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상담

성경의 교리와 상담의 권위

이요나 2007. 4. 19. 11:13

성경의 교리와 상담의 권위

 

심리치료법이 나오기까지 하나님은 삶의 문제를 다루는 일을 중지하고 계셨던가? 신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그들이 전도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쳤는가? 아니 이 분들은 고사하고 예수님은 그를 따르던 무리에게 또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셨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오실 때 예수님이 받아 가지고 오신 이름 중의 하나가 "모사"(상담자)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이 제공하는 세상 지식 없이도 효과적인 상담을 하시지 않으셨는가? 예수님은 그 당시 어떻게 상담을 하셨던가?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해답은 분명해진다. 물론 예수님은 구약을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다른 사람을 정확히 상담해줄 수 있는 모든 성경의 지식(구약)을 다 갖고 계셨다. 예수님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딤후 3:17)을 가지고 계셨든 것이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교회도 예수님에 이어 상담사역에 필요한 풍부한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방법대로 상담을 해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어로 counsel, 즉 조언, 지혜, 상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라고 성경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실 때 성경을 인간에게 줄 counsel, 즉 조언, 지혜, 상담의 말씀으로 주셨다. 이것을 목회자나 평신도에게 주실 때에도 그렇게 주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목회의 두 중요한 날개가 전도와 상담임(마 28:19-20)을 기억해야 한다. 전도와 상담이 빠지면 목회는 주님이 계획하신 목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와 관련된 다른 것들은 모두 전도와 상담을 돕는 사역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의 무오성은 상담을 위해서 더구나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한 딤후 3:16이 매우 중요한 뜻과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셔서(God-breathed)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입김으로) 뜻이다. 우리는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전도도 상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려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전도와 상담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고 유득히 효과가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인간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도 성경으로만 하면 그것은 직접 하나님의 의견을 그의 음성으로 듣는 것이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상담은 세상의 어떤 다른 상담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그러나 이런 권위를 세상에서 말하는 권위주의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상담자의 권위는 모든 면에서 성경자체에 의해서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담을 꼭 성경만을 가지고 해야하고 그 성경을 주석해주고 설명할 때에도 인간의 권위나 의견을 붙이면 안된다. 상담은 성경을 그대로 가지고 해야 하고 그것을 주석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Albert Ellis는 자기의 의견을 말하지만 성경적 상담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상담자가 자기의 권위로만 말을 한다면 이는 신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신학을 많이 공부했어도 자기의 권위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의 삶의 변화를 위한 해답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한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그의 전지 전능하신 지식을 가지고 변화의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견해도 인간의 유한하고 죄성이 주는 제한 때문에 그 상담은 부분적이 되고 편견 없는 것이 될 수는 없고 항구적인 변화를 줄 수 없는 것이다.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권리주장은, 물론 그것이 본질적인 면에서는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크게 잘못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표하고 축복을 주시기 위해 유대인들을 특별한 백성으로 또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신 것이 그들을 분리주의자가 되라고 또 다른 민족들을 격멸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이런 과격한 분리주의적 변질 때문에 그들은 사마리안 사람들과는 상종치도 않았다(요 4:9). 마찬가지로 성경적상담도 배타주의로 나가기가 쉽다. 성경적상담이 이방인에게, 또는 믿음이 약한 자에게 복음을 알리고 전하는 기회를 막아서는 안된다.

 

상담도 바로 전도할 수 있는 전도의 현장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경적상담이 세상과 분리되어야 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을 정확히 또 깨끗하게 구분하자는 것이지 성령의 능력을 보이는 기회를 막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상담의 기법이나 이론이 다른 것을 믿는 사람들을 세상과 분리하는 것을 뜻하는 배타주의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심리학자들의 말을 추가해서 기독교의 능력을 약화시키지 말고, 오히려 상담이 무엇인가 말씀이 갖다주는 능력이 다르다는 것을 세상에게 보여주는 귀하고 효과적인 기회가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다니시면서도 특이하게 그의 능력을 보여주시면서 예수님께서 특이하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셨든 것과 같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통합적 방법(성경과 심리학을 통합하는 심리이설)을 택하면 세상에서 더 환영을 받고 세상 사람들에게 수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착각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환영도 받고 수용도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성경적 상담자들을 자기들과 동류의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경적 상담자가 그들의 기법이나 이론면에서 심리이설자들이나 세상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예수님과 똑 같은 모습을 세상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Freud나 Skinner나 Mowrer 등과 나란히 상담자의 자리에 올려놓거나 앉게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독특하시고 홀로 뛰어나신 분이다. 그래서 그의 상담(성경적상담)도 홀로 독특하고 뛰어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하시고 이에 따르는 상담의 능력을 보여주셨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홀로 우리의 상담 모델이 되시는 것이다.