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
이 세상은 더 이상 죄에 대한 개념을 인정하는데 거부하고 있다. 또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정의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그 결과 죄를 다루는 이 세상의 방법은 결코 진실된 성경적 의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자라면 이 문제에 있어 결코 혼동하면 안된다. 죄를 다루는 것에 대한 우리의 답은 하나님 말씀에서만 발견되어져야 한다. 성경은 전적으로 우리의 삶과 경건 생활에 지침이 되기에 충분함을 말하고 있다. 교회는 그러므로 심리학적 이론으로 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디모데 후서 3장 16-17절에 의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만약 성경이 우리를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한다 할 때 왜 우리는 거기에 인간의 지혜를 첨가하려 하는가? 시편 19편 7절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라고 하고 있다. ‘여호와의 율법’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완벽한데 왜 다른 곳에서 그 답을 찾으려 하는가? 베드로 후서 1장 3절에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면 우리는 성도의 삶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성경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성경만이 답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6장의 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까? 심리학은 이것에 대한 이론을 그 나름대로 갖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 6장에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을 명료하게 제시한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명쾌하게 구원을 통한 믿는 자의 죄로 부터의 해방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죄의 세력은 무너졌다.
로마서 6장 3절에서 7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하심과 부활을 통하여 자신을 동일시 한다. 그로인해 영적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그곳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삶의 행진’을 시작할 수 있다. 구원받기 이전의 삶의 모든 짐을 십자가에 내려 놓았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뒤에도 계속 그 죄의 짐을 지고 가야 한다면 새로운 삶을 결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즉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옛 사람은 아담이래 죄와 타락의 존재였다. 다시 말해 아담안에 있는 모든 것, 즉 우리의 옛사람에 들어 있던 모든 타락된 본성들은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서 죄를 다루시는 방법이다.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옛사람이 감각적으로 존재치 않도록 죽어버린 것이 아니다. 죄의 능력이 멸하여졌으며 그 힘이 상실돠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죄의 몸이 ‘멸하여’ 라는 의미는 그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도 동일한 말이 쓰였는데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을 통하여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라고 하였다. 우리가 알 듯이 사단의 존재가 끊어진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는 그의 힘이 더 이상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배하던 옛사람은 없어진 것이다. 즉 우리에게서 죄를 짓게 하는 죄성이 멸하여진 것이다.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므로 더 이상 그 세력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며 ‘죄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이런 사실이 곧 믿는 자는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약3:2)’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죄지을 염려가 없다. 불신자로서 우리가 죄의 종이었을 때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권세에서 해방되었다. 우리가 범죄하면 스스로 뒷걸음질쳐 더 이상은 조종할 수 없는 지배자에게 복종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자유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옛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잔인하고도 억압적인 지배자로부터 어리석게 복종하는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 고려해 봐야 한다. 그를 향하여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옛주인에게 더 이상 소속되어 있지 않소.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그만두시오. 만약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같이 하겠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내렸기 때문이요’ 이와 같은 원칙이 신자들에게도 진실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 신자들은 죄의 종으로부터 놓임을 받았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스스로 선택한 탓이다.
나는 믿는 자들이 아직도 죄의 결박안에 있다고 할 때 염려스럽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는다. “나는 기독교인이요. 그러나 아직 알코홀 중독자이기도 하오” 아니면 “나는 거듭났소. 그러나 동성연애자이기도 하오” 이같은 생각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고린도 전서 6장 9절-10절에 의하면: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 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
한 청년이 그의 담임 목사에게 그가 동성연애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간증을 하기를 원했다. 그의 목사는 그에게 만일 그리스도께서 진정 그를 구원했다면 그는 결코 동성애를 할 수 없으며 그 이유는 동성연애자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한 사람이 믿는 자로 변화될 때 그는 더 이상 특정한 죄로 인해 구분되지 않게 된다. 예수께서도 병자를 고치신 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유업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유형에 대해 열거한 뒤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바울이 고린도서를 쓴 것은 특별히 이같은 범죄에 빠져있는 자들에게였다. 그러나 그들의 삶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그들은 더 이상 그같은 죄를 범하지 않게 되었다.
