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상담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3)

이요나 2007. 4. 18. 19:14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3)  

   심리학자 Carl Gustav Jung에 의해서 내적치유가 교회에 들어왔다. 그리고 전에는 심리학과 정신과학과 새시대(New Age) 사람들만 하던 내적치유가 그의 제자 Agnes Sanford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기독교회에 더 깊이 뿌리를 박게 된 것이다.

  교회에 들어온 내적치유는 그의 기법인 "퇴행(regression)과, 심상법(visualization)과, 유도 심상법
(guided imagery)과 꿈의 분석과 게슈탈트(gestalt: 원시적 비명, 감정의 표출, 역할 대행 등)와 같은 기법의 하나 혹은 전부를 사용하면서 이것들을 성경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해왔다.

물론
  
인간의 영혼을 돌보는 사역 발상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전한 정서를 갖기 원하시며, 분이나 시기, 질투와 같은 파괴적인 정서들은 버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기 원하신다(갈5장 참조). 그래서 참다운 내적치유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개개인의 형편에 맞게 행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온 내적치유와 심리학은 성경에서 말하는 상담이나 권고나 권면이나 훈계 등의 성경적 사역과는 전혀 다르다. 간혹 성경적으로 상담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역을 "내적사역"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정서적 건강과 영적 건강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서적 건강은 성화의 과정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마음에 믿고 영접한 다음에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살게 하시는 결과라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적 치유가 필요 없고 계속 삶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바로잡아 가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평생 의로 교육하는 것만 계속 하면 된다. 예수님의 삶을 바로 우리의 삶의 전형으로 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도록 해야 한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야만 영적인 생명과 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교회는 이것을 분명히 충족해 주어야 한다. 심리적 기법은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도 영적인 생명을 줄 수는 없다. 따라서 내적치유란 말은 성경적 상담이나 신앙생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성경이 중심이 되지 않고 심리적 이론이 주가 되면 그것은 벌써 심리이설이다. 이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갈 2:8)고 하신 말씀대로이다.

  내적치유의 기본적 전제 중의 하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부정적인 경험을 하기 때문에 정서적 상처를 받고, 또 뿌리가 깊고 식별하기 힘든 상처는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이성이 발달하는 6세 까지 사이에 받는 상처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처는 무의식 세계에 숨어 있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한 이유 없이 자기가 원치 않는 행동을 하게하고 느낌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정신적 결정론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운명론이기도 하다.

  내적치유는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자기에게 심리적 상처를 준 그 순간들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내적치유자들은 전생까지 기억을 더듬어 전생에 받았던 상처까지도 다룬다고 주장하면서 진화론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참으로 회칠한 무덤이다. 이들은 이런 상처와 고통을 완화 시키고 치유를 하기 위해 환자들에게 "퇴행(regression)과 심상법(visualization)과 유도 심상법
(guided imagery) 등의 기법을 사용하며 또 이것을 환자가 혼자 해 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내적치유자들은 사람이 겉으로는 정서문제를 들어내지 않거나 또 상처를 받은 것을 생각해 내지 못해도 사람은 누구나 내적치유를 항상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누구나 상처를 받으며 심한 경우에는 아동학대를 당하기도 하고 또 자기도 모르는 난산의 고통 때문에 상처를 받는 등의 불쾌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적치유를 한다는 기독교인들은 내적치유는 성령님과 예수님을 돕는 일이라고 하면서 기독교라는 가면을 쓰려고 한다. 그리고는 내적치유를 성령님이 역사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얼마나 잘못되고 미혹적인 말인가? 첫째로 성령님은 심리적 기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이나 또 구약의 선지자들이 인간의 심리적 구성을 알고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그 분들이 내적치유와 같은 임상심리학의 기법을 사용한 증거는 성경에 전혀 없다. 둘째로 내적치유는 사람의 육신적 상상에서 얻는 인간의 힘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을 대치하려고 한다. 성경이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신 분명한 말씀을 그들은 무시하려고 한다.

  셋째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이나 교인들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은연중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우리의 기본적 욕구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물질이 필요하면 물질을 채워주시고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도 충실히 나가고, 성경도 매일 보고, 기도도 매일 하는데 왜 나의 욕구를 채워주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한다.

 

예수님을 나의 육신적 및 물질적 유익을 위해 이용하고 부릴 수 있는 분으로 착각한다. 나에게는 물질이나 건강이 필요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것들을 채워주실 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목적이 성령님께 쓰임 받기 위해 이 세상에 살고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고전 10:31). 고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 욕심만을 가지고 하나님 대신 자기를 삶의 초점으로 삼게 된다.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은 교회에서 내적치유를 하게 되면 성령님과 예수님이 촉매 역할을 하는 상담자가 되기 때문에 치료가 쉬워진다고 하면서 내적치유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속의 참된 평강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게 드릴 때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던지 하나님께서 완전히 나를 주장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때에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속에 충만해지고 우리의 육신도 건강해진다.

  또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이 내적 치유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용서를 못하면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은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는 용서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내적치유는 환자들에게 자기가 과거에 받은 상처를 다시 경험하게 해서 환자로 하여금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기를 임신 중에 아버지와 다투어서 내가 상처를 받았으니 그 어머니를 용서해 줄 필요가 있고 또 하나님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하나님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한다.

  용서가 정서적 건강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도 하나님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기분을 돋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하는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고 또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주장하실 때에만 가능하다.

  내적치유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해주고 성경도 더 많이 읽고 싶게 해주기 때문에 내적치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분명하다고 내적치유자들은 주장한다.
내적치유를 받는 사람이 이러한 기분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기분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알리는 표식 판이 될 수는 없다. 많은 이단자들과 새시대(New Age) 종파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보다 얼마나 성경을 열심히 읽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느낌만 가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 망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의식 상태를 변화시키는 영적인 연습만을 해도 경험할 수 있다. 이단자들도 자기들의 생각으로 만든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에 대해 간절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묵상을 끝낸 동방 신비주의자들의 얼굴을 보면 기쁨이 충만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충만해 있는가? 사실 새시대(New Age) 철학의 전재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으로 완전한 통일과 조화를 이룬다고 믿는다. 내적치유자들은 내적치유의 방법으로 인류를 자연과 "우주의 마음(Universal Mind)"에게 통합시키고 조화시켜 성경의 방법을 그것으로 대치해서 성도들을 성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고 분명한 심리이설이요 사탄의 역사임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