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후서

(고후9:15) 말할 수 없는 은사

이요나 2007. 2. 27. 15:17

(고후9:15) 말할 수 없는 은사

 

(고후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오늘은 고린도후서 9장입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8장에서 헌금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평균케하며 가난한자들을 부요케하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정말 인간의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오늘 9장에서 바울은 다시 헌금에 임하는 자세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성도들에게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만 바울도 이 문제를 편지의 맨 뒷부분에 둔 것은 그러한 염려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은 1절에서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정말 엄청난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교회입니다. 바울은 "오직 너희는 믿음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전8:7)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부족함이 있다면 어려운 성도를 섬기는 은혜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우리 말에는 종의 종노릇은 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모두 자신의 과거의 처지를 생각 못한다는 말입니다. 종이 상전이 되면 그 누구도 밑에서 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24장에는 벨릭스라는 유대 총독이 나옵니다. 그는 원래 노예의 신분으로 자유민이 된 후 유대총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술수를 써 유대인 아내 두르실라와 결혼을 하였고 돈과 출세를 위한 일이면 그 무엇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그당시 지식인들은 벨릭스의 행위에 대하여 '벨릭스는 노예의 정신으로 직무를 수행하였다'고 비난했습니다. 과부의 사정은 과부가 잘 알듯이 종의 심리를 잘 알기 때문에 더욱 혹독하게 부린다는 말입니다.바울은 그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행24:24)을 강론한 바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못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부자가 되면 그 마음이 교만해저 지난 날의 자신의 어려움과 아품을 잊고 물질에 더 집착하고 인색하여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2절에서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교린도교회 사람들이 성도를 섬기는 일 즉 연보에 대한 소망은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원함을 듣고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아가야 일대의 성도들이 일년 전부터 연보를 준비하고 있다고 자랑을 하였었습니다. 바울은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일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마게도냐 사람들이 극한 가난에서도 넘치는 연보를 드린데 비해 그들에게서는 열매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혹 마게도냐 사람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 하노라"(4절) 염려하였습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었다"는 말씀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그 자랑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형제들을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를 섬기는 일과 헌금은 마음의 열정적 소망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성도의 아품과 어려움을 들을 때 사실 우리의 마음은 격동되어 쉽게 그들을 돕고자 하는 충동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열정적 충동은 얼마가지 못하여 자신의 현실과 타협을 하고 맙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성도를 섬기고자 하는 열정이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헌금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믿을 때 이미 남을 돕고자 하는 은혜가 주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이 여러가지에 얽혀 돕고자 하는 그 열정과 마움의 소원이 물질주의적 현실 속에 묻혀 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돈이 있어서 그 마음이 생겼을 때 뚝 떼어서 드리면 되겠지만 요즘같은 세상에 그런 여유를 갖인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미리 준비하라'고 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드릴 때에나 헌금을 하기로 작정을 하였을 때 매월 자신의 수입에서 조금씩 모아서 준비를 한다면 그는 정말 복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하였습니다. 우리가 단번에 십 여 만원을 선교헌금으로 드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게 이런 경우에는 한번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일에 매월 몇 만원 혹은 얼마씩 모아서 마음이 정한 그 일에 준비를 한다면 그 순간마다 그는 감사와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며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헌신된 마음과 준비에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이것이 곡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잠11:24)라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잠언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심음의 법칙이며 또 헌금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법칙은 영적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이것을 드리므로 축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마음에서 즐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바울은 "각각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8절에서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아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정의 하였습니다. 헌금의 목적은 우리의 넉넉한 것을 덜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은혜와 함께 우리에게 더욱 풍요롭고 넉넉하게 하기 위한 심음의 법칙인 것입니다.

 

우리가 씨앗을 심는 목적은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은 많은 중에 덜어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때로는 나도 돈이 많으면 많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돈이 많아도 결코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벨릭스처럼 노예의 생각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 나갈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게는 심을 씨앗 조차 없다고 생각하기 일 수입니다. 오히려 나는 남에게 도움을 받아할 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사람들은 극한 가난속에서 풍성한 연보를 드렸습니다(고후8:2). 우리는 잘사나 못사나 하루에 세끼의 밥을 먹고 살아 갑니다. 아무리 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 나름대로 자기의 생활을 이끌어 갑니다. 빚을 진 사람도 그 빚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고 또 때로는 허망한 것에 쓰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울은 "심는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의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의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11절)라고 말하였으며 또 시편기자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9절)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의로운 열매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도들의 의로운 마음으로 심은 그 씨앗은 의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번 6월 코스타메사 갈보리채플 목회자 컨퍼런스에 참여하여 정말 위대한 사역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구스노키(Gary Kusunoki) 일본인계 미국 란초 갈보리채플 담임 목사로서http://www.ccrsm.org/pastorgary.shtml) 나보다도 키가 작은 젊은 목사였습니다. 란초 갈보리채플은 미국 갈보리채플 중 그다지 큰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찌기 남아프리카에 열정을 갖고 그 중에 수단이라는 나라를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시작은 영혼을 사랑하는 아주 단순한 사랑의 마음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는 그를 따르는 성도들과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수단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여 구제양식과 질병치료와 그리고 학교사역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처럼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열정을 다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자들을 도우며 실제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그 운동이 이제는 전 미국으로 확대되어 매년 수천명의 크리스챤들이 아프리카돕기에 동참하고 있으며 이제는 수단 왕이 그의 사역에 감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의 부족한 것만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하였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감사가 넘치게 하는 살아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복음전도라는 열정만을 가지고 나아가 헐벗고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외면하고 주를 믿으면 잘 살 것이라 말한다면 그는 무지몽매한 자가 되어 외면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 직무의 중요성과 그 가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연보로 어려운 성도의 삶을 지킬 수 있었다면 그가 어찌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 않겠으며 그가 어찌 우리를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끝으로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헌금은 우리 없는 자들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인 것입니다. 이 은사는 주를 믿는 모든 자들이 이 은혜를 받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함께 주의 풍요로움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은혜가 우리에게 미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헌금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