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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1:25-6)온전한 믿음의 교제

이요나 2007. 2. 28. 10:57

(빌레몬1:25-6)온전한 믿음의 교제

(몬1:5-6)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살롬,,미국에서 돌아 와 2달만에 골로새서를 마쳤습니다 이제 데살로니가서를 강해 하기 앞서 빌레몬서를 먼저 살펴볼까 합니다. 그 이유는 빌레몬서는 바울 사도의 개인적인 편지로서
 골로새 교회와 관계가 깊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가진 빌레몬에 대하여는 성경에 특별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골로새서 4장의 기록과 빌레몬서의 문체를 보아 라오디게아 지역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며 복음을 전할 때 제자가 되어 복음사역에 헌신한 사람으로서 종을 부릴 정도의 유복한 생활을 하였던 지역 유지였던 것 같습니다.

 먼저 오늘 우리가 이 편지를 일기 전에 우리는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편지는 그당시 라오게디아 교회 지도자 빌레몬에게 쓴 개인적인 편지로서 빌레몬에게서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에 관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서신은 복음이 전파된 이래 수세기동안 동서양 각국에서 당연시 되었던 노예제도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대변하는 중요한  교두보이기도 하고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평등을 요청하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노예제도
 그당시 로마제국에는  6000만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 숫자는 로마제국의 평민보다 더 많은 숫자로서 로마시민 한 사람이 두사람의 노예를 가진 꼴이 됩니다. 고대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예제도가 국가의 지배 체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노예는 부와 권세를 나타내는 자산이었습니다.

그 당시 노예는 권세와 부의 상징으로 힘있고 성실한 노예는
 주인의 영광이기도 하였지만 무지와 불만으로 가득찬 노예들의 폭동은  사회적 위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노예제도는 그 종속에 관한 규율이 엄격하였습니다. 


 시대의 변천과 함께 노예문제는  사회이슈로 등장하였습니다만,  그 당시 로마정부는  숫적으로 많은 노예들을 효과적으로 관리, 지배하기 위하여 노예의 생명권과 귀속권을 그 주인에게 주어 노예의 자손들까지 관리토록 하었습니다.

 그당시 노예가 도망간 노예를 붙잡게 되면  그 주인은 불에 달군 도망자의  "F"자(fugitivue) 쇠도장을  이마에 찍어 노예는 죽을 때까지 별도로 관리하였으며 짐승처럼 학대와 질시를 받게 하고 십자가 처형도 다반사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 노예제도의 폐단이 남북전쟁의 실마리가 되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그당시 이방 교회의 사도권을 갖은 바울로서 제자인 일개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처럼 애절한  당부의 편지까지 할 필요가 어디에 있으며 개인적인 편지가 성경의 정경으로 속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의아하게 생각되실 것입니다만 그 당시 사회제도나 국가의 제도권 문제는 아무리 교회의 사도라 해도 초월할 수 없는 또다른 세상에 속한 일이였습니다.

 복음은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평등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도 자유하다'(갈3:28, 고전12:31) 하였고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니 유대인이나 할례당이나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수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의 차별은 없다'(골3:11)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은 그 시대 국가기강과 사회제도를 뒤 흔드는 커다란 이슈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공부를 했습니다만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의 결론부에는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의 방법에 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 가르침 속에서 항상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앞세웠습니다. 그것은 자유케 하는 복음이 노예들의 폭동을 유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의 목회
 바울은 서두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당시 바울은 복음의 죄인이 되어 황제의 판결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되어 구금되 있는 상태입니다. 그당시 로마의 법은 아주 효율적이어서 로마시민의 경우에는 죄수라도 법정의 승인을 받아 주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의 주거제한 조치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8장 30절에는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데모데와 누가와 마가와 에바브로 같은 제자들과 함께 매임을 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형제'라 칭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서신에서 디모데를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 된 디모데 또는 군사라 칭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형제란 복음의 피를 함께 나눈 기업의 상속자임을 언급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빌레몬에게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벨레몬은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에베소 지역에 들어가 3년동안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만나 변화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이 어떤 경로에서 바울의 사랑을 입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 당시 에베소에는 마술과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한 은장색들로 가득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편지의 내용은 빌레몬에게 개인적인 것이지만 수신자는 그의 가족과 그의 집에 있는 교회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는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바울과 함께 자기 집에서 목회를 하였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교회가 탄생된지 주후 2세기 동안은  교회는 특정건물을 갖지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 상황에 따라 성도들과 지도자들이 마련한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따라서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였으며 아킵보는 그 교회의 중심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빌레몬서는 빌레몬 개인에게 국한 된 내용이지만 그 내용은 복음의 사역적  측면에서 교회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서신의 역활에 국한 된 것이라면 성경에 기록될리도 만무하고 바울과 사도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썼을 개인서신과 같이 세월 속에 뭍혀버렸을 것입니다.

 군사된 아킵보의 직분

 바울은 아킵보를 가리켜  "함께 군사된 아킵보"라 하였습니다. 아킵보는 골로새서 4장 끝부분에서도 소개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편지에서 아킵보에게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하였습니다. 

 '함께 군사되었다'라는 말은 복음의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호칭입니다. 바울은 '함께 된 군사'라는 호칭을 그의 영적 아들인 제자 디모데(딤후2:3)와, 빌립보 교회의 지도자였던 에바브로디도(빌2:25)와  그리고 아킵보에게만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아킵보는 에베소에서 에바브라와 함께 훈련받은 젊은 사역자일 수도 있으며 에바브로의 제자로서 골로새 일대를 지도하는 목사급이었을 것입니다. 

