 태도로 규정을 지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격한 감정이 노출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관용으로 권면'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바울이 지금 얼마나 격한 감정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머리 큰 아들과 함께 살 때, 아들에게 아직 못마땅한 것이 있어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갑니다. 그 이유는 아직은 자기 슬하에 있으므로 바로잡을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객지에 나간 아들이 누군가에 꼬임을 받아 잘못된 길로 나간다는 소리가 들리면 부모는 당장 전화를 걸어서 야단을 치고 분노하여 달려 나아갑니다. 그 이유는 아직 세상을 사는 경륜을 터득치 못한 아들의 장래가 달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들 중에 발생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단단한 각오를 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 가운데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이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여기서 육체대로라는 것은 바울의 사역은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당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사역에 대하여 비방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방교회에서 헌금을 걷는 것은 예루살렘의 구제를 빙자하여 개인적인 축재를 위한 것이라 의욕을 제기한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3절)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미디로 영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육체로 대항할 일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정말 가슴으로부터 분노가 일어나 자칫 잘못하면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분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4절)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들의 정체를 완연하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진(陣)은 전쟁을 위한 군사들의 작전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들은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방해하기 위해 막강한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그들의 무기를 언급하여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나니"(5,6절)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잘못된 지식을 따라 미혹된 마음과 생각에서 높아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론'이란 그 당시 유행하던 사상과 철학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그들이 자신하는 것만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 이런 것들은 '스스로 높아진 지식'들에 의해 나온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권세를 자신이 친히 부르시고 세우신 '사도'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권위에 도전하는 믿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셨다"(행15:7) 말하였습니다. 또 바울에 대하여는 주께서 친히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하셨습니다.

 

세번째로 바울은 그들의 "모든 생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생각'이란 '보는 것'에서 나오며 또 우리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성경은 '너희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라고 말하며 '너의 보는 것이 무엇이냐' 기록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보는대로 생각을 갖는다면 우리의 길은 패역한 길로 달려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주 앞에서 온전하면 우리는 눈으로 보는대로 생각하지 아니하며 우리의 마음은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너의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기록하였고 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너의 생각을 지키라 이에서 생명이 나오니라'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하였습습니다. 이것은 아직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온전히 복종치 않은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무엇에 대한 복종을 말하는 것일까요? 얼핏 오해하면 헌금에 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바울은 말씀에 대한 복종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복종치 않는 대적자들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 사이에 몰래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기에는 나름대로 믿음과 지식을 갖고 있고 경건한 것 같고 언변이 출중했으며 막강한 가문과 출신의 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미혹된 고린도교회를 책망하여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7절)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복음의 은혜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7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에 속한 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7절)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미 '너희가 우리 없이 왕노릇하였다'지적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복종치 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고자 하는 이유에 대하여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세우라고 하신 것이라"(8절)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서울 갈보리채플을 개척하면서 우리의 사역을 도말하고자 하는 무리들을 여러번 만났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높아진 것은 아직 복종치 않은 것들이 그들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그리스도에 속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 그들이 자랑하는 이론들이 도사리고 있는 본부로 나아가 그들의 높아진 것들을 그리스도 앞에 복종시킬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의 실마리를 다음과 같이 꺼냈습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에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10-11절).

 

바울은 어쩌면 남들처럼 능변치 못했었는가 봅니다. 또 그는 이방 전도로 인하여 겪은 고난으로 하여 많이 쇠약하고 초췌하였으며 그의 기도로 보아 신체적으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연약한 부분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에 이끌리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주로부터 구변의 은사를 받아 참으로 말에 능통하였습니다(고전1:5. 고후8:7). 또한 그들을 가르친 성경학자 아볼로는 지식과 학문을 갖춘 달변가였습니다. 그러니 초췌한 외모의 바울을 탐탁지 않게 여겼었는가 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능력이 어디 말에 있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은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에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대적하는 자들과 자기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여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12절)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지혜와 지식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분량의 한계"(13절)를 따라 자랑한다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것으로 자랑하는 자들을 향하여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15절)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는 복음의 지혜와 지식은 모두 사도들에게 주신 분량의 한계를 따라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누구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 분량으로 한계를 따라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의 제자된 우리들에게 나타난 모든 능력들로 그들의 이름은 더욱 위대하여지며 그것은 곧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요15:8)

 

저는 실제로 미국의 갈보리채플 척스미스 목사님 교회나 신학교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갈보리채플의 한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 지금까지 척스미스 목사님의 목회철학과 그의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성경을 공부하였습니다.

 

물론 그분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분량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오늘날 갈보리채플의 모든 사역자들과 부족한 나 또한 그에게 주신 분량의 한계 속에서 성장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가르치는 바 모든 지식은 모두 그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전도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16절) 또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스승보다 높아질 수는 없으나 노력하며 스승과 같이 되리라 ' 하였습니다.

 

그리므로 우리의 자랑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여야 할 것'(17절)입니다. 바울은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18절)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무엇을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바울은 너희가 받지 않은 것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분량의 한계를 따라 오직 부르신 그 일을 행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