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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1:20) 복음의 빚진 자들

이요나 2007. 2. 28. 10:56

(빌레몬1:20) 복음의 빚진 자들

(몬1: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처음 25절 밖에 안되는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야고보서 만큼이나 중요하고 위대한 서신임을 깨달았습니다. 더우기 오늘날과 같이 교계의 흐름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현실에서 지나칠 정도로 부유해져 가는 목회자의 생활은 심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대형교회 세습문제로 세상이 시끌법석합니다. 문론 주로부터 택함과 부름을 받았다면 아들이 목회를 계승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겠습니다만 한국교회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생활로 볼 때 그의 자녀들은 고통과 삶의 불행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부모의 부귀영화 속에서 부족함이 없이 지내며 부모의 후광을 입어 그 사역을 물려 받기 위하여 유학을 하여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하물며 대통령이 되려고 해도 오랜 세월 많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전문적인 지식과 식견을 넒히며 민생과 국가 경영을 위한 연단의 경륜을 쌓아야 하는데 온실 안의 나무처럼 어려서부터 호의호식하며 부족함 없이 유유자적하던 사람이 목회자가  되었다면 그는 인생의 저변에 역사라는 악의 세력을 익히 알지 못하여 사단을 정죄하는 범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역의 질서

 바울은 8절에서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담력'이란 거침없이 분명하고 자유스럽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동안의 빌레몬의 사랑의 실천으로 사도로서 제자에게 마땅히 권고해야 할 사역적 권면을 꺼리낌 없이 명령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한다'하였습니다.

 참으로 제자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지극한 사랑을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이 많은 나 바울'이라는 말은 실제의 나이를 의미하는 것보다 목회의 연장자 즉 사도의 권위를 표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와 달리 빌레몬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능히 사도의 권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되고 동역자 된 빌레몬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목회란 주께서 택하신 각 개인의 부르심과  관련된 사역이기 때문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각 교단 조직 속에서 단일
 명령 체재를 이루고 있는 상황과 대치되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주로부터 친히 이방교회를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하드라도 또한 자신의 제자라 해도 그가 담임하고 있는 목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사도의 명령권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라는 말로 사역자의 헌신의 어떠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또'라는 단어 속에서  복음을 위한 사도 바울의 헌신적 투쟁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망자 오네시모와 바울
바울은 10절에서 '갇힌 중에서 나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하였습니다. 오네시모란 '유익한'이란 뜻을 가진 빌레몬의 종이였습니다. 오네시모란 이름은 골로새서에서 "신실하고 사랑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골4:9) 처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것으로 그 당시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의 지역은 사역에 있어서 동일시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10절에서 '갇힌 중에서 나은 오네시모'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레몬의 종이였던 오네시모가 어떻게 하여 로마에 갇힌 바울에게 까지 왔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망자  오네시모가 처음부터 바울에게 가고자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을 생각할 때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서 많은 재물을 갖고 도망하였을 겁입니다. 도망한 노예가 바다 건너 로마에 이르기까지는 그리 수월한 여행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바울이 죄수가 되어 로마에 갇혀 있지만 두 해동안 셋집에서 복음을 가르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행28:30). 재물을 배설물처럼 여기던 바울이 무슨 돈이 있어서 두해 동안이나 셋집에서 생활했으며 누가와 마마과 데마 그리고 아리스다고와 같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죄수의 몸으로 일을 한다는 것인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이 아닌 셋집을 얻게 되기까지는 정치적인 수단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장을 보면 총독 벨릭스가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하여 자주 불러 말을 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행24:26). 따라서 셋집을 얻기까지에는 적지 않은 뇌물이 작용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네시모의 회심과 헌신
바울은 11절에서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빌레몬에게 변화된오네시모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나와 너에게 유익하다' 라는 것은 오네시모의 복음 사역적 가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돌려 보낸다'라는 '아나펨페인'은 규칙동사로서 위탁한다는 법률용어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이 말은 '나는
 이 사건을 다시 너에게 귀속 시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심복'이란 심장 또는 내장과을 의미하는 소중한 애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제 바울은 본 서신의 본론을 기록하여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락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였습니다.