고린도 후서 5장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 즉 죄된 삶은 믿는 자의 과거안에 있다. 기독교인도 죄를 지을 수 있으나 결코 그 죄가 그의 삶의 방식의 특성이 되어질 수는 없다.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으로 살자 (롬6:8-1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가 아담안에 살아있을 때 죄에 대해 살아 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바 되었다. 이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이 마지막이며 현실과 같으며 영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는다. 그같은 사실속에서 빛가운데에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옮겨 놓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그의 지배로부터 죽었으므로 저항할 수 있다. 만일 간음이나 동성애,bulimia, 분노 또는 다른 죄가 살아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향하여 이미 그같은 것들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으로 살도록 부름받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그와같은 것에 대하여 죽었다 함은 그 같은 것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가족을 바르게 돌보지 않거나 술 취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는 죄되고 자기 중심적인 행동을 멈추어야 한다. 당장 그렇게 할 수 있다. 이같이 하기 위한 동기를 유발하려고 수차례의 상담이 필요하지 않다. 자기 자신보다 자신의 행동을 더 비난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변명할 거리를 찾는 것이다.
과거를 캐내는 것
많은 현대 심리학적 상담에서는 사람들이 왜 그와같이 행동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과거를 많이 캐어낸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위해 그같이 과거를 캐내야 하는가? 어느 유명한 성경교사의 말이 현재에 대한 답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와같은 접근방법은 결코 성경적이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는 크리스찬 상담가가 그들의 문제가 필경은 그들의 부모가 그들을 다룬 것으로부터 발생했다고 결론을 내리므로 그들의 부모와 다시는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와는 반대로 성경이 사람들의 과거를 다루는 것은 그들을 십자가로 데려가려는 것이지 결코 어린 시절로 데려가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만이 그들의 죄에 대한 답을 줄수 있는 곳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과거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들의 문제를 나쁜 부모나 나쁜 환경의 탓으로 돌린다. 우리는 정말 어린 시절에 학대받은 경험이 있는 그들을 소홀이 여기기를 원치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우리가 현재 이러한 것에 대해 부모들을 비난하는 것이 결코 답이 될 수는 없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무섭고 불쌍한 어린 시절을 경험하였다. 결과적으로 죄인 아담의 후예가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그 해결 방법은 우리의 과거 속에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답은 바로 십자가에 있다. 십자가는 지옥으로부터 단순히 구원받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 거기에는 과거를 극복하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받았다. 우리의 과거가 아무리 끔찍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어떠한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종종 사람들은 그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하여 쓴 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것 같이 우리도 우리를 상처준 사람들에 대하여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상담의 모형
심리적 상담은 자주 그들의 상담자와 만나야 하며 지속적인 만남을 유지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사람을 돕는 것이 마치 하나의 과정과 같이 여겨지고 있다. 교회는 우리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특별히 개인적으로 만나 전문 상담을 해야만 한다는 그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전문상담 모델은 결점을 갖고 있다. 분명 성경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상담하는데는 아무 잘못이 없다. 때로 우리는 다른 믿는 자들을 만나야 할 때가 있으며 그럴때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이 해야할 바를 지시해 줄 수 있다. (갈6:1참조) 그러나 전문 상담의 진행방법에서 상담자와 지속적으로 만나는 것은 성경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영적 성장의 성경적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순종하는 것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다루는 전문 상담과 같은 세상적인 방법을 결코 채택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면 왜 죄를 다루는 방법이 하나의 과정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왜 인간은 죄중에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성경으로부터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러할 때 그들은 즉각적으로 죄를 그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종종 그들은 그들의 죄를 그치기 위하여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죄를 오히려 소중히 여기며 결코 끊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이렇게 그것을 간직하고, 굳게 붙잡고 있는 죄들을 일컬어 “bosom sin"(마음 속의 죄)라 부른다. 