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후서

(고후12:11) 약할 때 강함이라

이요나 2007. 2. 27. 15:14

(고후12:11) 약할 때 강함이라

 

(고후12:11)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때 곧 강함이라"

 

오늘로서 고린도 후서가 끝이 납니다. 고린도 후서를 시작할 때에는 별로 흥미롭지 못한 책이라 생각하였습니다만 내가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부분들을 깨우쳐 준 곳으로 바울은 여기서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는 믿음의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우리는 12장과 13장을 함께 살피며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가르침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10장과 11장에서 아주 강한 어조로 성도들을 잘못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을 경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저희는 거짓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11:15)하였습니다.

 

우리는 11장에서 비천하도록 주의 사역에 헌신한 바울의 간증을 들으며 정말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안한 삶이 그냥 온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아들들을 위하여 자신의 아름다운 그 모든 인생의 것 모습들을 불태워 버리고 마치 노예와 같이 비천한 삶을 살며 끝내는 몸을 깨뜨려 피흘려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완성하였습니다.

 

오늘 12장 서두에서 바울은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무익하다는 말은 이러한 자랑이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신을 하여 천국을 갔다 왔다하며 자랑을 하고 다니고 있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환상과 계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환상을 보았다하면 그 환상은 계시를 포함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환상들은 모두 계시적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계시는 더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은 완성되었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자신의 환상을 언급하여 "십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께 속한 신비의 세계를 이끌어 내어 설명하는 부분이므로 온전한 번역이 쉽지 않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현실 삶 속에서 세번째 하늘에 이끌려 갔었던 일을 제 삼자적 견지에서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층천이란 하늘나라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짐작조차 불가능한 신적세계입니다. 몰몬교를 비롯한 신비주의 자들은 일곱개의 하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바울이 셋째 하늘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바울은 하늘나라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과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그리고 셋째 하늘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3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 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 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하였습니다. 바울이 두번이나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 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니라)고 주석을 단 것으로 보아 바울은 자신의 영이 몸안에 있었음을 의식하며, 또 자신의 영이 몸밖을 나갔던 것을 의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낙원으로 이끌려 갔다'고 진술하였습니다. 낙원이란 원래 이란과 헬라의 경계선을 가르치는 말로 여러가지 많은 열매가 가득한 정원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왜 이란어를 사용하여 '낙원'을 설명하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신학적으로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성도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쉬는 곳으로 주님은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말씀하셨습니다. 어원을 미루어 생각하건데 '낙원'이란 육체와 하나님 나라의 경계선일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만 바울의 증언으로 낙원은 세번 째 하늘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낙원에 이끌려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 또 누구를 만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는 증언으로 낙원은 이 땅의 현실 가운데 설정된 공간이 아닌 것만은 사실입니다. 복음서에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보보는 주께서 고난 받기 전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상에서 신비의 세계를 체험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빌립보의 높은 산으로 올라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세계를 체험하였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는 주님과 말씀을 나누는 모세와 엘리야를 본 후 "주여 우리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말 하였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자신의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베드로의 말로 보아 그들은 이 땅에 설정된 또 다른 현실세계를 보았음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두 사건을 배교해 볼 때 베드로가 체험한 곳은 첫째 하늘인지 아니면 둘째 하늘이였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다른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으로 가히 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고 베드로는 인간의 말로 주와 교통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환상 속에서 신적세계인 낙원을 체험한 바울은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아니하리라"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경지 즉 인간으로서는 더 나아갈 수 없는 신적세계에 도달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에는 다니엘과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그리스도를 만났었던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때 이들은 모두 육체의 죽음 직전의 상태 속에서 육체가 썩는 듯한 체감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체감과 감각들은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는 신적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중 가끔 아주 고도의 경지로 들어 가, 무의식과 의식이 중복된 상태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잃어버린 감각의 상실 상태에 이를 때도 있지만 이것은 믿음 가운데 설정된 하나님과의 가시적인 통로이지 천국 문의 억만 분의 일에도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도의 경지에 들어간 것도 신비의 체험이거늘 바울과 같이 낙원의 경지를 체험한 사람이야 말로 이 땅에 있는 것 그 무엇을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처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라"(7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계시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신적 계획을 밝히 드러내신 거룩한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임할 많은 계시들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자신이 받은 계시들로 스스로 높아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육체에 가시를 두셨다 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육체에 임한 고통을 가리켜 '사단의 사자'라고 칭한 것을 통해 우리는 그 극심함이 욥에게 임했던 고난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들로 하여 의사 누가가 바울을 동행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임한 고통을 위해 세번이나 주께 간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처럼 엄청난 고난과 환란을 겪은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고통을 위해 세번이나 간구하였다면 그 고통의 강도가 얼마나 견딜 수 없었던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번번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시며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하셨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심오한 말씀입니까? 혹시 여러분은 죽음의 경각에서 자신의 무익함과 또 간절한 구원의 소망을 체험해 본 일이 있습니까? 아마 나름대로 고통의 기억들이 있겠습니다만 주께서 당신의 아끼는 사역자로 자고하지 못하게 하여 욱체에 허락하신 사단의 사자였다면 그 고통 또한 인간의 말로 가히 견딜 수 없는 아품과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때 곧 강함이라" 선언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선언입니까? 만약 여러분 중에 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 분이 계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이미 주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목사가 되면서부터 내 안에서 견딜 수 없는 눌림이 체감하여 왔습니다. 그 눌림은 나의 의식이 음부로 이끌어가는 듯한 견디기 힘든 혐오의 순간으로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두통이 동반되었습니다. 나는 이 눌림이 엄습할 때마다 동반할 두통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돌출구를 찾다가 그러한 노력이 오히려 나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나는 묵묵히 앉아 그 시간을 감수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몇시간이 지속되기 하고 한 밤을 뜬 눈으로 세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생리처럼 다가오는 고질병 같습니다.

 

나의 작은 고통을 감히 바울 사도의 고난에 비교할 수 조차 없지만 나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내가 당하여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감사하기로 하였습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역자들처럼 부유와 풍족함에 거하였다면 내 안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계시의 신비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받아 죽는다 해도 내 안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영원할 것입니다. 나는 두번을 다시 죽어도 내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