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갈라디아강해

(갈라디아1:1) 복음의 시작

이요나 2007. 2. 28. 10:18

(갈라디아1:1) 복음의 시작

 

(갈1:1)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

 

오늘부터 갈라디아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주일에 구약의 아모스의 시작과 함께 설교준비를 하는 내 마음이 많이 부담스러워집니다만 오직 주님께서 은혜를 더해 주시기만을 간구하는 마음으로 전진하고자 합니다.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여러분들도 나와 함께 마음을 모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갈라디아서는 주께 부름을 받은 많은 성경학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교회 속에서 연구되고 읽혀오던 서신으로서 에베소서와 함께 바울서신 가운데 금자탑이라 불려 온 책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읽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척 스미스 목사님의 저서 '은혜의 비밀'(원제: 왜 은혜가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가?)도 갈라디아서를 강해한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던 시대는 로마제국 시대로서 바울은 주로부터 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 3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감행하였었습니다. 그의 여행은 갈라디아를 비롯한 아시아지역과 유럽의 시초인 북부 그리스 마게도냐와 남부 그리스에 해당하는 아가야와 고린도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각 지역에 교회를 세우며 성도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 당시는 예정하신 하나님의 복음의 계시들이 성령을 통해서 사도들에 의해서 쓰여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울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물론 성령에 의하여 쓰게 하신 것이지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고린도후서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바울의 사도권이 거짓 사도들에 의하여 도전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서두에서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서술하였습니다.

 

먼저 우리는 주 예수로부터 택함과 부름을 받은 바울이 왜 이처럼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언급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바와 같이 복음서에는 주께서 친히 부르신 사도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친히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았고 또 여러 제자들 가운데서 열둘을 선택하여 친히 '사도'라는 직임을 주셨습니다(막3:14).

 

'사도'란 우리 교회 가운데서 불리우는 것처럼 목사나 교사나 장로와 같이 교회의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열두사도와 바울과 같이 예수께서 교회를 위하여 친히 세우신 직분자인 것입니다. 물론 맛디아와 같이 사도회의를 통하여 제비를 뽑아 선출된 사람도 있고 바울과 함께 동역한 바나바도 사도로 불림을 받았지만 그것은 사역적 의미를 말한 것이지 주께서 친히 세운 것은 아니였습니다.

 

바울이 유대인들 간에 사도권의 도전을 받은 데에는 그 당시 교회의 모체가 된 사도들의 모임 가운데서 결정된 사도권의 규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 하신 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던 일백 이십 여 명의 다른 성도들과 함께 주께서 말씀하신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께서 친히 세우신 열두 사도의 결원을 말하여 "그 직분을 타인에게 취하게 하소서"라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가롯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를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말하여 유스도라 하는 요셉과 맛디아 중에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사도로 편입시켰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직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은 때에 베드로가 왜 그것을 주창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미 주께서 가룟 유다는 그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갈 것을 말씀하셨고 부활 후 40일이나 친히 사도로 부르신 열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도 사도의 결원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는데 베드로는 어떤 이유로 그것을 먼저 처리했어야 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도로 뽑힌 맛디아는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 성경은 일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이 일의 정당성을 논고자 할때, 생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고" 또 잡히시기 전에 "시몬아 사단이 너를 밀까부릇듯 청구하였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건히 하라"말씀 하셨기 때문에 사도의 선임자 격인 베드로서는 아직 사도들 마음 속에 상처와 수치로 남아 있던 가룟 유다의 일을 매듭질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이 일에 대하여 성경에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주께서도 그 일을 그대로 묵과하신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권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고린도전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1절에서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은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로의 부름에 대한 두가지 정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과 제자들 가운데서의 확증이 있어야 할 것이라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말은 그대로 인정한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사도로 부름에 대한 기록은 이미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하여 살펴 본 바와 같이 바울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였습니다. 바울은 그가 미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 들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할 때에, 다메섹 광야에서 친히 주께서 나타나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고 예수의 증인된 제자 아나니아를 통하여 성령으로 바울에게 안수를 하게 하심으로 바울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모름지기 사도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또한 바울은 주께서 성령으로 사도의 세우심을 언급하여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 하는 것이라"(고전12:28)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 사역과 관련하여 주께서 성령으로 직분을 주심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사도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는 주께서 성령으로 바나바를 사도로 세우신 것이 기록되었습니다. 2절에는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서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탁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기록되었습니다. 14장 1절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가리켜 '두 사도'라 기록하였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주께서 다른 사도를 세우신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최근 어떤 사람들이 자기 또는 자기 교회의 총수를 가리켜 주로부터 사도직무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성령에 의해 사도라 부름을 받았다면 성경 말씀의 인증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교회와 관련된 그 모든 일들이 완성된 책이므로 주께서는 마땅히 그의 사도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마가나 누가 또 바울의 제자 디모데라도 사도라 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원칙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사도라 칭하는 자들은 오히려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마7:21)는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 편지의 수신자들을 언급하여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교회들에게"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호칭은 사도나 목사나 장로와 같은 직분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호칭입니다. 주께서는 부활 후 그의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형제'들이라 하셨으며 그의 거룩한 성찬에 참여한 성도들은 모두 주의 형제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라는 호칭 또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는 한 아버지의 피를 나눈 수직적 그리고 수평적 관계를 갖어야 합니다. 오직 한 아버지와 수직된 관계 속에 수평의 관계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형제 이하도 이상도 없는 것입니다. 누가 이 관계를 허물면 그는 성경이 정죄한 니골라 당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한 형제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형제한 그리스도의 기업을 함께 받을 자들을 언급한 것입니다.

 

한 형제라는 의미와 관련하여 우리는 2절 후미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오늘날과 같이 장로교, 순복음, 감리교, 성결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 관계를 이룬 갈라디아의 여러 지역의 교회로 구성되었습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은 교파는 한 형제인 것이 아니라 형제가 서로 다투어 다른 개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을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여 각 교회가 당연히 각 교파 교단으로 분리된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은 하나님과 수직관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을 말씀하신 것이지 각 사람들의 목회철학이나 이념을 따라 분열된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갈보리채플로 부름을 받은 이후 가장 흥미롭게 여긴 것은 갈보리채플은 교단이나 교파를 이루지 않고도 전세계 여러지역으로 나뉘어져서 한 오직 그리스도의 한 형제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보리채플은 어디를 가던지 서로 동일한 형제라는 의식을 갖고 있으며 어디를 가던지 성경의 가르침에서 서로 충동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것이 있다면 서로의 얼굴이 다른 것 뿐입니다. 물론 다른 교파 사람들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한 형제가 아닙니다. 사촌이나 육촌이나 또 팔촌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기원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헬라사람들은 '은혜'란 인간에게 나타나는 '아름다운 매력'이며 그것은 인간 스스로 소유할 수 없는 신적선물로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평강'은 유대인들의 기원으로서 택하신 자녀들에게 언약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육간의 축복을 말한 것입니다. 이로서 바울은 헬라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추구하는 신령한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될 것을 기원한 것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들에게 임한 동기와 그 목적을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자이며 아들이라도 하나님이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악한 세대에서 택하신 자들을 건지기 위해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것을 기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