사도의 권위로
  한마디의 명으로 할 수도 있는 데 이처럼 빌레몬의 배려를 요구하는 것은 합리적인 목회의 질서와 제도를 이루는 토대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실리를 위해서 배신을 일삼는 목회 현실에서 정말 귀감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
 갈보리채플에서는 사역자급의 성도들이 다른 갈보리채플로 옮기게 되면 전임자의 신원확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0년전 서울 갈보리채플을 개척할 때 저의 교회에 헌신키로 했던 어는 분이 미국에서 갈보리채플 선교사를 데리고 나와 나와 아무 말도 없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를 개척한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마는 저는 그 일로 하여 오랫동안 마음이 상한 일이 있습니다. 아직도 이런 일은 한국교회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 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라 해도 오네시모를 한 사역자로 사역하게 함에 있어 과거 육신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승인을 요구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이 오네시모를 골로새 지역과 빌레몬에서 보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이러한 사랑의 권고가 없이 오네시모를 복음 사역자로 세워 어떤 일을 하게 하였다면
  빌레몬은 도망자 오네시모에게 어떤  법적 대응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
그를 인하여 바울은 15절에서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형제라고하여 복음사역의 상속자가 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이 오네시모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던 사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노예출신의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주의 은혜를 깨닫고 이방교회의 교두보인 에베소 교회의 감목이 되었다는 사실은 용서와 배려와 화합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만나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장차 그가 로마시민 보다도 더 많은 노예들 속에서 복음의 일군으로 헌신하여 이방교회의 복음의 온전한 기틀을 만들 것이라는 확신을 갖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고로 바울은 "이후로는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16)하였던 것입니다.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란 얼마나 위대한 말입니까? 이것은 사역의 동역자뿐이 아니라 디모데나 빌레몬과
 같이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 받은 복음의 상속자가 될 것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17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데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하였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존경스러운 사도의 모습입니까? 그는
 유대인의 베냐민 지파로서 로마시민이요 최고의 학문과 지식을 터득하고 사도의 반열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가 주인의 도둑이 되어 도망한 죄인을 자기 후계자로 세우는 결단의 순간인 것입니다.  

 복음의 빚진 자들
혹시 여러분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머리를 깍고 서원한 사실을 기억하는지요. 그는 3년을 셋집에 머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에베소에는 동서를 잇는 상인들의 무역으로 수많은 노예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입니다. 더우기 그곳은 마술사와 은장색 그리고 수많은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바울과 디모데가 이르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르자 에베소는 크게 소요가 일어나고 5만의 마술과 관계된 책자들이 불에 태워졌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우상과 음란으로 가득한 에베소어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그로하여 복음의 능력과 자유의 은혜를 체험한 수많은 사람들이 신도시가 된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지역으로 들어가 부흥 운동을 일으킨 것은 자연스런 복음의 흐름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빌레몬도 그러한 정황 속에서 구원받고 바울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며 그 모든 변화의 역사를 알고 있는 오네시모도 복음의 자유를 찾아 로마에 갇힌 바울에게 도망을 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19절에서 " 나 바울은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 하노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레몬이 바울에게 어떤 빚을 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만약 그가 에베소에서 은장색이나 마술사 출신으로 엄청난 돈을 벌던 사람이었으나 바울을 통하여 변화되어 바울로하여 복음의 동역자라는 사랑을 입었다면 그는 그야말로 돈으로 셈할 수 없는 빚을 진 것이 됩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 조용기 목사님이나 히라노코이찌 목사님의 경우 그 분들은 나를 자기와 함께 설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죄인임을 알고서도 자기와 함께 복음의 동역자 되기를 두려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