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디도서 강해

(디도서3:8)아름다운 생활을 위하여

이요나 2007. 3. 2. 10:54

(디도서3:8)아름다운 생활을 위하여

(믿3:8)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데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지속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선하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오늘로 디도서를 마치게 되겠습니다. 다음주부터는 베드로서를 공부하겠습니다. 예정대로라면 6월경에 유다서까지를 마치고 7월부터 계시록을 공부하게 될 것 같습니다. 결국 제가 성경을 한번 강해하는 데 12년이 걸렸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12년 되는 해에 중생의 기쁨을 얻었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여 12년을 지내왔습니다. 내게 남은 세월이 12년이라도 남아 있을런지 이제는 주의 날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바울은 2장에서
 사랑하는 제자 디도에게 성도들의 삶에 관한 목회지침을 하달하였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모두 디모데의 온전한 가르침을 받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살고 모든 믿는 자들의 소망인 영생의 복을  받는 친 백성이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3장에서
 디도의 성공적인 
목회를 위하여 최종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서두에서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를 예비하게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정사란 통치 세력을 말합니다. 바울 서신의 공통점은 그 흐름에 있어 같습니다. 로마서에서도 또 에베서에서도 세상을 대하는 성도들의 삶의
 방법은 상전과 또 정사와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는 자세입니다.

그 당시
 지배구조란 로마의 정치구조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시민 보다도 더 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이고 복음의 은혜는 부한 사람들보다 고통의 사람들에게 먼저 임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만약 교회가 사업가나 또 정치 세력에 도전한다면 이것은 커다란 사회적 혼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한 풍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들이 이제 정치 일선에 나와 국가의 모든 행정적인 문제에까지 거론을 하고 있습니다. 수백억을 들여 이미 그 마무리 공사에 들어 간 새만금 간척사업이 중단되고
 한 여승의 100일 단식으로 터널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무슨 반대할
 일만 생기면 각계 종교지도자들이 거리로 띠를 띠고 쏟아져 나와  구호를 외치며 또 삼보일배까지 행하며 결사적인 대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미스러운 것은 기독교 교계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집권세력들의 정략적인 정치적 계산이 주측을 이루고 있지만
 결국 집권세력들도 그들에게 발목이 잡혀 그들의 시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 어미를 잡아 먹는 거미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예고하여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하였습니다. 여기서 훼방이란 비방을 말합니다. 결국 정치적인 문제는 비방과 말다툼입니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서로의 당리당략에 치우쳐 싸울 뿐이지 그 결론을 얻지 못합니다.

공주 연기 수도이전 문제만해도 그렇습니다. 열린당이던 한나라당이던 모두 대권에 매달려 함께 통과 시켰던 것입니다. 그게 사실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을 스스로 올무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가만히 잘 있는 서울을 왜 옮긴다고 공약을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서로 좌충수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앞으로 선거철만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약(公約)을 하고 그 공약들은 다시 공약(空約)이 되는 악순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나라에 이미 건전한 정치를 상실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최근 박대통령의 문제가 온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가다가는 이씨 조선의 왕족들까지 숙청하는 시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도와 연변 일대의 간도땅이 우리나라 땅인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이런 일에는 혹시 국제적인 문제로 휘말릴까바 말한마디 하지 못하면서 지나간 과거사는 왜 이처럼 다시 재론하는 것인지 그 속셈을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 일들을 하기 위해서 사는 것 같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잊어버리지 말고 머리에 기억되게 하라는 말입니다.주님은 조세에 관하여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하셨습니다.

또한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해 보응하는 자라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억울하기도 하고 정말 이런 일을 보고도 관용하여야 할 것인가 싶습니다만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대로 해야할 것을 가르쳐 기억하게 해야만 합니다.

  * 똑같은 존재였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향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악의)과 투기(시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들)였으나"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은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정사와 권세자들이 합당한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품성을 언급하며 우리도 과거 그들과 동일한 사람들이었음을 인식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과거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오늘의 우리의 품성이 바뀐 사람들임을 은연중 인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거의 행실을 돌아 보건데 과연 남들의 행실을 비방하고 침범할 자격이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교회를 보십시요. 그들 가운데는 동성애자들이 들끓었으며 또 고린도 교회는 알콜 중독자들과 음행하는 자 부모에게 거역하는 자 거짓말장이 도둑질하는 자 사기꾼 등과 같은 범죄자의 집단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나 우리가 죄없다 하심을 얻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그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하심으로 베푸신 은혜였던 것입니다.

 *중생과 성화

이에 바울은 5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의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에 관한 신학적 교리가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설명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의롭게 하심' 즉 '성화'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각 교회들이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교리적 부분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이 이 문제에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원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얻어지는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요한은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문제는 그 누구도 번복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판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생이란 단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생'이란 헬라어는 '팔링'+'게네시아' 즉
 '다시'와 '출생'이란 단어가 복합된 것으로 다시 태어남 즉 영적으로 거듭난 상태를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주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중생'
  곧 거듭남은 우리가 믿을 때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우리를 죄없다 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권세로서 사실 이것은 창조적이고 우주적인 의미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직 세상의 속성 즉 죄의 속성이 완전히 벗어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지금 우리는 중생의 씻음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취득한 것으로 그 거룩한 자녀의 품성을 그대로 주의 날까지 지켜야할 우리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순간 육체를 떠나 주께 들어갔다면 우리에게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세상의 속성 속에 살아 남아 있고 우리는 믿음이라는 도그마
  속에서 자녀의 생활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며 또 우리 몸 속에는 아직 죄의 속성이 남아 있어 그 것을 제어하지 않고서는 명실공히 천국시민으로서 입성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돕기 위해 우리에게 허락되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로 중생케 하시고 또 우리로 성화케 하시는 일을 하시게 되는데 중생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이지만 성화의 과정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우리의 의지가 함께 동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은 우리를 누륵없는 하얀 가루로 만든 것이라면 성화는 우리에게 누륵이 다시 들어 오지 못하게
 