이렇게 우리가 문제로 가지고 있는 죄는 우리가 그안에 소속되기를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신자가 그 죄에 대하여 통제하지 못하는 죄는 없다고 하였다. 만일 그런 죄가 있으면 로마서 6장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죄속에 있는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전국의 수 많은 유명한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를 만나고 상담을 받은 한 여성이 상담을 하기위해 어느 복음주의 목사를 찾아갔다. 그녀는 이미 많은 시간을 상담받았을 뿐 아니라 약물 치료를 받아 왔었다. 그녀는 대뜸 그의 첫 상담에서 그 목사에게 자기를 위하여 얼만큼의 시간을 할애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한시간이라 답하자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려면 하루 종일도 모자란다고 하며 목사에게 그날의 모든 스케줄을 다 취소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목사는 일단 한시간으로 시작하고나서 스케줄을 바꾸자고 하며 상담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지 10분이 안되어 그는 그녀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겠다고 하였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소모시키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이 얼마나 나쁜가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이 옆에 앉았다 소리쳤다. “이제 누군가가 이런 사실을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 그녀는 그런 일로서 자신을 낭비하며, 그러한 자신을 재확인키 위한 상담을 그쳐야 할 때가 되었다. 그녀가 크리스찬으로 알아야 할 것은 그녀의 초점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섬기는 일이다(빌2:3-4). 그녀가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성령께서 그녀가 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그녀의 의무이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그녀가 만난 사람들이 모두 기독교 심리학자였으며 그들중 그 누구도 그녀에게 성서를 근거로 그녀가 해야 할 것들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가 기독교 심리학자와의 상담으로 청구받은 액수는 한주에 5000불이었다. 만일 목사가 상담료로서 그같은 값을 청구했다면 그를 장사꾼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심리학자라 할 때 그같이 청구할 수 있는 것이다.
죄의 범주
이 세상의 가치관은 지난 몇 년을 통하여 죄에 대한 나름대로의 범주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제 교회도 그같은 가치관을 채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 교회는 알코홀 중독자나 가정 폭력자등을 위한 자활그룹(support group)을 갖고 있다. 모든 죄는 독특성을 갖으며 각기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어느곳에 죄를 그 같은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특별히 복잡하게 엉킨 죄들로 인해 속임수에 넘어간다. “성경 어디에 bulimia에 대해 나와 있습니까?” 아니면 “ anorexic이 병이 아니라면 성경이 어떻게 그를 도울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각각의 죄를 다루는 각기 다른 패턴을 만드시지 않았다. 즉 bulimia를 위한 이런 계획, 간음을 다루시기 위한 저런 계획등으로 하지 않으셨다. 그는 모든 죄를 같은 방법으로 다루신다. 교회는 세상이 죄의 범주를 만들고 죄를 다루는 방법대로 죄의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된다.
때때로 사람들은 심리학의 사용에 대해 정당화하는데 그 이유는 현대의 문제들은 더 가혹하고 따라서 성경이 제안하는 것보다 더 깊은 치료가 요구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죄들이 그들이 아는 것과 같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예로 로마의 여자들은 식사후 억지로 먹은 것을 토해 내었다(현대의 bulimia). 음주벽이나 부도덕 또한 그 당시의 문제였다. 고린도시는 부도덕으로 널리 알려진 도시였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오늘날의 사람들과 꼭 같은 죄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 고 하였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프로이드의 가르침이나 다른 심리학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지 않았으나 그들은 그들의 삶을 거룩하게 살기 위해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부족함이 있었는가? 그 답은 분명 “아니다”. 그들은 경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자원을 갖고 있었다. 만일 심리학이 삶에 그같이 중요한 것이라면 그 오랜 시간 동안 심리학이 없는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신학교에 다닐 때 누군가가 심각한 성격장애를 일으키거나 정서적으로 심한 불안증세를 보이면 우리들은 그에게 전문 상담가를 찾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영적인 문제,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닐 때 적용하기 유익하나 악한 사태의 문제가 발생할 때는 전문 상담가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같이 성경이 최악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성경이 죄를 다룰 수 없다면 무엇에 유용하겠는가? 여하튼 현대의 교회들은 성경 하나만을 영적 자원으로 삼기에는 너무 단순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롬1:16)’이라고 하였다. 그 구원은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죄의 많은 범주를 만들어 내었으나 성경은 이 모든 것을 같은 방법으로 다룬다. 어떤 이들은 성경만으로는 모든 죄를 다루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믿을지 모르나 그 같은 것은 타락과 죄성으로 부터 인간을 자유케 하는 성경과 복음의 정확한 목적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죄가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 (롬6:12-14)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분으로 인해 믿는 자는 죄가 그를 지배하게 용납하면 안된다. 