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후서

(고후13:11) 거룩한 입맞춤으로

이요나 2007. 2. 27. 15:13

(고후13:11) 거룩한 입맞춤으로

 

(고후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온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우리는 앞에서 바울이 자랑하는 지극히 약한 것들 속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살펴 보았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12:12)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표된 것 중에서 가장 앞에 '모든 참음'을 내세웠습니다. '참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성질에서도 제일먼저 나오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그 참음의 농도가 각각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성경에서 바울을 볼 때 그는 결코 참을성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거침없이 속전속결하는 성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믿음의 경륜 가운데 터득한 바울의 목회철학의 덕목은 '오래 참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고린도교회에 세번째 방문을 준비하면서 그들에게 세가지 경고성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먼저 바울은 그동안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서 언급된 헌금과 관련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여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 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물으며 오히려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12:13)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강한 어조로 말하는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자 하였을 때 어떤 자들이 바울이 다시 오는 것은 많은 재물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라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세번째 방문에서는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오직 너희니라"라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나 자신까지도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 받겠느냐"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사역이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과 만족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 하셨습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재물은 우상숭배라 정의하였습니다.

 

바울은 연보와 관련하여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는 소문에 언급하여 이미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연보로 발생될 많은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공인된 디도와 두 형제들을 보냈음을 상기 시키며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12:17) 반증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또 바울의 이러한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하는 것에 따라 온전하게 보여질 수도 또 사취의 행각으로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 이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이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말하였습니다.

 

지난 4년전 우리는 이 모임을 개설하면서 재소자 성경 보내기 운동을 펼쳐 왔었습니다. 사실 재소자에게 성경 보내기 운동이라고 하였지만 고작 우리 모임에서의 모금은 정팅때마다 회비 중 5천원씩 부과한 것과 운영자들이 월 1만원씩의 회비를 모았던 것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물질의 많고 적고를 떠나서 재소자들의 요구가 있으면 우선 어떤 방편을 내서라도 성경을 보내었고 또 영치금을 넣어주었습니다.

 

성경을 보내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전국교도소의 재소자들로부터 편지가 쇄도하였고 한달에 몇십권의 성경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한권에 25000원을 하는데 비하여 우리 모임에서는 한달에 십여만원 정도가 모일 뿐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모임의 어떤 사람이 교도소로 전화를 하여 이요나가 성경보내기 운동을 중심으로 모금을 갈취하고 있다고 음해하였습니다. 그후 이 일을 중단하고 제가 출판한 책 3천500권을 전국 교도소로 보내는 것으로 끝을 내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먼저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20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간에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서 그 원하던 바를 보지 못한다면 그 낙심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더 서러운 것은 자식으로부터 더이상 그 역활이 없이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관계를 제일 두려워 하였던 것입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성도들 간에 나타날 악한 일들 즉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근수근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라고 말하였습니다, 부모의 권위가 자식들에게 상실된 것도 서럽겠지만 만약 자식들간에 서로 시기하고 중상하고 어지러운 상태를 본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생명을 잃는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또 내가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 낮추실까 두려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자식을 보았다면 당연히 책망하여 바로 잡아야 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나를 더욱 낮추신다면 이것은 정말 인간으로 참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바울은 그러한 경험을 여러번 하여 '편지로는 엄중하고 너희 앞에서는 겸비한 나 바울'이라 말한 바 있었습니다. 그처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자신의 혈육처럼 여겨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아주 단호한 어조로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으로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경계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러한 그들의 행각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치 않는 마음을 근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나는 젊은이들의 상담을 통하여 많은 아품을 접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도 이러한 아픈 고민들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

 

요즘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고민은 성적인 문제입니다. 더 쉽게 말하여 자위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욕정으로 인한 음행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이며 당면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해결할려하여 성경에서 동성애는 정죄하였지만 자위는 그 언급도 없었으며 술은 취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담배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더러움과 음란과 호색에 포함된 것입니다.

 

바울은 13장에서 더욱 강한 어조로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번 째 대변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소하지 아니하리라"(13:2)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음의 비밀을 터득한 바울은 또 겸비한 모습으로 그들을 용서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입니다.

 

나는 바울이 이처럼 단호하게 경계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얼마전 내가 자식처럼 사랑하는 아이들 둘을 내어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여러분들 보다 많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애들은 여러분보다 더 주 앞에 열심인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직도 나는 그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고 또 기다리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전에 내가 책망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다시 받아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3장 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말하였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정말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만약 믿음에 있다고 하면서 성경이 금한 일들을 하였다 하면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확증이 다른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스스로 확증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당신의 구원을 확증해 보라는 말 같지 않은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구원은 내가 믿을 때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그 누구도 언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주권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리스도의 법 안에서 스스로 확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처럼 엄한 경계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13:7)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바울은 그 모든 것을 터득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터득한 지식과 경륜을 가지고 자식을 다스립니다. 만약 생활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가 자식을 책망하였을 때 그 자식이 아버지도 같은 일을 행하지 않았는냐고 묻는다면 그 아들은 패역한 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들을 온전케 한 것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진리의 가르치심에 있음을 말하여 "우리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처럼 그들 앞에 한없이 약해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0절).

 

만약 누구에게 칼로 다스릴 권세를 주었다고 합시다. 누가 그 앞에 범죄하였을 때 칼 가진 자가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단 칼에 베었다고 하여 그를 잘못하였다고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를 위해서 보낸신 권세자들입니다, 성도를 책망하고 다스릴 권세가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온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13:11)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기쁨을 언급하며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라고 말 하였습니다. 여기서 온전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진실을 말한 것으로 기쁨의 근본이며 위로는 기쁨의 동기가 됩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권위자로부터 위로를 받는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어서 바울은 "마음을 같이하며 평온할지어다"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개인의 소유를 넘어서 공동체안에서 함께 평온함으로 나타날 것을 소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삶에 풍만하게 미치는 기쁨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할일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은 동양에서의 '입맞춤'이란 동양의 미덕 가운데 감추어진 남녀간의 은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거룩한 백성들 가운데 나타난 기쁨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신성' 을 포괄하는 '거룩' 의 지식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입맞춤'은 육체적인 표현으로 밖에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며 거룩한 신성을 누리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입맞춤'은 성도의 교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전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3절) 축복하였습니다. 이 축복은 오늘날 목사의 설교의 끝맺음으로 사용하는 기원이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그리스도안에 거한 거룩한 성도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나는 이 사랑이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다음주에는 갈라디아서에서 뵙겠습니다. 평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