하시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누가 세상을 사랑하여 스스로 누륵을 허락한 다면 그는 다시 죄에 얽매여 돌이키지 못할 곳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구원의 진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질실은 이 이 두가지가 함께 완성되는 단계로서 주 앞에서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 받았으므로 내가 무엇을 하든지 천국에 들어 가는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생각한다면 그는 성령을 훼방하고 성경의 기록된 말씀밖으로 넘어진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은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기록 하였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누가 악심을 품고 주의 가르치심을 소홀히 여겨 악한 세상을 살았다면 그는 어떤 믿음을 갖었다 하드라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요 경건의 행위를
 부인한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후사는 몫과 분배받다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재산의 상속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영생의 소망을 성취하지 못하는 자는 후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힘써 지킬 것

바울은 8절에서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데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지속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선하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는 내용입니다. 최근 우리 교회를 떠난 청년 둘이 몇년 동안 남아 있는 교회 청년을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 중생의 문제를 성화와 별개로 놓고 거론하려합니다.

다시말하여 그들은 이미 중생된 자는 하늘이 두쪽이 나도 천국에 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니 그가 담배정도를 피웠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의 속성입니다.

구원이란 그 시작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것이지만 주의 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책임과 의무가 부과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 과정이 없다면 성경은 사복음서로 끝났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사도들의 서신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의 품성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와 또 그에 대한 최종적인 주의 판단과 인내하고 지킨 자들에게 함께 나누시는 상급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술과 담배와 음행을 하는 자들을 단도직업으로 너희는 구원 받지 못한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구원은 항상 현재 완료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가르침은 책망과 권면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담배를 피고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9절에서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이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은 변론이란 이미 성경에 진리에 관한 것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계속 같은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족보이야기란 계보 즉 기독교의 분열됨을 미미 언급한 것입니다. 요즘 목사들만 모이면 자기 교단 자랑에 불을 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바울은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하였습니다.
 요즘도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돼지고기를 먹어야 하느냐로 다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무익하고 헛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 교리적 이단
바울은 10절에서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단이란 선택과 다른이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하여 다른 것을 선택하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 사이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었음을 알 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빋으면서 서로가 다른 것을 선택한
 당파입니다. 마치 여러개의 당파와도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이러한 당파가 들어 왔습니다.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등 ..바울은 너희가 사람이 아니다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요? 서로 다른 교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많은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교리적 추종을 따라 분열된 것을 말한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이단이란 서로 교리적으로 다른 것을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한 두번 훈계한 후 멀리 하라 하였습니다. 이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정말 머리가 아픕니다. 결국 내 심령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그들은 스스로 정죄한 자로 죄를 짓는다 하였습니다. 그 죄란 말씀을 벗어난 믿음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동역자

이제 바울은 디도에서 마지막 인사로 끝을 맺습니다. 먼저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네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레데에 있는 디도와 함께 니고볼리에서 겨울을 지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디모데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자들을 다시만나 그들을 위로하고 그 지역에서 발생한 일들을 들으며 함께 기도하고 종합적인 선교전략을 갖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우기 바울은 아데마나 두기고와 같은 이방인 선교사들을 그 지역으로 보내어 디도가 없는 동안 그 지역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데마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두기고는 이방교회의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에 전달한 사역자(행20:4)로서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그의 사자로 일을 하였습니다(엡6:21, 골4:7, 딤후4:12). 이 두사람의 이름으로 보아 두 사람은 모두 이방인 출신으로 충분한 성경공부와
  선교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잠시 디도가 떠나 있는 동안 두기고와 아데마를 통하여 복음의 선교에 대한 열정을 그들에게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울은 또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마 바울은 그들의 더욱 깊은 성경적 지식과 신학적인 토대를 위해 바른 교리를 가르칠 수 있ㄴ느 세나와 성경학자 아볼로를 그곳에 보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그들을 또 다른 곳으로 보내어 하나님의 교회를 튼튼히 할 필요성을 느꼈는가 봅니다. 바울은 그들의 여비를 디도에게 부탁하였습니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교회가 온전히 바로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필요한 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디도와 같은 믿음의 경륜을 가진 온전한 사역자와 또 아데마와 두기고와 같이 선교에 열정을 가진 의로운 일군 그리고 바른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과 성경학자들의 가르침,,,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온전하고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 이처럼 다양한 사역자들을 보낸 이유를 설명하여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갖자의 주신 성령의 은혜를 따라 함께 나누고 도우므로서 선한 열매을 맺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을 돕와야 할 것을 강조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바울은 믿음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서로 문안 할 것과 그 무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할 것을 기원하였습니다. 믿음안에 있는 형제들과의 문안 이 얼마나 귀한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좀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믿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