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상담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2)

이요나 2007. 4. 18. 19:07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2)

  
내적치유에서는 죄는 상처를 받은 보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고 한다. 또 죄는 다른 사람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심리라고 한다. 여기서 "필요"라고 하는 것은 주로 "사랑을 받는 것"을 말한다. 내적치유 운동과 통속 심리학(pop psychology)들은 이런 내용으로 큰 "북(drum)"을 만들어 그것을 두들기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런 경우에 그들이 묻는 기본적인 질문은 "왜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 는 질문이다. 내적치유의 모든 체계가 이 질문에 따라 움직인다. 이것으로 내적치유의 동기를 유발하고 또 내적치유의 기본적 활력을 얻으려고 한다.

  내적치유의 주된 문제점은 "상처"이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죄는 상처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가 많고 비합리적이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성년이 될 때 이미 성격의 일부가 손상돼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손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상처를 만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주장은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심리이설의 교활함과 미혹이 숨어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말들은 표면적으로는 틀린 것이 없고 전적으로 사실인 것 같이 들리지만 바로 여기에 신학적 이론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 질문한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 닥쳤던 일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나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고난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신학적으로 근본적인 오류를 들어내는 것이다.

  내적치유자들의 말은 결국 "죄"의 뿌리가 "상처"라는 것이다. 또 죄의 저변에는 꼭 상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자들의 신학이요 논리이다. 우리가 악을 행하는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전 미국 대통령 Jimmy Carter의 죽은 누이동생인 Ruth Carter Stapleton은 교회에 내적치유를 처음 도입한 사람으로 사람들이 깊은 내적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부적합한 삶의 반응을 한다 주장하였다. 지금은 David Seamands가 교계의 내적치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저서 상한 마음 치료하기(Healing for Damaged Emotions)에는 내적치유의 심리이설과 세상적 신학이 가득 차있다.

  
내적치유는 현재 교회에 물결처럼 들어와 있는 통속 심리학의 하나로 통속신학 사상과 같은 신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같은 기법을 쓰지 않고 또 같은 말을 쓰지는 않지만 그들의 근본적인 구조, 즉 현실과 죄와 고난과 책임과 상한 내적 어린 아이 등을 보는 방법은 같고 이것들을 바로 내적치유의 주제들로 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성경적 상담을 한다고 해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가지 사건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고 이런 괴로움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있다. 성경적 상담은 이런 고통의 현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내적치유 운동이나 회복 운동 등에서는 고통과 책임을 둘러싼 이런 신학적 구조가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이 통속적인 심리학의 대부 Freud주의이기 때문에 그 주제는 언제나 어릴 때의 경험, 충격, 갈등 등이며 책임이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또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떨어지게 하고 있기도 하다.

  Dr. Robert Hemfelt 등이 공저한 사랑은 선택이다(Love is a Choice)에서도 사랑의 탱크가 비어 있다는 것이 전체 사상이다. 그러니까 내적치유와 똑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Larry Crabb의 "Unmet Yearnings for Love"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우리의 깊은 곳에는 부모(혹은 주로 돌보는 사람-primary care giver)에게서 받은 좌절 때문에 그리움이 있다는 것이다. Crabb는 상처받은 내적 어린아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그의 기본 논리는 같다. 부모(혹은 주로 돌보는 사람-Primary care giver)에게서 내가 상처를 받은 것이 나의 현재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상담에 관한 대다수의 책들의 구조가 기본적으로 이와 똑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과 삶과 마음을 위한 영적 싸움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행동과 삶의 압력과의 관계, 좌와 고통과의 관계, 개인의 책임과 이런 것들과의 관계가 우리를 형성하고 움직이고 몰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또 이것이 앞으로 내가 진리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서겠느냐 아니면 앞으로 교회를 휩쓸 다른 복음을 따름으로 저주를 받을 것인가(갈 1:8-9)를 결정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유주의의 전성기는 갔지만 보수주의가 계속 심리학화 되어가고 있다면 교회의 부흥의 바람을 그들에게서 기대하기는 힘들다. 보수주의가 진리의 깃발을 들고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서려면 "고통"과 "책임"의 문제를 정확히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보수주의가 고통을 부인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책임"과 "고통"에 대해 우리가 잘못 답변을 하면 우리는 다른 복음을 만들어 심리이설의 바람을 일으키는 거짓된 보수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싸움은 우리의 삶(practice)이다. 어떤 면으로는 이것이 더 큰 도전이다. 왜냐하면 내가 죄를 다루고 고난과 상처와 고통과 다른 사람들의 죄와 어려움과 고통을 다루는 방법이 모두 여기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적치유나 통속 심리학이 신학적으로 틀렸다고 지적할 뿐 아니라 그들의 오류까지도 지적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는 남에게서 피해를 받은 사람과, 곤경에 빠진 사람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과,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 이들을 내적치유와 통속 심리학과 세상에서 말하는
회복운동(recovery movement)에서 구해낼 수 있어야 한다.

  
통속 심리학을 읽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이야기가 자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거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꼭 자기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래 맞다, 내가 완전주의자이다, 그래 내가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다, 그래 나는 초 민감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이것들이 자기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느냐가 성경적 상담자에게 닥친 큰 도전이다. 결국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것과,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에 관한 우리의 확신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데 필요한 지혜와 온유함과 인내력과 부드러움이나 공감 등과 결부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도전을 감당하려면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인내와 용기와 진리를 우리의 사역에 적용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런 주님의 성품과 사랑과 주님의 마음만이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을 믿고 또 성경은 이런 문제를 다루어 생명과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데 충분함을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