불신자는 그가 죄의 종이므로 결코 죄를 짓지 말라고 요구되지 않는다. 반면에 믿는 자는 육체의 정욕에 복종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도 아직까지 육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롬7:14-25).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인해 그는 이같이 말할 수 있다. ‘내가 비록 유혹을 받으나 죄를 지을 필요는 없다. 나의 육체는 의의도구로 쓰일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께 속한다. 우리는 그 육체를 그의 목적의 성취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재산인 고로 우리의 육체를 의를 위한 것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사용할 권한이 우리에게 없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롬6:17-18)
믿는 자는 ‘죄의 종’ 이었으나 이제 그들은 ‘의의 종’이 되었음을 상기하여야 한다. 죄에 대하여 주장하는 것은 아직도 믿는 자를 복음의 핵심을 부인하도록 노예로 삼은 것이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0,22)
우리는 죄의 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된 이래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성화시킬 수 있다. 그것은 간단한 문제로 기독교인은 죄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는 ‘나는 다시 알코홀 중독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좋은 아빠요, 남편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이들은 상담자나 그의 목사에게 이렇게 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문제들로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당신은 모를겁니다.’ 그렇다.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하나님의 영은 당신의 삶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요점은 나의 죄를 버릴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때때로 우리는 죄에 대해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제한하는 것을 개발하며 그러한 핑계속에 우리의 죄를 평안한 마음으로 지속하고저 한다.
그러나 죄는 더 이상 우리를 통제할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때 그는 죄의 권세를 깨뜨렸다. 이제 우리는 의를 행하며 사는 존재인 것이다.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에게 크리스찬 삶의 기초를 가르쳐 준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려진 죽음과 부활의 권세인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며 죄의 권세는 물러가는 것이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그같은 진리의 빛가운데 살아야 한다.
그러면 동성애, bulimia, 간음.. 그밖의 죄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로마서 6장이 바로 그 답이다. 어떤 이들이 교회에서 로마서 6장을 집어 던지고 기독교인들에게 심리학의 전문적 훈련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태도이다.
결 론
진리를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이같은 싸움을 포기하고픈 유혹을 갖는데 그것은 진리를 위해 굳게 서는 것이 때때로 충돌을 뜻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이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진리에 굳게 서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안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심리학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한는가?
“깨어 있으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언젠가 이같은 가르침을 따르기를 원치 않는 때가 오리라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1-4)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의 순수성에 서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항상 진리를 듣고자하지 않는다. 그대신 그들이 듣고자 하는 것을 말해주는 선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믿음의 도를 위해 싸우라
이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이같은 아픔이나 분리, 불화가 과연 값있는 것인가 의심해 볼때가 있다. 그러나 믿음에 진실하게 남아있기 위하여 우리는 조심하여야 한다. 유다는 유다서 3절에서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
헬라어로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agonizo 라 하였는데 ‘고투하다’는 뜻이다. 유다는 기독교인을 진실된 믿음을 위해 격렬하고 어려운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4절) 때문이다. 믿음을 위해 성실히 싸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교회안에 거짓 가르침을 일으키려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라
기독교에서 심리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심리학은 기독교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구원과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아무 도움이 안된다. 오히려 우리의 도움에 파괴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과 심리학의 절충을 위한 시도를 버려야 한다. 심리학에 대한 문제의 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순종하는 것이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2: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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