 한가지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골로새서 4장 16절에서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기록한 후에 17절에서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명한 것으로 보아  아킵보는 라오게디아의 빌레몬의 교회를 중심으로 그 지역교회를 돌면서 사도로부터 전수받은 복음을 보전하고 가르치는 역활을 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당시 골로새와 라오게디아, 히에라볼리 지역의 개척자요 지도자였던 에바브로는 로마에 갇힌 바울에게 와 있었음으로  여러가지 이단적 가르침과 세습적 제도권 속에 있던 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도들로부터 전달되는 메시지를 전하고 가르치는 일은 믿음과 성령에 충만함을 받은 복음의 군사에게 맡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쉽게 성경책을 구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그 귀중함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성경의 기록은 제자들에 의하여 파피루스에 일일이 손으로 기록하여 써 내려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성경은 그 희소가치적 유물로서 매우 소중히 다루어졌습니다.  

 더우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는 유대인과 이방 이단의 세력 속에서 성경을 보관하고 메시지를 각 교회에 전달하는 것은 군사적 임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는 복음의 메시지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라 칭한 것입니다. 

 만약 어느 집에 가보로 내려 오는 이퇴계 선생이 친히 쓰신 책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 책은 제자들을 통해서 복사되고 가르쳐 왔을 것인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자들이 모두 죽고 책도 앞뒤가 찢겨졌다고 하십시다. 어떤 사람이 그 책을 얻어 읽다가 슬며시 자신의 이름을 그 제자에 등록하고 자기에게  맞게 부분적으로 내용을 변형시켰다고 하십시다.

 그후 그는 자기가 변형시킨 책을 가지고 이퇴계 부흥운동을 일으켰는데 만약 그것이 힛트를 쳤다해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퇴계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이단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문선명 종교집단이 모두 이들에 속한 것으로 이들은 니골라 당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사도와 함께 군사된 동역자들에 의하여 보전된 완성된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 누구라도 그 내용을 더할 수도 뺄수도 수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저주가 임할 것이라 기록한 것입니다.  만약 이요나가 내가복음을 만들어서 가르친다면 그 말이 아무리 달콤하고 진리 같아도 그것은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진리를 거역한 멸망의 이단자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빌레몬 사역의 특징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르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헬라인들의 인사말이고 평강은 유대인의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이 두 인사말을 늘  함께 사용한 것을 통해 복음의 역활이 화합과 사랑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은혜와 평강은 우리 크리스챤이 모두가 추구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4-5절에서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으니"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레몬과 바울의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늘 기도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단사설이 만연한 혼돈의 세상에서 성도들을 사랑하고 굳건한 믿음에 서 있는 제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하였습니다. 기도문 속에 포함된 이 내용은 그 해석에 있어 난해합니다. 얼핏 들으면 빌레몬의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을 칭찬하는 것 같기도하고 어쩌면 칭찬 속에 곁들인 권고와 책망에 해당되는 바울의 특이한 어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란 늘 부족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기 위한 것이라 할 때 이것은 후자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믿음의 교제'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만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교제'는 '코이노니아'로서 '함께한다', '친교', '나눔과 봉사'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내용이 이 세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정확히 단정할 수 없습니다만 내용의 흐름으로보아 '나눔과 봉사'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서 선을 알게 하고'라는 말은 빌레몬의 믿음 속에 행한 교제의사역적 방법을 언급한 것으로 바울은 지금 그가 행한 것보다 더  깊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우기 '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한다' 라는 말은 그래야만 너의 행함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빌레몬은 믿음 안에서의 선행을 하였지만 그것은 아직 그리스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책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빌레몬이 노예를 부릴 정도로 부유한 사람이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목사가 된 후에 부자가 된 것이 아니고 목사가 되기전부터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는 나름대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재물과 목회
 바울은 7절에서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빌레몬을 가리켜 형제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호칭은 1절에서 디모데에게 사용한 호칭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지금 빌레몬이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디모데와 같이 바울의 기업을 물려 받을 상속자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복음서에서 주님께 나아와 영생을 얻는 방법을 구했던 부자 청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청년은 유대인의 재물이 많은 유대 관원으로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며 많은 선행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주님은 '네가 나를 선한 선생님이냐 물으시며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 하시며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만 그는  재물을 버릴 수 없어 고민하였습니다

 또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재물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사려고 거짓말을 하다가 부부가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부자와 복음사역에 관련된 중요한 자료로서 그러므로 오늘날 빌레몬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 담긴 것입니다,

저를 안수한 싼타바바라 갈보리채플의 담임 목사는 상당한 부자라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기전 하와이에서 부동산과 식당을 하여 크게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켈리포니아에서 가장 부자가 산다는 싼타바바라 교회의 담임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빌레몬과 같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제 주변에는 돈으로 목사가 되었다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실 돈이 많은 분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부인이 돈을 잘 버는 능력이 있어서 그는 목사의 자질이 있어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지만 돈으로 목사가 되었다는 소문입니다.

어쨋던 성경은 목회자에게 확고한 재물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셨고 재물은 우상숭배라 하였습니다. 성경이 재물에 대하여 이처럼 확고하게 선을 짓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 지혜와 능력이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음에서 빌레몬서의 성경적
 중요성을 더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