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상담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5)- 현재의 기억이냐 과거의 기억이냐

이요나 2007. 4. 18. 19:24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5)- 현재의 기억이냐 과거의 기억이냐

  과거는 성경적 상담자가 다루어야 할 뜨거운 문화적 토론이며 상담주제로 등장했다. "공동의존"의 문제나 "역기능 가족"들의 주제는 통속 심리학의 주제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와 그의 영향에 대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법에 대한 중요한 정신역학의 세 가지 이론을 알아야 한다.

  첫 째는 인간에 대한 Freud의 수력학적(hydraulic) 견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심리분석은 인간을 정서적 에너지가 가득 찬 뚜껑이 닫힌 용기와도 같다고 말한다.

사람 속에 있는 이런 에너지는 수력학적 액체와 같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으며 밖으로 스며 나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그 사람에게 행동을 가하면 그 에너지는 다른 곳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가하는 압력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Freud의 결정론의 원색적 이론이다.

  두 번째는 무의식의 개념이다. 무의식이란 말은 우리가 기억을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억 못하는 것들이 많다. 어떤 것은 평생 기억 못하는 것들도 있다. 심리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이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억압된 기억과 충동의 원시적 늪이다. 이것은 속에 깊숙이 잠겨있는 것으로 탐색하고 꺼내낼 수 있도록 훈련받은 분석가가 아니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무의식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말이다.

  셋 번째는 카타르시스(catharsis-정화법)의 개념이다. 의식할 수 없는 에너지와 정서는 표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네 살 때 나의 부모에 대해서 분을 가졌으면 그 분은 아직도 내 속에 들어있어 다른 방법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40세가 되어서 그 분을 다루려면 그것을 지금 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담이란 피상담자에게 자신의 정서를 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카타르시스란 표현되지 않았던 느낌을 표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분이나 공격적 감정을 표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수력학적 견해가 무의식의 개념과 합쳐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이 되는 카타르시스의 이론을 만든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떠나서 다른 모든 연구 결과는 이런 느낌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학문적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분과 공격을 많이 표하는 사람은 더욱더 분을 내며 공격적인 것을 모습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래서 카타르시스는 분을 감소시키지 못한다. 이런 연구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이론은 과거에 대한 견해에 아직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기를 원하실까? 기독교 심리치료자들은 피상담자의 부정적 경험으로 상담의 주요 내용을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적 상담에서는 상담의 시작을 성경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준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해서 과거를 기억하라고 하신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느낌과 생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히 10:32-34에서 우리에게 "전날에 너희가 . . .  것을 생각하라" 즉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했던 중요한 일들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기억하면 지금 나의 삶을 신실하게 사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 하나님을 위해서 산 다른 사람들과 사건들을 우리의 기억에 저장해 두어 기억하면서 삶에 도움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과거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하신 세 가지를 보면:

  첫 째로 하나님은 "너희는 출애굽과 유월절과 유월절의 기념물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성경에는 이런 기념물이 많다. 야곱이 세운 기념물, 요단강을 건넌 후에 세운 돌 기념물 이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쓴 나물을 먹고 (출 1:14) 그들의 괴롭던 생활과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은혜의 행적을 그의 백성들이 잊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것들을 상세하게 기억하게 하셨다. 인간들은 잊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둘 째로 하나님은 주의 만찬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의 만찬은 우리의 기념물이다(눅 22:19).

셋 째는 고린도전서 10:1-13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의 어리석음을 기억해 교훈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 이는 과거는 언제나 현재에게 교훈과 권면을 준다는 말씀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과거의 기억은 그 해석에 따라 다른 뜻을 갖는다. 그래서 피상담자들이 상담에 갖고 오는 기억은 해석을 잘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들은 과거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방법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또 과거의 사건들은 현재까지 연결된다. 기억은 향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과거는 하나님을 위한 현재의 삶을 위한 것이다. 과거는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현재의 우리의 삶을 위한 것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과거의 이야기는 현재의 우리의 기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내용(context)를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죄는 역사가 있다. 거룩함과 좋은 은사도 역사가 있다. 과거는 무수한 방법으로 현재에 영향을 준다. 나에게 와서 도움을 청하는 피상담자는 어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도 역사가 있고 내용(context)이 있다. 누구나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려서 된다. 음성이 크고 거칠고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이 걸려 그렇게 된다. 만족하며 사는 사람도 만족의 비결을 배운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내용(context)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 각자의 이야기는 모두 독특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각자의 삶 속에 계심을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주신다는 말이다. 모세의 생을 보면 안다. 하나님도 모세를 오랜 세월 안 준비시키셨다. 애굽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을 준비하셨다.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세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셉의 이야기를 보자. 요셉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과 그의 꿈의 이야기로 형들의 미움을 사자 그의 형들이 그를 애굽으로 팔아 형무소 생활을 했다.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됐다. 그곳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을 보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 . ." 하나님이 그의 이야기를 쓰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을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즉 우리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서 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하셨기 때문에도 중요하지만 과거는 우리의 삶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그의 내용(context)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다.

 

출처: http://www.happyallthe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